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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원의 종이를 넘어, 3차원의 예술을 향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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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 04면

우리는 책을 만드는 ‘아티스트’
서교동에 있는 ‘북아티스트 그룹 수작’의 스튜디오에는 “We are doing artists’ books”라고 적혀 있다. 북아트와 아트북, 아티스트북이라는 용어가 혼재된 지금 자신들은 ‘아티스트북’을 만들고 있는 거라고 그들은 말한다. 작가가 직접 디자인하고 제본하여 주문 제작으로 만든 다이어리나 노트와도 다르고, 정교한 일러스트레이션으로 텍스트를 재해석한 그림책과도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티스트북이 ‘아트’를 다루는 책도 아니고 예쁜 책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 차이점은 스튜디오에 있는 몇몇 작품들에서 드러난다. 박경원씨의 ‘가족앨범’은 옛날 민가를 연상하게 하는 문고리가 달린 나무 문을 표지로 달고 두꺼운 한지를 찢어 만든 듯한 창호지에 오래된 가족사진과 가족에 관한 단상을 채워 넣은 작품이다. 금세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그 작품을 조심스럽게 건드리자 작가는 “그런 느낌을 의도한 것일 뿐 원래는 튼튼하다”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작품을 보여주었다.

작가의 꼬마 시절 사진, 흑백의 단색마저 퇴색한 부모의 사진, 타이프라이터로 찍어낸 듯한 글씨체. ‘가족앨범’은 한 사람이 쌓아온 추억과 상념을 조그마한 책 한 권으로 응축하여 담고 있다. 그 세월과 마음은 다른 작가가 만든 이야기에 기대지 않은, 온전한 작가만의 것이다.

 ‘London Wall’이라는 작품에 런던 여행의 기억을 일기처럼 담은 김혜미씨는 “아티스트북의 가치는 다른 모든 예술품의 가치에 더해 직접 만지고 넘기며 느낄 수 있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가 예로 든 작가는 문자 그림으로 유명한 ‘욕망’ ‘마운틴’의 에드 루샤. 김씨는 에드 루샤의 사진첩 형태 아티스트북을 예로 들면서 “그는 2000부의 책을 찍으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직접 손으로 만지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면서 아티스트북만이 가지는 장점을 강조했다.

 화가가 액자에 그림을 넣듯, 북아티스트들은 책 안에 예술을 담는다. 그 때문에 작가들 중에는 판화나 사진을 전공한 이들이 많다. 대량생산까지는 아니어도 판화나 실크스크린, 사진은 수십 부 내지 수백 부의 에디션 발매가 가능한 기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한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프린터가 발달한 요즘에는 원본을 스캔하여 얼마든지 찍어낼 수도 있다. 다만 선택은 작가의 몫이다.

단 한 개의 작품만 존재할 수도 있고, 수십 개의 작품이 존재할 수도 있다. 본래 디자인을 전공했고 현재도 병행 중인 임현춘씨는 클레이 인형을 사진으로 찍고 그 옆에 예쁜 동화의 텍스트를 덧붙인 자신의 작품을 손바닥에 들어갈 만큼 작은 책으로 만들었는데 “전 국민이 한 부씩 소장할 때까지 뿌리는 것이 목표다(웃음)”라고 말했다.

 책의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하기에 아티스트북은 그저 책이 아닌, 조그만 설치미술처럼 보일 때도 많다. 한 페이지를 넘겼을 뿐인데 웃는 얼굴이 왠지 슬픈 ‘Dreaming Girl’(서효정 작가)의 이미지가 첩첩이 쏟아져 내리고, 앤디 맥개리의 뉴욕 여행기'New York'에선 단 한마디 문장이 그림과 어우러지며 이방인의 기묘한 처지를 메아리처럼 증폭시켜 전달한다.

그것을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핑크’라는 주제로 일러스트를 그려 한 장 한 장 쌓아가고 있는 김원영씨는 제본을 그 언젠가로 미루고 있는 자신의 일러스트 모음도 일종의 책이라고 말한다. 완성되지 않은, 그럼에도 한 가지 주제로 모이는 자신의 마음을 담고 있는. 같은 장소를 같은 시간에 찍어 십 년 넘게 쌓아온 영화 ‘스모크’의 담배가게 주인 사진첩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책장을 넘기면, 미술관이 그곳에
그렇더라도 대량 생산과 복제의 시대인 현대에, 출판된 형태의 북아트를 ‘아트’의 영역에서 내치는 것이 옳은 일만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랜덤 하우스처럼 거대한 출판사를 통해 출판된 책이라 하더라도 페이지마다 하나의 미술 작품처럼 창작된 드로잉과 팝업이 깃들어 있는 경우가 있다. 'Postal Seance'(Henrik Drescher 지음, Chronicle Books 펴냄)는 엽서와 봉투의 형태를 결합한 책이다.

