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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철학자 7명 릴레이 인터뷰 ⑧·끝 김재권 미 브라운대 석좌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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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대담 = 김기현 서울대 교수

철학자 김재권(74·미 브라운대 석좌교수)씨는 현대 심리철학계의 거장이다. 서울대 불문과에 재학 중이던 1950년대 중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그는 전공을 철학으로 바꾼 이래 심리철학 분야에서 주목할만한 이론을 계속 제시해 왔다.

심리철학은 영국과 미국을 주 무대로 발전해온 분석철학의 한 분야다. 주로 마음과 신체의 관계를 천착한다. 자연의 인과관계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마음의 위치는 어디인가, 마음은 신체와 독립하여 존재할 수 있는가 등을 연구한다. 서양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도 이 같은 심신 문제를 탐구, 마음과 신체는 다르다는 심신이원론을 제기한 바 있다.

현대 심리철학은 20세기 후반 인지과학과 뇌과학의 성과를 반영하며 마음의 본성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제기했다. 과학의 손이 닿지 않는 최후의 신비 영역으로 간주되던 인간의 마음을 과학적으로 분해해 보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김재권 교수가 있다.

김 교수는 정신현상을 물리현상에 귀속시키는, 이른바 ‘물리주의’(physicalism)를 강력히 옹호한다. 데카르트와 달리 심신일원론을 내세운다. 인간의 마음에 특별히 우월한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마음 또한 자연현상의 일부로 파악하면서, 정신적 사건의 대부분을 뇌의 사건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본다. 서울대 김기현 교수가 그를 만났다.

김기현=인간의 마음은 동서양을 떠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상가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철학자뿐 아니라 종교인의 화두이기도 하다. 마음을 물질에 귀속시키는 당신의 물리주의는 서양의 전통사상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전통사유에서 볼 때 쉽게 수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김재권=마음처럼 신비스럽게 여겨지는 것도 없다. 우주는 물질이 격렬히 부딪치고 움직이는 어둡고 황량한 공간이고, 그 드넓은 공간의 아주 미세한 일부인 이 지구에 마음이 거주하고 있다. 이 드넓은 공간의 일부에 어떻게 이런 정신현상이 발생하게 됐는지는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이 초자연적 존재나 초월적 힘에 의존하여 이를 설명하려 하지만, 이것은 한 수수께끼의 자리에 다른 수수께끼를 들여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은 자연현상이며 자연현상은 시공간계의 법칙과 사건, 그리고 인과관계 같은 것을 통해 자연계 내에서 설명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명현상 또한 신비로운 것이지만, 다윈의 진화론과 최근 분자유전학의 폭발적 발전을 통해 과학적으로 해명되고 있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심리학·신경과학·인공지능·언어학 등으로 이뤄진 인지과학을 통해 마음의 여러 측면이 연구되고 있고, 이를 통해 인간의 정보처리·언어처리 능력에 대한 이해가 커지면서, 그 기반이 되는 신경생물학적인 기제도 밝혀지고 있다.

김기현=마음현상이 신경생물학적 현상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과연 모든 정신현상이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보는가.

김재권=내가 최근에 낸 책 『물리주의, 또는 그에 충분히 가까운 것』에서도 주장했듯, 나는 여전히 정신적 사건의 대부분이 뇌의 사건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는다. 다만 한가지 예외사항을 인정한다. 그것은 감각, 또는 의식의 영역이다. 우리는 커피 향을 맡을 때 그것이 무엇인가를 판단하여 인지할 뿐 아니라, 그와 동반하는 감각도 함께 느낀다. 이런 감각 또는 느낌의 영역은 인지 영역과 달리 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신현상의 다른 부분인 인지적 상태는 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과, 포괄적인 세계관으로서의 물리주의를 대체할 만한 대안적 세계관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김기현=인간은 우월한 정신세계를 갖춘 만물의 영장으로 간주되곤 한다. 인간의 마음과 동물의 마음의 차이에 대한 생각은.

