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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먼지의 전쟁터로 뛰어들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5호 06면

이름이 운이고 자가 자룡인 상산 출신의 장수 조자룡은 『삼국지』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무장 중 하나였다. 순박하고 정직한 그는 주군을 만나는 데는 운이 없어 공손찬과 원소 휘하를 떠돌며 불운한 세월을 보냈지만, 유비를 섬긴 이후에는 충절과 용맹으로 명성을 얻었다.

조자룡의 영화 ‘삼국지: 용의 부활’

장비처럼 난폭하지 않고 관우보다 친근했기에 서민이 좋아했던 영웅. 거대한 합작 프로젝트 ‘삼국지: 용의 부활’은 제각기 황제가 되어 천하를 다투었던 영웅들 대신 그들 밑에서 창을 들고 싸웠던 조자룡을 주인공으로 택해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화다.

천하가 태평해지면 가정을 꾸리겠다는 꿈을 가지고 유비 군대에 들어온 조자룡(류더화·유덕화)은 같은 고향 사람 나평안(훙진바오·홍금보)과 더불어 언젠가 상산으로 금의환향하자고 다짐한다. 그는 나평안을 형님이라 부르며 극진히 대한다. 그러나 나평안과 걸음을 나란히 하기엔 조자룡의 무용(武勇)이 지나치게 뛰어나다.

조조에게 쫓긴 유비의 군대가 후퇴하는 대열 뒤에서 홀로 유비의 아들을 구해낸 조자룡은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촉 나라 오호(五號) 장군의 한 명이 되어 전쟁에 매진한다. 수십 년이 흐르고 조자룡은 마지막 전투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와 대적할 적군의 대장은 오래전 조자룡이 나라 1만 군대를 물리치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조조의 손녀 조영(매기 큐)이다.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는 유비와 그의 의형제들, 제갈량, 조조와 손권 외에도 매력적인 인물이 가득해 수백 편의 스핀 오프를 생산할 수도 있을 이야기다. 이인항 감독(대니얼 리)은 그들 중에서도 조자룡을 택한 이유를 “조자룡은 단 한번도 패하지 않은 장수였다.

그런 그가 마지막 전투에서의 패배를 눈앞에 두었을 때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고작 한 세대가 교차되는 사이, 중국 대륙이 요동쳤던 그 삼국시대에, 패하지 않은 장수가 있을 리 없었다. 일례로 조자룡은 영화에서처럼 제갈량에게 미끼로 이용되어 대패한 적이 있었고, 흐트러지지 않고 후퇴한 공을 칭송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자룡은 천수를 누리고 침상에서 죽었다.

그러므로 ‘삼국지: 용의 부활’은 거의 온전한 픽션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자룡은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과 우정을 쌓고 역시 가공의 인물과 자웅을 겨루며 역사와는 다른 결말을 향해 질주한다. 그러나 『삼국지』가 가지는, 수백 년 동안 동양의 독자를 흡입했던 매력의 흔적은, ‘삼국지: 용의 부활’에도 어느 정도 남아 있다.

생을 걸고 천하를 다투었으나 손안에는 먼지 한 줌만 남은 듯한 회한, 역사의 흐름에 휩쓸려 사소하지만 소중했던 소망을 잃어버린 서글픔. 『삼국지』는 서민적이고 활달한 『수호전』에 비해 지루하고 고상한 감이 있지만, 왕조의 역사를 다루는 덕에 그처럼 보다 높은 곳에서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한 초연함이 있는 것이다.

『삼국지』는 자주 탄식한다. 위·촉·오가 솥발처럼 천하를 삼분하였던 시대는 한 사람의 일생과 맞먹을 만한 짧은 시간에 불과하였는데, 그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영웅이 나타나고 스러져 가며 명운을 걸곤 했는지. 조자룡의 거의 모든 일생을 담은 ‘삼국지: 용의 부활’도 세월을 빠르게 편집하여 산만하기도 하지만, 본의 아니게 그런 쓸쓸함을 드러내고 있다.