봉함엽서 같은 표지를 넘기면 현대회화나 다름없는 그림이 나오고 그 옆 페이지엔 봉투가 있는데, 그 봉투를 펼치면 앞 장의 그림을 변형한 또 한 장의 그림이 펼쳐진다.'All Mixed-Up!'(Julia Gukova 지음, Northsouth 펴냄)은 깃털 하나 비늘 하나를 살아날 것처럼 생생하게 그린 정교한 일러스트를 세 조각으로 나누었다. 비글의 머리 부분만 넘기면 비글의 몸통에 앵무새 머리가 붙고, 다시 다리 부분을 넘기면 앵무새 머리에 비글의 몸통과 타조의 다리를 가진 기묘한 동물이 나오는 식이다. 그 자체로 예술에 가까운 일러스트지만, 그 일러스트가 다시 독자의 상상으로 재창조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책을 사랑하는 매니어 정은지씨는 자신이 생각하는 북아트를 이런 말로 표현했다. “Please Touch the Art.” 그렇다면 수천 부가 발매되어 세계로 퍼져나갔다고 하여 그 가치를 폄하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누구나 만질 수 있고, 누구나 사랑할 수 있어, 세월과 함께 낡아가는 예술.

먼지와 더불어 변해가는 책냄새처럼, 눈길과 애정으로 변해가는 예술. 그러하기에 거의 모든 디자인 분야를 망라하여 ‘현대 디자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엄 모리스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예술이 낳은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름다운 건축이라고 답하리라. 그 다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름다운 책이라고 말하리라.” 그러한 예술품으로서의 책이 지금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우리의 책장 안에 있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 우리 눈앞에 미술관이 펼쳐질 것이다.

아트페어·인터넷으로 소장하는 북아트
한국에서 아티스트가 작업한 책을 구입하기는 쉽지 않다. 뉴욕의 ‘프린티드 매터’와 런던의 ‘북아트 북숍’ 같은 전문서점이 없고, 갤러리에서도 북아트 작품은 거의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2007년 4회째를 치른 북아트페어 ‘서울국제북아트전’은 보기 드물게 많은 북아트 작품을 한번에 감상하고 구입도 할 수 있는 자리다. 외국의 유명 아티스트뿐 아니라 국내 작가들의 작품도 접할 수 있다. 올해는 5월 14일부터 18일까지 열릴 예정. 이런 대규모 전시를 놓쳤다면 개별 전시회를 찾을 수밖에 없다. 4월에 삼원페이퍼갤러리에서 열릴 예정인 북아트 전시회를 비롯해 국내에서도 이따금 북아트 전시를 만날 수 있다.

출판사를 통해 대량생산되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북아트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인터넷 서점 웬디북(www.wendybook.com)은 예술에 가까운 아름다운 책들을 만날 수 있는 사이트다. 팝업북이 인기를 얻으면서 매니어 사이에서 제법 알려지기 시작한 웬디북은 원래 조그마한 커뮤니티에 가까웠다. 김지수 대표가 “배송비를 아끼기 위해” 자신의 홈페이지를 찾는 지인들과 공동구매를 진행하면서 아예 서점을 만들어 보자고 생각해 시작한 사이트가 지금의 웬디북으로 커졌다.

‘팝업북 컬렉션’ ‘프렌치북 컬렉션’ ‘칼데콧 상(미국에서 그해 가장 뛰어난 그림책에 수여하는 상) 수상작’ 등의 카테고리가 있어 취향에 맞는 책을 찾아볼 수 있다. 약간의 흠이 있거나 재고로 남은 책을 공략하면 가끔 아주 싼값으로 아름다운 책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내 손으로 만드는 나만의 북아트
‘북아티스트 그룹 수작’이 운영하는 ‘수작 아카데미 워크숍’은 여러 가지 기법을 배울 수 있는 북아트 강좌다. 수작에 속해 있는 작가들은 서로 전공이 다르고, 그 전공을 살려 강좌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3년 전에 시작된 이 워크숍은 책을 제본하는 기법이어서 북아트의 기본이 되는 북바인딩뿐만 아니라 판화와 콜라주, 포토몽타주, 실크스크린, 스텐실, 수제 종이 제작 등을 가르친다.

워크숍을 맡고 있는 서효정 작가는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이 반이지만 나머지는 주부와 어린이 북아트를 하는 사람, 교사도 있다”고 말했다. “시간 여유가 있어서라기보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설렘’을 즐기고자 하는 이들이 강좌를 듣는 것 같다”고. 매주 일요일 일일 특강이 있고, 북바인딩과 크리에이티브 북 메이킹 과정은 두 달에 한 번 홀수 달에 개강한다. 자세한 강좌 내용과 개강 날짜는 홈페이지(www.thesujak.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유명한 북아티스트 키스 스미스의 저서 『키스 스미스의 북아트』를 번역한 김나래 작가도 북아트 워크숍을 열고 있다. 신청과 강좌 내용 확인은 북프레스 홈페이지(www.bookarts.pe.kr의 ‘북프레스’ 카테고리 클릭)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1998년부터 강좌를 진행해 온 북프레스는 북바인딩을 거쳐 팝업북 만들기를 비롯한 중급 과정과 책을 복원할 수 있는 고급 과정까지 다양한 강좌를 운영해 왔다.

종이접기를 비롯해 어린이 북아트 지도 과정에 필요한 과목이 들어있기 때문에 어린이 북아트 자격증을 따는 데도 실용적인 워크숍이다. 어린이들에게 창의력과 상상력을 발휘해 책 한 권을 만들도록 지도하는 어린이 북아트는 요즈음 학부모와 취업 준비생에게 관심을 받고 있는 분야다. ‘즐거운 책 만들기 교실(www.kidsbookart.com)’은 어린이 북아트 지도과정뿐만 아니라 어린이 북아트도 배울 수 있는 강좌다. 설치미술에 가까운 창조력으로 만든 아이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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