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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한국현대사>16.朴憲永의 월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1946년 9월7일 미군정은 조선공산당 당수인 박헌영 체포령을 내렸다.박헌영은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 남쪽에서 활동하느냐,아니면 소련군이 진주하고 있는 북쪽으로 갈 것이냐의 갈림길에 서게 됐다.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10월6일 박헌영은 경찰의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38선을 넘었다.그의 월북과 관련해서 당시 검찰청장이었던 이인(李仁.前법무장관)은 67년 미군정이 박헌영을 체포하는데 소극적이었다고 증언한 적이 있다.
그가 좌익용의자 80여명의 검거를 주장하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중장은 『다른 사람은 좋으나 박헌영은 잠깐 자기에게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한후 4,5일이 경과하여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는 것이다.이인은 하지가 박헌영을 일부러 놓아준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증언을 뒷받침해주는 자료가 발견됐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돼 있는 「한미공동소요대책위원회 13차 회의 보고서」에 기록된 「장택상(張澤相)의 진술」이 그것이다(『Park's Warrant』Box.77.RG.332).
1946년 11월12일 당시 수도경찰청장이던 장택상은 한미공동소요대책위원회 13차 회의에서 박헌영을 체포하는데 실패한 것과 관련,경찰의 책임을 추궁당하자 뜻밖의 말을 털어놓았다.
『박헌영 체포명령을 받지 못했지만 얼마후 CIC의 니스트대령으로부터 朴을 찾으라는 명령을 받았다.그러나 하지로부터 니스트대령이 하는 일에 결코 관여치 말라는 명령이 있었다.
朴체포명령이 내려왔을 때 하지는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이것은 하지중장이 박헌영 체포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실제로 체포할 의사는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다.
하지는 왜 박헌영을 체포하는데 소극적이었을까.
53년 3월 북한은 박헌영을 「정권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행위」로 체포한후 그가 46년 9월5일 하지로부터 「북조선정권을 틀어쥐기 위한 활동을 하라」는 지령을 받고 월북했다고 뒤집어 씌웠다.
그러나 미군정이 조선공산당의 다른 간부들과 달리 박헌영만은 체포하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소련과의 관계를 의식했기 때문이었다.46년 5월에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아무 성과없이 결렬되었지만 당시 미소간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냉전에 돌입 한 시기는 아니었다.
따라서 미군정측으로서는 조선공산당의 당수인 박헌영을 체포했을때 소련측으로부터 제기될 항의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소련을 의식한 미군정의 정치적 고려가 박헌영의 탈출을 도운 한 요인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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