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헵번부터 베라 왕까지 ‘패셔니스타 바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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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호 06면

보헤미안 글래머(2003), 디자이너 베라 왕의 웨딩드레스(1998), 밥 매키의 ‘마담 듀’(1997), 워킹 바비(1961).

바비가 패셔니스타라고? 마트에 산처럼 쌓여 있는 꽃분홍색 박스 속에서 웃고 있는 인형을 생각하면 어이가 없을 것이다. 바비가 아이들 장난감인 것은 사실이지만 옷차림은 ‘장난감 그 이상’이다.1959년 출시될 때부터 바비는 가슴과 엉덩이가 발달한 어른의 몸을 하고 있었고 발 또한 하이힐을 신을 수 있도록 까치발을 지녔다. 옷 또한 당대의 성인 여성 패션을 반영했다.

당대 패션 반영해온 바비의 옷장

바비의 옷장을 열면 패션의 역사가 보인다. 59년 발매된 ‘이브닝 스플렌더(Evening Splendor)’는 모피를 곁들인 우아한 골드 드레스와 이브닝 코트의 앙상블, 진주 목걸이와 귀걸이로 50년대 후반 상류층의 전형적 모임 의상을 보여준다.

맨 아래부터 시계 방향으로 디자이너 시리즈 ‘지방시’(2000), 로버트 베스트의 45주년 기념 바비(2004), 인디고 옵세션(2000), 밥 매키 컬렉션 중 해·달·별의 여신, 할리 데이비슨 시리즈(1997, 여자 인형도 동일),

푸른빛 새틴 안감까지 댄 정교한 코트를 보면 바비 패션을 단순히 인형 옷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시 59년 나온 ‘로만 홀리데이(Roman Holiday)’는 이름 그대로 독특한 선글라스를 포함한 오드리 헵번 스타일을 보여준다. ‘인첸티드 이브닝(Enchanted Evening, 60~63)’은 우아한 드레이핑의 핑크 새틴 드레스와 흰 모피 스툴로 그레이스 켈리가 보여주었던 올드 할리우드 글래머 스타일을 재현한다.

60년대로 오면 ‘재키룩’으로 대변되는 우아하면서도 럭셔리한 룩과 트위기의 컬러풀한 모드룩이 차례로 나타난다. 전자를 보여주는 것이 ‘레드 플레어(Red Flare, 62~65)’ ‘벨르 드레스(Belle Dress, 62~63)’ ‘커리어 걸(Career Girl, 63~64)’이라면, 후자는 ‘로라파주사스(Lolapazoozas, 67)’ ‘파자마 퍼(Pajama Pow, 67~68)’ ‘트위스터(Twister, 68)’에서 확인할 수 있다.

70년대는 역시 디스코, 그리고 히피다. ‘와일드 번치(Wild Bunch, 70~71)’는 오렌지와 옐로의 복슬복슬한 인조 모피 코트, 색상은 강렬하지만 디자인은 심플한 민소매 니트 원피스, 오렌지빛 레깅스와 부츠가 포함된 멋진 의상이었다. ‘배기 라이브 액션 피제이(Baggie Live Action PJ, 73)’는 대담한 패턴의 점프수트와 프린지가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폭 넓은 벨트 및 머리띠로 70년대 패션의 특징을 보여준다.

‘라이브 액션(Live Action)’은 디스코 문화 자체를 반영해 원반 위에서 춤추며 노래하는 특별한 시리즈로, 바비의 남자친구 켄이 2대8 가르마를 하고 히피 의상을 입은 모습도 볼 수 있다.

80년대에도 파라 포셋 머리와 제인 폰다의 에어로빅룩, 마돈나와 다이애나비 스타일 등 당대의 패션이 반영된다. 하지만 패셔니스타로서 바비의 위상은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이런 경향은 90년대에 이르러 본격화된다. 12인치 인형 시장이 점점 커지면서 저연령층 대상의 매스마켓 인형과 성인을 노리는 컬렉터 돌(collector doll) 시장이 나눠지게 되었고, 마텔사 매출의 절대 부분을 차지하는 저가 바비 의상은 그야말로 인형 옷이 된 것이다.

하지만 86년 ‘블루 랩소디(Blue Rhapsody)’를 시작으로 판매량은 적을지언정 가격은 높게 책정된 컬렉터 돌이 출시돼 패션에 관심이 많은 성인을 만족시킬 수 있는 수준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플래퍼 드레스와 깃털 장식의 머리띠, 길게 늘어지는 구슬 목걸이의 ‘댄스 틸 돈(Dance till Dawn, 93)은 인형다운 과장된 표현 속에서도 아르데코 패션의 퇴폐적 허무함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90년대 이후 컬렉터 돌 시장이 자리 잡으면서 디자이너 이름을 내걸고 바비가 출시되기 시작했으며 패션 아이콘을 인형으로 만드는 경향도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디자이너 바비는 각각 미국과 프랑스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들이 선택되었다. 크리스찬 디올 바비(95)는 비드와 라인스톤이 아로새겨진 화려한 드레스를 선보였으며, 도나카란 바비(95)는 특유의 검은 터틀넥 스웨터와 사롱 스커트를 입고 있다. 랄프 로렌(96), 빌 블래스(97), 베라 왕(98~99), 지방시(2000) 등 디자이너 바비는 계속 이어졌지만 트렌드를 반영한다기보다 패션사의 기념비를 전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케이트 스페이드(2004), 안나수이(2006), 맥(2007), 주시 쿠튀르(2005·2008) 등 젊은 층에게도 어필하는 대중적 브랜드가 도입됐는데, 특히 베르사체 바비(2004)는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나온 광고와 흡사한 스타일링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트위기(67), 오드리 헵번(98), 엘리자베스 테일러(2000), 셰어(2001·2007) 등 마텔은 셀러브리티(celebrity) 바비를 초기부터 꾸준히 출시했다. 하지만 동시대의 패셔니스타라기보다 역시 패션사적 인물들이었다. 그렇지만 스타일 아이콘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패션을 선도하는 경향이 강해지는 것에 발맞춰 당대의 아이콘으로 트렌디한 패션을 보여주려는 모습이 나타났다. 키모라 리 시몬스 바비(2008)는 이런 경향의 좋은 예로, 흑인과 동양인의 혼혈 혈통을 반영한 외모도 새로운 시대를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바비는 2000년 실크스톤이란 새로운 재질과 50년대의 쿠튀르적 페이스를 결합한 패션모델 시리즈로 다시 전성기를 맞는 듯했다. 하지만 2008년 현재 고가 라인은 인티그리티의 패션 로열티, 저가 라인은 MGA의 브라츠에게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의 야심은 수월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비에 대한 무조건적 공격보다 어느덧 쉰 살이 된 패션돌이 인형만이 줄 수 있는 판타지를 보여주면서도 가장 트렌디한 패션을 반영할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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