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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피맛골 ‘맛 골목’ 사라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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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교보생명빌딩 동쪽으로 나 있는 피맛골(청진3구역·사진上). 인접한 청진2구역을 묶어 여기에 24층 건물을 짓는 도시환경 정비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길의 흔적은 남더라도 피맛골의 정취는 사라지게 된다. 지난해 7월 준공된 르메이에르종로타운(사진下). 피맛길을 회랑 형태로 남겨 놓았지만, 대리석 바닥과 통유리 때문에 이전의 정취는 없어졌다. [사진=김상선 기자]

피맛골은 서울 종로 1~6가에 걸쳐 종로에서 18m 북쪽으로 나 있는 폭 2~3m 정도의 골목길을 일컫는 말이다. 조선시대 ‘서민들이 (고관대작이 타고 다니는) 말을 피하기 위한 길’(避馬路)에서 유래했다. 길 좌우를 포함한 주변 일대를 통칭하는 게 피맛골이며, 길만 지칭한 것이 피맛길이다. 조선시대 서울의 동서 축 중심도로였던 종로와 함께 형성돼 600년 풍상을 겪어왔다. 최근 들어 피맛골 일대에 대규모 재개발 사업이 진행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사라지는 피맛골=지난달 모 부동산개발회사는 서울시에 “청진동 청진구역 12~16지구를 묶어 통합 개발하겠다”며 사전 자문을 요청했다. 청진동 해장국 골목과 피맛길이 포함된 4107㎡ 넓이에 24층 높이의 쌍둥이 건물 2개를 짓겠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에는 70년 역사의 ‘청진옥’을 포함한 ‘해장국 골목’과 역시 70년 된 식당인 ‘한일관’, 그리고 피맛길이 포함돼 있다.

서울시는 지난달 27일 도시건축공동위원회를 열고 이 사안을 심의했으나 자문을 보류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위원은 “역사 깊은 피맛골과 서울의 명소로 자리잡은 해장국 골목이 사라지게 될 개발 계획이어서, 위원 대부분이 결정하기 곤혹스러워했다”고 전했다. 사전 자문을 요청한 사업자에게 서울시가 특별한 지적 사항을 제시하지 않으면 ‘관련 법규 내에서 알아서 개발해도 좋다’는 응답이 된다.

개발 사업이 진척되면서 한일관은 5월까지, 청진옥은 7월까지만 영업을 하고 이전하기로 했다. 35년 역사의 ‘서울호텔’은 지난해 연말 문을 닫았으며 현재 건물에는 ‘철거 예정’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서울시가 피맛길 보존을 위해 2004년 12월 ‘건축 유도 지침’을 만들었으나, 실효가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침은 ‘피맛길 일대를 개발할 경우 최소 4m 폭으로 피맛길을 남겨 놓고, 도로 위는 채광·환기가 가능토록 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상 물리적 형태의 ‘길’만 남겨 놓으면 되는 것이다. 지난해 7월 말 피맛길에 지어진 르메이에르 종로타워의 경우 서울시 지침을 반영해 피맛길을 회랑 형태로 남겨 놓기는 했다. 하지만 대리석 바닥이 깔리고 길 양편이 통유리에 둘러싸이면서 옛길다운 정취는 사라졌다. 서울시 관계자는 “피맛길 보존 지침을 너무 늦게 만들었다”며 “게다가 내용이 너무 포괄적이고, 법적 근거가 빈약해 구속력을 발휘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청진동 주변의 피맛골에서도 속속 재개발 사업이 예정돼 있다. 교보생명빌딩 동쪽의 청진 2, 3지구는 민간 개발업자가 두 구역을 묶어 24층짜리 건물을 짓겠다며 1월 구역변경을 신청해 놓은 상태다. 인사동 쪽의 공평 15, 16지구도 이미 건축심의를 통과해 사업시행인가 신청을 남겨 놓고 있다. 지침이 나오기 전에 지어졌던 YMCA·삼성증권·SC제일은행 건물은 피맛길 위에 지어지면서 피맛길을 끊어 놓았다.


◇피맛골, 해장국 골목의 원조=조선시대에는 하위직 관리들도 피맛길을 애용했다. 그들은 말을 타고 가다 종로에서 고위직 관리를 만나면 말에서 내려 땅바닥에 엎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서민들의 보행 공간이다 보니 이들을 손님으로 하는 목로주점이나 국밥집이 많았다. 이곳의 술국이 인기를 얻으면서 피맛길 밖인 현재의 청진동 일대로 ‘해장국 골목’이 확대됐다.

종로4가에서 종로6가 피맛길은 아래쪽에 있다 해서 ‘아래 피맛골’로 불렸다. 이곳에는 몰락한 양반들이 먹고살기 위해 술집을 열기도 했다. 양반 체통이라고 주인 아낙이 손님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는 탓에 ‘내외집’으로 통했다.

피맛골엔 현재도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서민이 즐겨 찾는 선술집이 제법 남아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골목 안에 진동하는 빈대떡 냄새가 술꾼과 시인묵객을 불러들인다.

성시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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