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명 교체기의 사람 나관중이 14세기에 지은 『삼국지연의』는 진수의 역사서 『삼국지』에 기록된 시대를 무한한 창조의 영역으로 옮겨 놓은 소설이다. 때는 황건적이 난을 일으키고 천하가 어지러웠던 후한 말,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유비는 의형제 관우와 장비와 더불어 몸을 일으키고, 은거하고 있던 재사 제갈량을 얻어 스스로 황제가 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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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는 본래 후한의 황실을 지키고자 했지만 그 왕조가 멸망했기에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삼국지연의』는 위·촉·오가 천하를 삼분하였던 이 시대를 관통해 위 나라 내부에서 일어난 왕조 진이 천하를 통일하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삼국지연의』는 명대의 모종강 본을 비롯해 숱한 판본들을 낳으며 수백 년이 넘게 확장되고 재창조되고 있다. 물론 『삼국지연의』 이전에도 삼국 시대를 다룬 연극과 소설이 있었다. 그것은 분열과 통일이 반복되었던 중국의 역사에서도 그 시대가 유독 매력적이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무용(武勇)과 전술과 외교술의 대결이 난무하던 시대. 그러나 그것을 다시 생각해 보면,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는 『삼국지』의 유명한 구절처럼, 무용과 전술과 외교술의 대가인 인물들이 가득한 시대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스스로 할 줄 아는 것은 거의 없지만 덕으로 황제의 지위에까지 오른 유비는 오히려 지루한 편이다.
중국 곳곳에 사당 관제묘를 지어 추앙받고 있는 관우, 모차르트를 질투한 살리에리처럼 평생 제갈량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마의, 난폭하고 무식하지만 순정 넘치는 여포, 제갈량에게 일곱 번이나 포로로 잡히며 다채로운 패배의 향연을 펼쳤던 남만왕 맹획. 이처럼 『삼국지』는 수천에 달하는 주연과 조연들이 제각기 소설 한 권에 맞먹을 드라마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다.
그 때문에 과거의 인기와 별개로 현대의 삼국지는 만화나 게임으로 먼저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네이버 지식인에 올라오는 『삼국지』 관련 질문들도 어른들이 보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싶은, “관우를 우리 편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같은 질문들이 있는데, 이는 게임 ‘삼국지 조조전’에서 조조의 입장으로 싸우는 게이머의 간절한 소망이 들어 있는 질문이다.
이처럼 『삼국지』는 인물을 다른 위치에 가져다 두거나 이야기를 새로 쓰는 재미가 있는 것이다. 고우영의 만화 『삼국지』가 24년 만에 무삭제로 복간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이 책을 10권 전집으로 출판한 애니북스의 이정헌 팀장은 “고우영은 소설 『삼국지연의』와는 다른 파격적인 시각과 구성으로 『삼국지』의 재미를 극대화시켰다.
유비의 촉한을 정통으로 삼은 『삼국지연의』와는 다른 독특한 인물 해석이 그렇고, 시대를 앞선 패러디 기법과 상상을 초월하는 발상이 돋보인다.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가 나오기 전에 ‘쪼다 유비’ ‘싸나이 조조’ 등의 표현을 쓴 것은 적어도 만화로서는 고우영의 『삼국지』가 유일하다”고 밝혔다. 고우영의 『삼국지』는 출판사의 기대를 뛰어넘어 지금까지 40만 부가량이 판매됐다.
그럼에도 『삼국지』는 여전히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로 대표되는 소설로서의 매력 또한 잃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삼국지연의』를 연재하고 있는 이문영이나 2004년 『삼국지』를 펴낸 장정일이 강조하는 것은 『삼국지연의』는 정사가 아닌 소설이기에 해석의 여지가 풍부하다는 점이다.
장정일은 “『삼국지』는 새로운 시대의 가치와 감각을 수용하면서 부단히 진화해 왔다. 하므로 있지도 않은 ‘정본’과 ‘정역’ 타령을 하느니, 현대인의 관점과 새로 밝혀진 역사적 고증에 의해 새로운 『삼국지』를 쓰는 일에도 의미가 부여되어야 한다”면서, 자신의 『삼국지』는 “중화주의적 시각을 교정하고자 했고, 『삼국지』에 누락된 고구려를 넣는 등 삼국만의 『삼국지』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삼국지』를 쓰고자 했다”고 말했다.
지금 『삼국지』는 문화적인 상품만이 아니라 처세술 교본으로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다. ‘원 소스 멀티 유즈’ 라고 말한다면 천박할 수도 있겠지만, 진정한 캐릭터와 이야기의 힘을 고민하게 되는 지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전의 힘을 실감하게 한다.
고작 수십 년, 단 한 개의 대륙, 그곳에서 들려온 영웅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 모두를 사로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