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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역사] 31. 대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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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한국전쟁 때 필자가 일한 ‘유엔오피서스 클럽’이 있던 부산 남포동 거리.

고향 증평의 후배 최태천(崔泰天)을 만났다. 무조건 그의 사무실로 끌려갔다. 광복동 끄트머리였다.

"여기 와서 포로수용소에 부식품을 대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돈이 생겼어요. 저 벽에 쭉 쌓여 있는 탄약상자들 안에 모두 돈이 들었어요. 여기는 졸병들이 노는 지아이(GI)클럽은 있는데 점잖은 장교들이 놀 데가 없다고, 나보고 유엔군 장교 구락부(클럽)를 하라네요. 난 영어도 못하고… 형님이 맡아 주세요."

우리는 돈 한푼 없이 내려와 괜히 광복동을 왔다갔다 하는데, 저 상자가 모두 돈 상자라고?

"그러니까 댄스홀인가?"

"고급 댄스홀입니다. 벌써 미국에다 술 주문 다 해 놨어요."

"난 댄스도 못하지만, 사업하는 재간이 전혀 없어."

재차 청을 받았을 때도 나는 "노"라고 했다. 3차, 4차, 5차….

"모두 도둑놈이에요. 믿을 수가 없어요."

그의 사업은 엄청나게 성장했다. 잡아들인 인민군 포로는 매일 그 숫자가 늘어나고, 안 먹일 수는 없고. 세상에 이런 사업도 다 있단 말인가. 일곱 번째 청을 받고 나는 말했다.

"알다시피 나는 문학 공부를 한 사람이야. 돈벌이하고는 인연이 멀어. 수락하는데 조건이 있어. 나로 인해 돈 벌 생각은 아예 하지마. 대신 본전을 축내는 일은 없도록 할게."

부산 남포동 한복판. 스타다방 2층이었다. 군함이 실어 왔다는 케네디언 클럽.시그램 브이오 위스키를 비롯해 각종 캔맥주가 왕창 준비됐다. 오픈하던 날은 그야말로 일대 축제 분위기였다. 명색이 유엔군 환영위원회 주관 '유엔오피서스 클럽'이다. 미 항만사령관.헌병사령관과 우리나라 외무장관.경남지사 등 귀빈들이 와서 춤을 추며 즐겁게 놀았다.

내가 명색이 지배인이다. 그러나 춤을 출 줄도 모르고 미군하고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다. 광복 후 놀아나는 지아이클럽의 행패에 침을 뱉던 쪽이다. 수영에 미군 비행장이 있었다. 목숨을 걸고 출격했다 오면 심신을 풀고 싶었으리라.

서울을 빼앗기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최전선의 상황을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쟁은 인간의 '지랄병'이라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너희는 살인 기술자냐? 그것이 나의 시선이었다.

어느 날 손원일(孫元一) 항만사령관의 소개라며 중년을 넘긴 듯한 한 부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카운터를 봤다. 립스틱을 바르고 화장도 짙게 한 모양이 보통 여자는 아니다.

밴드가 희한했다. 마스터는 임근식(林根植). 나중에야 알았지만 한국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유명한 임원식(林元植)의 형이다. 색소폰은 조춘영(趙春影)이 불었다. 훗날 모두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다. '대전발 0시50분'을 작곡한 김부해(金富海)도 같은 팀이었다. 그들이 연주하는 재즈에 맞춰 미군 장교들은 미친 듯이 춤췄다.

한운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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