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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네 탓”…그거 病입니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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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 24면

국보 1호 숭례문을 방화한 혐의로 구속된 채종기(왼쪽)씨는 현장검증에서도 세상을 저주하고 자신이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사진공동취재단]

“노홍철이 아버지를 괴롭혀서 때렸다.”

“사회적 약자여서 벌금을 내게 돼 남대문에 불을 질렀다.”

자신과 아무 관계가 없는 연예인을 마구 때린 20대 청년과 600년 서울을 지켜온 국보 1호 숭례문을 잿더미로 만든 70세 노인에겐 공통점이 있다. 마음의 둥지에 피해의식이 꿈틀대고 있다는 점이다. 20대 청년은 피해의식이 망상(妄想)이라는 병으로 나타났고, 숭례문 방화범은 그렇지 않다는 점만 다르다.

방화범은 현장검증을 하면서도 세상을 저주하고 자신이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자신의 일이 잘못되면 조상 탓, 사회 탓을 하는 사람이 주위에 넘쳐난다. ‘한국은 피해망상 사회’라는 말들도 한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끼리 피해의식을 공유하기도 한다. 인터넷에 방화범이 억울하다는 댓글이 넘쳐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서울대 의대 정신과 권준수 교수는 “우리 사회에는 자신의 불만을 사회나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지나치게 많다”며 “피해의식은 마음의 짐을 더는 도피기제이지만 지나치면 병”이라고 경고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본성

피해의식은 인간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본성 중 하나다.

양창순 신경정신과 원장은 “자신의 고통과 불행을 모두 안고 산다면 가슴이 터져 살 수 없을 것”이라며 “피해의식은 무의식의 열등한 부분이 외부로 투사(投射)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찬가지 이유로 실제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며 피해의식에 젖는 ‘피해망상(被害妄想)’도 자기 보호가 원인이다. 좌절이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가상 상황’을 설정하고 그 쪽으로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책임회피와 보상심리가 지나치면 자신의 인격을 비틀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방해가 된다.

또 피해망상이 늘 머리를 떠나지 않는 환자는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 타인을 폭행·살인하거나 자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편집성 인격장애’일 때 많아

이 같은 피해의식은 어릴 적의 좌절이나 상처가 무의식에 박혀 있어 증폭된다.

대체로 고집이 세고 남을 잘 의심하며 불안에 잘 젖는 ‘편집성 인격장애’인 사람은 피해의식이 강하다. 이 경우에는 없는 일을 지어내 생각하기도 하지만 헛생각이 생겼다가 금세 없어지고 망상이 계속되지는 않는다. 숭례문 방화범은 이 경우에 해당할 수 있다.

또 억울한 일을 당한 뒤 누군가 날 괴롭히거나 감시한다는 생각 때문에 공포나 불안감이 계속돼 생활이 불편하다면 ‘신경증적 망상’일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에는 보통 ‘아닐 거야’ 하고 되뇌면서도 괴로워하는 것이 특징이다.

노홍철 폭행범처럼 망상을 사실이라고 믿으면 망상장애 또는 정신분열병일 가능성이 크다.

피해망상 장애인 사람은 최소 한 달 이상 실제 일어나지 않은 도청·독살·감염 등 때문에 괴로워한다. 누군가 자신을 사랑하거나 연인 또는 배우자가 부정(不貞)을 저지르는 망상에 시달리기도 한다. 망상장애자는 겉보기에는 멀쩡하고 단정하기 때문에 인격이 허물어진 정신분열병 환자와는 구분된다. 정상인과 구분이 쉽지 않지만 대화를 하면서 곰곰이 살펴보면 의심이 많고 시비를 잘 가리려 하는 특징이 나타난다. 망상장애자는 대부분 평소 우울감을 느끼며 정신분열병 환자에게 나타나는 환각이나 환상은 거의 없다.

피해 망상의 종류도 다르다. 망상장애자가 “경찰이 따라다닌다” “상사가 의도적으로 괴롭힌다” 등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는 생각을 한다면 정신분열병 환자는 “미확인비행물체(UFO)가 감시한다” “정부에서 뇌의 정보를 자꾸 빼간다” 등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상상을 한다.
 
대화나 명상 통해 자신감 찾아야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려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정도가 가볍다면 자신감을 찾는 것만으로도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신감은 가족이나 동료와 자주 대화하거나 취미생활·명상 등을 하면서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망상의 정도가 심하면 병원 치료가 필요하다.

신경증적 망상장애자는 자신이 괴롭기 때문에 병원 치료에 큰 거부감을 갖지 않지만 편집증적 성격장애, 망상장애, 정신분열병 환자는 병원에 가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특히 망상장애 환자는 병인지 아닌지가 헷갈리지만 분명 병이다. 미국에서는 경찰·가족·고용주 등에 이끌려 병원으로 간다.

환자는 뇌신경전달 물질의 분비를 조절하는 약을 복용하며 의사와의 상담을 통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훈련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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