김재권=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합리적·논리적 추론을 할 수 있으며, 예술품을 만들고 윤리적 규범을 구성하는 등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마음과 다른 동물의 마음 사이의 차이는 정도의 문제일 뿐, 이들 사이에 질적으로 구분되는 명확한 선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김기현=인간이 진화의 정도에서 다를 뿐, 정신적 차원에서 다른 동물에 비하여 근본적으로 우월한 존재는 아니라는 뜻인가.

김재권=그렇다. 인간의 마음이 우월하다는 생각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정신적·지성적 능력을 사용해 다리를 짓고 도시를 건설하고, 문명의 이기와 예술품을 만들었지만, 그 ‘우월한 마음’이 전쟁·학살·잔혹 행위를 일삼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인간의 마음과 지능이 세계를 위해 좋은 것인지 아닌지, 축복인지 저주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인간은 자연계의 일부이며, 우리의 능력은 이 세계 다른 동물과의 능력과 연속선 상에 있다고 믿는다.

김기현=인간만이 언어를 구사할 능력이 있으며,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합리적 사고를 할 수 없으므로, 인간만이 사고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김재권=동물의 언어와 의사소통에 대한 많은 과학적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연구결과를 지켜봐야 한다. 인간과 동물의 마음 사이에 언어능력에 있어 뚜렷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정도의 차이일 수 있다. 또 인간 수준으로 언어를 구사하는 동물이 진화하지 못한 것은 단지 역사상의 우연일지 모른다. 이러한 입장은 철학적으로 가능한 입장임에도 아직 명백히 논의된 바가 없다. 이런 가능성이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언어를 통해 인간의 마음의 고유성을 주장하는 입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김기현=영국의 논리학자 튜링은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컴퓨터 공학이 발전하고 인간을 모델로 하는 사이보그에 관한 영화가 나오면서 이 질문은 철학자뿐 아니라 일반인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생각하는 기계를 우리가 만들 수 있을까.

김재권=기계라는 말은 우리가 현재 또는 미래의 기술을 사용해 만들어내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만약 이런 의미라면, 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기술이 마치 우리처럼 생각하고 대화하는 로봇을 만드는 단계까지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 의하여 만들어진다’는 단서를 빼면, 이 질문은 그 의미가 불분명해진다. 인간은 세포·분자·원자 등으로 만들어진 물질적 존재다. 나라는 존재도 세포 단위로 해체됐다가 재조합될 수 있다. 초인간적 기술자는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초인간적 존재에게 나는 결국 하나의 기계에 불과하다. 물론 나는 생물학적으로 번식된 존재이므로 엄밀한 의미의 기계는 아니다. 그러나 번식되지 않고 공장에서 생산됐을 경우에도 나는 여전히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떤 천재에 의하여 만들어진 생각하고 느끼는 기계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전능한 신에 의하여 지어진 기계일지도 모른다.

정리=배영대 기자

◇도움되는 책 =『심리철학』(김재권 지음, 하종호·김선희 옮김, 철학과 현실사), 『물질과 마음』(처칠랜드 지음, 석봉래 옮김, 서광사), 『심리철학과 인지과학』(김영정 지음, 철학과 현실사), 『물리주의』(김재권 지음, 하종호 옮김, 아카넷)

◇김재권 =1934년 대구 출생. 서울대 불문과 2학년 재학 중이던 1955년 한미장학위원회 장학생으로 선발돼 미국 다트머스대로 유학을 떠나 철학을 전공. 프린스턴대에서 철학박사학위. 미시건대에서 오랫동안 철학교수로 재직했고, 미국철학회 중부지역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심리철학』『수반과 마음』『물리계 내에서의 마음』『물리주의, 또는 그에 충분히 가까운 것』 등이 있다.

◇김기현 =1959년생. 미국 애리조나대에서 박사학위. 서울대 철학과 교수. 2008 세계철학대회 한국조직위원회 사무총장. 저서로 『현대인식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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