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뮤지컬 ‘이블데드’는 무대 바로 앞 스플래터존(Splatter Zone)이 최고 인기 좌석이다. 공연 중 무대용 피가 튀기도 하고, 특히 막판에 좀비들이 내려와 관객에게 피를 마구 묻힌다.
‘컬트의 산실’ 소극장 뮤지컬
스플래터존 43석은 6월 15일 마지막 회차까지 매진됐다. 옷을 더럽히기 싫으면 극장 측이 나눠준 우의를 입으면 되지만, 일부 관객은 일부러 흰 셔츠를 입고 와 피를 묻혀가기도 한다. 스플래터존은 캐나다 초연 때부터 비롯됐지만, 좀비 배우들이 내려와 관객을 덮치는 것은 국내 제작진의 아이디어다. 제작사 쇼팩의 송한샘 대표는 “좀비 배우들이 스플래터존을 덮치면 기다렸다는 듯이 배우를 꼬집고 안 놔주는 관객까지 있다”고 객석의 호응을 전했다.
관객의 열광과 참여는 컬트를 컬트답게 하는 필수 요소다. 그런 점에서 소극장이라는 공간은 ‘컬트 뮤지컬’의 충분조건은 못 돼도 필요조건은 된다. 관객은 코앞 무대에 밀착감을 느끼고, 배우들과 어우러지면서 ‘뮤지컬을 함께 만든다’는 유대감을 만끽한다. 대형 공연장이라면 배우가 객석까지 뛰어내려갔다 돌아오는 게 물리적으로 쉽지 않다. 관객도 마치 오페라를 즐기듯 작품의 위용에 감탄하고 싶어한다. 박병성 ‘더뮤지컬’ 편집장은 “대형 공연과의 차별화를 위해서라도 소극장 공연은 관객 참여를 적극 모색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컬트 뮤지컬은 소극장 공연이 자생적으로 살아남았을 때 얻는 일종의 ‘훈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원조 컬트 뮤지컬은 예외 없이 소극장에서 시작했고, 관객의 호응에 힘입어 규모를 불려갔다. ‘록키호러쇼’는 1973년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의 63석짜리 업스테어즈 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헤드윅’은 94년 미국 뉴욕 맨해튼의 한 드래그 나이트(drag night) 클럽에서 처음 무대화됐다. 본격적으로 공연의 꼴을 갖춘 곳도 98년 허드슨 강가의 허름한 호텔 지하 극장이었다.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브로드웨이로 진출한 ‘리틀 숍 오브 호러스’도 연극을 주로 상연해 온 버지니아 극장에서 출발했다. 모두 기발한 아이디어와 흡인력 있는 쇼가 입소문을 타면서 추종자들을 불러모았고, 그것을 발판으로 세계적인 히트 프로그램이 됐다.
한국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들이 ‘수입된 컬트’였던 탓에 자발적 동참 이전에 제작사 측이 관객 참여를 높여 ‘컬트화’를 주도했다. 2001년 ‘록키호러쇼’를 연출했던 이지나 연출은 “공연 도중 배우가 관객에게 춤을 가르쳐 주는 장면 같은 경우, 처음엔 어리둥절해하며 반응이 없어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점차 엽기·일탈의 ‘코드’가 알려지면서 관객과 배우가 극중 비를 함께 맞고, 객석 통로에서 어울려 춤추는 게 자리잡았다. ‘헤드윅’의 경우엔, 제작사 측이 영화 ‘헤드윅’ 동호회를 찾아가 뮤지컬 관람을 부탁하기도 했다.
이들과 함께 대학로에서 ‘헤드윅’ 플래시몹을 진행하면서 ‘헤드윅스러운 것’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극중 헤드윅을 흉내낸 금발 가발을 쓰고 오는 관객이 늘어났던 것이다. ‘이블데드’도 공연 전 원작영화 시사회를 주최하고, 호러영화 동호회를 접촉해 관심을 유도했다.
관객 참여를 높이는 것이 소극장 공연의 활로가 될 수 있다는 데 뮤지컬 관계자들은 의견을 같이한다. 송한샘 대표는 “2002 한·일 월드컵 이후 한국의 젊은층은 열린 공간에서 공동의 욕구를 발산하고 싶어하는 성향이 강해졌다”며 “소극장은 그 자체가 일정한 공동체의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무대와 객석의 벽을 허물려는 노력도 강하다”고 말했다.
다만 그것이 극의 미학을 해쳐선 안 되기 때문에, 관객 참여가 작품 안에 빌트인(built in)될 때 반응도 자연스럽고 오래 갈 수 있다는 것이다.결국 ‘컬트 뮤지컬’의 생명력 역시 작품 안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한때 반짝 인기가 아니라 꾸준히 롱런하려면 소재의 특이성을 넘어 뮤지컬 자체가 매력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지나 연출은 “헤드윅 같은 경우 음악이 워낙 좋고 국내 콘서트 뮤지컬의 효시였기 때문에 히트할 수 있었던 것”이라며 “컬트 뮤지컬이냐 아니냐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박병성 편집장도 “국내에선 뮤지컬 관객층이 작품을 옮겨다니며 관람하는 편이라 본격적인 컬트를 논하긴 어렵다”면서도 “컬트를 표방하는 뮤지컬이 틈새시장을 만들고 관객과의 소통을 높이는 면은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