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귀족을 대표하는 엘레강스 세단으로 손꼽히는 재규어는 1990년대 이후 파란만장한 인생을 겪어 왔다. 재규어는 올 3월 인도의 가장 큰 대기업인 타타그룹에 팔렸다. 1990년 포드가 인수한 이후 13년 만이다.
재규어는 2001년 현대자동차그룹에서 인수를 놓고 저울질하기도 했다. 당시 정의선 부사장(현 기아차 사장)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들은 재규어의 럭셔리 세일즈와 마케팅, 세계적인 명성을 갖고 있는 V8엔진(터보차저 포함)이 탐이 났다. 당시 인수 예상 가격은 2조원선으로 지난달 타타에 팔려나간 2조6000억원과 엇비슷했다.
영국 귀족차로 이름을 날린 재규어의 매력은 무엇일까. BMW처럼 빠르지 않고 그렇다고 벤츠처럼 중후하지도 않다.
하지만 재규어에는 이들 차에 찾아 볼 수 없는 ‘브리티시 엘레강스’라는 품위가 있다. 긴 선을 중심으로 낮은 차체의 날렵한 디자인은 재규어의 품위에 고성능이라는 이미지도 안겨 줬다. 재규어는 특히 통상 5년마다 바뀌는 모델 체인지 때도 기존의 디자인을 고수한 경우가 많았다. 품위는 혁신적인 변화보다는 전통의 계승이라는 차원이라고 할까. 소형 대중차와 트럭을 주로 만드는 타타가 주인이 된 재규어는 이달 신개념 세단 XF를 선보였다. 물론 이 차는 타타의 영향은 전혀 없이 기존 재규어 기술진이 만든 차다. 보수적인 포드가 오랜만에 재규어에 거액을 투자, 변혁을 시도했지만 타이밍이 절묘하게 타타에 넘어갔다. 재규어 이름을 빼고 모든 것을 바꾼 XF를 제주에서 이틀간 시승했다.
<미래형 디자인이 제대로 녹아든 명작>
중형차인 S-타입 후속으로 등장한 XF는 재규어의 앞날을 점칠 대단히 중요한 모델이다. 디자인부터 실내 인테리어, 성능까지 새로운 재규어를 알리기에 손색이 없다. 2004년 개발된 컨셉트카 ‘C-XF’의 양산형 모델인 이 차는 첫 눈에 미래 감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파격의 디자인이라고 할까. 지난해 9월 프랑크푸르트 모터쇼 직전 공개된 뉴 XF의 제원과 사진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어떻게 재규어가 이렇게 변화 아니 혁신할 수 있을까’ 하는 탄식과 감탄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94년 삼성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에서 가장 매력적인 말은 ‘마누라 빼고 다 바꾸라’였다. XF는 이런 점에서 기존 재규어 디자인의 전통을 완전히 바꿨다. 하지만 ‘아름답고 빠른 차(Beautiful Fast Car)’라는 기존 재규어의 브랜드 전통은 그대로 계승했다. 이런 전통이 있느냐 없느냐가 브랜드가 있는 차냐, 아니면 단순히 값비싼 옵션을 잔뜩 단 비싼차냐 하는 갈림길이다.
현대차 제네시스를 등장시켜보자. 2002년 스포츠 세단을 컨셉으로 제네시스 개발을 시작했지만 올 초 등장한 제네시스에 스포츠 세단의 느낌이 나는가 말이다. 경영진의 품평회를 거치면서 현대차가 상정한 경쟁차(예를 들면 렉서스 ES350, 아우디 A6 등)보다 트렁크를 크게, 실내도 더 넓게... 이런 주문이 쏟아지다 보니 기존 스포츠 세단의 컨셉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적어도 스포츠 세단을 지향하려면 뒷좌석 헤드 룸 공간의 손실은 피할 길이 없다. 렉서스 GS가 대표적이다. 물론 ES350보다 판매에선 절대 열세이지만 스포츠 세단이라면 적어도 C필라(트렁크와 실내를 구분하는 가장 마지막 기둥)에서 급격히 유선형으로 떨어지는 선들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ES를 누가 스포츠 세단이라고 부르는가 말이다.
브랜드에 대한 강한 이미지가 있어야만 잔잔한 유혹을 떨칠 있다. 재규어가 제네시스처럼 변신을 시도했다면 아마도 재규어 매니아들은 모두 등을 돌려 버릴 것이다. 이동 수단의 자동차가 아닌 명차(名車)가 되려면 실내가 호화롭고 최고 마력이 어떻고 하는 것 이외에 브랜드를 지켜온 철학이 필요하다. 이런 것들은 수 년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브랜드 파워가 어려운 것이 아닐까 한다.
스포츠 쿠페 스타일이 여실히 느껴지는 5인승 세단인 XF의 가장 큰 매력은 디자인이다. BMW의 크리스 뱅글, 아우디ㆍ폴크스바겐의 발터 드 실바와 함께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히는 재규어의 이안 컬럼의 손길이 녹아 있다. 쿠페를 연상시키는 유선형 실루엣은 이안 컬럼의 명작 뉴 XK 스포츠카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물론 이 차 역시 컬럼이 가장 아끼는 애스턴 마틴의 디자인 컨셉과 비슷하다.
외관 디자인은 표범(재규어)이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듯한 웅크린 자세를 연상시킨다. 이 안에는 강한 에너지가 함축된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전체적으로 다이내믹과 스포티가 럭셔리라는 재규어의 브랜드 이미지에 걸맞다.
쿠페형 세단이라는 것 때문에 뒷좌석 헤드 룸이 좁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는 여유가 있다. 필자의 키는 178㎝인다. 뒷좌석에 앉아도 머리가 천정에 닿지 않는다. 이 정도 공간이라면 서 너 시간 여행할 때 아무런 불편이 없을듯 하다.
XF는 특히 유선형 에어로 다이내믹 디자인에 공을 들였다. 이는 시속 200㎞ 이상에서 차체가 부상(浮上)하는 것을 막아준다. 차를 아래로 눌러주는 힘인 다운포스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재규어코리아 이동훈 대표는 “XF의 고속 안정성은 XJ 수퍼카보다 뛰어나다”며 “공기저항계수도 역대 재규어 가운데 가장 좋은 0.29로 고속 주행에서 동급 스포츠 세단 가운데 경쟁자를 찾을 수 없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재규어 역사상 가장 파격적인 디자인에 선행 기술이 여럿 추가된 XF는 스포츠카로서 다이내믹한 주행성능뿐 아니라 널직한 실내 공간으로 레저용 세단으로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한 마디로 가장 치열한 수입차 시장인 럭셔리 중형차 시장을 뒤흔들 ‘돌아온 장고’라고 할까.
2편에서는 주행 성능과 승차감을 중심으로 논하겠다.
김태진 기자 tjk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