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대륙고구려성>6.城山산성

중앙일보

입력 1995.08.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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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흐린 날 성산진 넓은 들의 비포장도로를 털털거리며 찾은 성산산성의 초입에는 근년에 지은 중국식 대문이 중국 특유의 붉은 색을 칠하고 취재진을 맞았다.
언덕을 올라 고구려의 성문터로 다가서니 돌깨는 망치소리가 들려온다.고개를 돌려 보니 20명 남짓되는 석공들이 곡마단 고깔을 쓴 듯한 작은 석탑들을 세우고 있었다.산등성이 밑에는 땅을고르는 불도저가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관광사 업에 열을 올리는 최근 중국의 한 단면이다.
성산산성은 요동반도 남쪽 해안과 가까운 산지 곳곳에 구축한 여러 산성 중 하나다.좌단(左端)의 지금의 大連시에 있는 대흑산산성을 시발로 고려산성.성산산성.낭랑산성등으로 이어지는 이 성들은 산둥(山東)반도에서 발진하는 중국군을 방어 하는 것이 주임무 중 하나였다.
중국 학자들은 성산산성을『자치통감』에 기록된 고구려와 당이 격전을 치른 석성(石城)으로 보고 있다.그러나 국내학자들은 아직 본격적인 현장 조사를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있다.
중국 학자들의 말을 따른다면 647년 3월 당태종의 제2차 고구려 침략때 산둥반도를 떠난 당의 수군이 상륙한 곳이 바로 성산산성 부근이었다.당시 당의 장수 우진달(牛進達)은 무려 1백여차례나 석성을 공격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남은 병졸이나마 추슬러 패주했다.
1,2차 침략전에서 쓴 맛을 본 당은 648년 요동반도를 통과하지 않고 바로 압록강 하구를 치는 3차 침략전쟁을 도발했으나 역시 실패했다.이 후 당 지도부에는 고구려에 대한 공포감이번져 그들이 바라던 고구려 복속화를 포기하였다 한다.
대신 그들은 소규모 부대로 고구려 국경 이곳 저곳을 치고 빠지는 기습전투를 자행했다.석성에서도 659년 당의 설인귀(薛人貴)가 쳐들어와 고구려장수 온사문(溫沙門)과 공방전을 펼쳤다.
둘레 3㎞ 정도인 성산산성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천단이었다.옛 고구려수도 集安에 있는 장군총의 축소판처럼 생긴 천단은 서쪽 성벽 정상부 가까운 곳에 있었다.『삼국지』 위지동이전을 보면 국왕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나온다.고구려산성이 단순한 전투처가 아니라 산성 주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성소로 존재했음을 이 천단이 확실하게 일깨워준다. 정사각형 형태의 밑단부터 위로 올라가며 각 단이 약12㎝씩 안으로 들어앉은 천단은 전체가 10단이다.맨 밑 한변의길이는 850㎝,맨 위 남아있는 9단의 폭은 540㎝다.장군총처럼 붕괴를 막기 위해 사방을 받쳤던 큰 돌들이 주위에 흩어져있다. 천단에서 남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보통의 무덤보다 세배쯤 큰돌 무더기가 있었다.적석묘같지 않다.무엇일까.
알수 없다.쌓인 돌멩이 사이사이에서 고구려 특유의 검은 기와.
붉은 기와 조각이 여러개 발견됐다.
이 돌무더기와 저 위 천단이 특별한 관계인가.궁금하기 짝이 없다.돌무더기 옆에 있는 편편한 바위 위에는 지름 17㎝,깊이12㎝ 가량의 구멍이 나있었다.이건 또 뭔가.이같은 바위 위의구멍은 성내 몇 곳에서 더 발견됐다.일설에는 깃대를 꽂기 위한용도라는데 크기로 보아 그런 것같지는 않다.
동행한 임기환(林起煥)씨가 『성산산성은 만주에 있는 어느 고구려성보다도 더 특별한 연구가 필요한 곳』이라며 눈을 빛낸다.
성벽.성문의 구조가 잘 보존된 것도 그렇고 곳곳에서 특이한 것들이 눈에 많이 띄는데다 성 전체의 구조도 매우 복잡하다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이 성의 성벽은 물결치는 듯한 곡선이 많고정문인 남문(폭4,안쪽 길이 460㎝)과 동문(폭 370㎝,안쪽 길이 480)의 성벽은 마치 몇십년 전에 쌓은 것처럼 깨끗했다.또 동문 위 50쯤 떨어진 곳에는 치(雉)가 보 존상태가좋은채 남아 있다.그러나 치 위에 모양을 낸답시고 최근에 올린듯한 성가퀴가 있는 것이 눈에 거슬린다.
***고구려 산성연구 최적지 그리고 정문에서 가까운 벽 일부중 가운데가 불룩 튀어 나온 것은 성벽안쪽의 토압을 못견뎌 붕괴돼가는 조짐이라는데 서쪽 성벽에는 이같은 토압.수압을 막기 위해 성벽 가운데 만든 배수구가 발견되기도 했다.
성의 동북쪽 끝에는 내성과 연결된 봉수대가 있다.그 북쪽으로는 또 테니스장 넓이의 두배쯤 되는 평지가 있는,높이 10여가량의 벽에 싸인 성터가 있는데 그 곳과 내성은 축조양식으로 보아 후대의 것이었다.이 모든 것이 고구려산성을 연 구하는데 성산산성이 최적의 장소라는 것이다.
***황유도호 황유도호(黃釉陶壺)는 고구려 중기의 토기를 대표하는 것으로 황갈유를 바르고 복부에 띠고리형의 귀 4개가 대칭으로 달려있는 형태다.입은 크고 벌어졌으며 목은 짧고 복부는둥그스름하면서도 길고,밑은 좁고 납작하다.풍만한 모양과 부드러우면서도 힘있는 선이 고구려인의 기상을 드러낸다.
이 황유도호는 부뚜막 형태의 도기와 세트를 이루어 5세기께 최고의 귀족급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集安의 삼실총,마선구 1호벽화고분,그리고 환인의 장군무덤을 들 수 있다(장천2호 벽화고분 출토.길림성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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