조자룡은 불패의 기록을 간직하라며 출정을 만류하는 제갈량에게 이제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다고 답한다. 그 순간 그의 마음속을 스쳐 가는 영상은 동쪽으로 떠나든 서쪽에 머물든 언제나 함께 있는 거라며, 언젠가 돌아오리라 약속하는 그에게 웃어 보였던 연인의 모습이다. 아마도 그는 그녀에게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천하가 태평해지는 순간이란 그의 생전에 결코 찾아오지 못했으므로.

그러나 ‘삼국지: 용의 부활’은 원작이 그렇듯 무엇보다 먼저 거대한 전쟁터의 먼지로 다가오는 영화다. 조자룡이 썼던 무기가 창이었기에, 그리고 잠깐 등장하는 관우와 장비의 무기가 청룡언월도와 장팔사모였기에 검으로 베는 무술이 주를 이루는 무협영화와 다르다. 찌르고 뽑아내며 치고 던지는, 투박하고 남성적인 기운이 충만하다.

또한 ‘삼국지: 용의 부활’은 말을 타야만 하는 영화고 백병전의 처참함이 존재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전투의 전형은 장수들이 일대일로 겨루어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고 이어 군대가 맞붙는 식이다. 그러고 나면 말을 타고 달리는 장수들은 군인이 본업이 아니었을 보병들을 낙엽처럼 베어냈다. 먼지와 피로 이루어진 전쟁터, 그 전쟁터에서 새로운 물길을 찾곤 했던 역사.

이인항 감독은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인 느낌이 나도록 찍고 싶었다고 말했고, 컴퓨터 그래픽으로 매만져 비현실적으로 색이 바랜 전쟁터는 그래서 오히려 사실처럼 다가온다. 피가 물안개처럼 어리었을 전쟁터의 느낌인 것이다.

상산 조자룡은 이렇게 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얻었다. 두건으로 머리를 동여맨 순박한 청년이 되었고, 고향으로 돌아와 아내와 더불어 평생을 보내고 싶었던 정인이 되었고, 단 한 번 패전으로 불패의 기록이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성실하고 우직한 장수가 되었다.

그러므로 ‘삼국지: 용의 부활’을 보고 나면 또 다른 영화들을 꿈꾸게 된다. 어리석은 군주를 만나 비통하게 패배해야만 했던 강유라면 어떨까, 혹은 제갈량을 질시하여 스스로 무덤을 파고 말았던 요절한 천재 방통이라면 어떨까. 『삼국지』의 숱한 외전을 기대하게 된다.

영화 ‘적벽대전’
서기 208년에 벌어진 적벽대전은 『삼국지』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 중 하나다. 황실의 후예라는 허명만 있을 뿐 빈손이나 다름없었던 유비는 이 전투를 치른 뒤 형주에 자리 잡고 천하를 삼분하는 미래를 도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인 의미만이 전부는 아니다.

정교한 외교술, 젊고 패기 넘치는 주요 인물들, 조조의 백만 대군을 불길 안에 가둔 장관이 마음을 뒤흔드는 것이다. 이 엄청난 규모의 전쟁을 영화로 옮기고 있는 이는 우위썬(吳宇森) 감독. 그는 양쯔강 남쪽 붉은 절벽의 대전을 제작비 7500만 달러, 상영시간 4시간에 달하는 대작으로 옮기고 있다.

중국 정부도 주목하고 있는 ‘적벽대전’은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 오 나라 장수 주유로 캐스팅됐던 저우룬파(周潤發)가 촬영을 시작하는 날 영화에서 빠졌고, 량차오웨이(梁朝偉)도 의사를 번복하던 끝에 제갈량에서 주유로 배역을 바꾸어 참여했다. 그 밖에 진청우(金城武)가 제갈량으로, 장전(張震)이 손권으로 캐스팅됐다.

우위썬은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가 아닌 역사서 『삼국지』를 주로 참조하겠다고 밝힌 적이 있다.『삼국지연의』에선 간웅으로 폄하됐던 조조가 다른 인물로 그려질 거라는 소문이다. 두 편으로 나뉘어 개봉하는 ‘적벽대전’은 올여름 그 첫 번째 이야기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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