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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상징’ 릴레이 인터뷰(1)] “샌드위치 위기론? 지독하게 붙으면 日 따라잡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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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내가 대선배여서 李 당선자가 어려워했는데, 이제 거꾸로 될지 모르죠.”
■ 이병철 회장 “견실한 재무구조 인정”… 이후 의기투합했다
■ 정주영 회장, 포스코 둘러본 후 자신감 얻어 조선소 기공식 나서
■ 김우중 회장, 넘치는 아이디어 관철하지 못해 곤경에 처해
■ 3선 개헌 지지 서명 거절… 박 대통령 “그 친구 제철소 일이나 잘하게 해”

박태준은…
1927년 9월29일 경남 양산 출생
1947년 일본 와세다대 기계공학과 2년 중퇴
1948년 육군사관학교 6기 임관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비서실장
1963년 육군 소장 예편
1964년 대한중석 사장
1968년 포항종합제철 사장
1976년 제철학원 이사장
1981년 포항종합제철 회장
1981년~ 11·13·14·15대 의원
1990년 민정당 대표, 민자당 최고위원
1992년 포항종합제철 명예회장
1997년 자민련 총재
2000년 32대 국무총리
2001년 포스코 명예회장

<월간중앙> ‘한국의 상징’ 서베이에서 경제인 3위에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선정됐다. 생존자 중에서는 1위다. <월간중앙>은 이번 호에 박태준과 박세리(스포츠인 1위), 이어 다음호에는 박경리(문화예술인 생존자 1위)·박원순(운동가 생존자 1위) 등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할 예정이다.


오피니언리더 100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월간중앙> ‘한국의 상징’ 서베이에서 한국 경제계의 두 거두인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다음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그는 오늘의 포스코를 일으켜 세운 주역이자 격변기 대한민국 정치·경제사의 산 증인이다.

지난 1월12일 오후 일본 규슈(九州)의 피한지 가고시마(鹿兒島)에 머무르고 있는 박태준 회장을 찾았다. 팔순 원로의 눈빛은 여전히 형형했다. 한국 경제계의 살아 있는 상징에게 한국 경제의 길을 물었다.

- 현존하는 경제계 인사 중 가장 많은 분들로부터 한국을 상징하는 경제인으로 지목받았습니다. 어떤 면모가 평가받았다고 자평하십니까?
“새로운 일을 한 것, 어찌 보면 무에서 출발한 국가기간산업을 세계 일류 기업으로 키웠다는 것을 알아주신 모양이죠. 그 과정에서 사심 없이 국가에 헌신해 ‘제철보국’을 실현한 것이 평가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비판받을 일은 평생 하지 않았습니다.”

경제 하는 국민적 분위기 잡아야

- 한국을 상징하는 경제인으로서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고질적 문제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해법은 무엇일까요?
“작금의 한국경제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경제 하는 분위기가 잡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에서 평범한 시민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국민이 국가경제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고 협력하는 마음자세가 돼 있지 않아요. 대선 이후 조금 달라지는 기미가 보이는 것이 그나마 다행입니다.

사실 그 동안 경제 하는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정치제일주의가 팽배하면서 경제를 잘해보려는 노력도, 지도력도 실종된 상태였죠. 정치적 이전투구와 극한대결, 사회적으로 집단적 억지와 이기주의가 만연해 있으니 경제의 활력이 떨어지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죠. 다른 것 없습니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마음을 다잡아야 합니다.

지도자는 솔선수범하고, 국민과 노조는 협력하고, 기업은 분발하는 거예요. 그럴 때 비로소 ‘다시 한 번 해보자’는 공감대가 우리 사회에 형성됩니다. 물론 경제가 전부는 아니에요. 그러나 경제가 외교·국방·정치·남북관계·문화 등 국가경영의 토대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한국경제의 활로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 경제가 성장동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보시나요?
“국민적으로 경제 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그래야 활력을 되찾을 수 있어요. 기본적으로 5% 성장은 해야 하는데, 지도자가 잘하고 그에 따라 사회 분위기가 한번 잘해보자는 쪽으로 조성되면 여기에 1~ 2%를 더할 수 있습니다.”

- 공교롭게도 대선 당시 이명박 당선자가 7% 성장을 공약했는데요. 이 당선자에게 무엇을 주문하시겠습니까?
“사실 국가 지도자와 정치권이 경제를 해보자는 사회 분위기 조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칩니다. 또 노동계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죠. 다행히 우리나라 노동조합의 노선에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전통적 계급투쟁노선을 버리고 말 그대로 실용노선으로 가야 합니다. 나는 왜 이명박 당선자가 노동계 지도자들과의 대화를 미루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나라는 지금 아일랜드와 같은 리더십과 국민적 결단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손바닥 하나만으로는 박수를 칠 수 없어요.”

이틀에 걸쳐 박 회장을 만나고 난 다음날인 지난 1월14일 이명박 당선자가 신년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이 당선자는 올해 7% 성장은 어렵겠지만 6%는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7% 성장 공약에 대해서는 임기 5년, 길게는 10년간의 경제계획을 중심으로 내놓은 것이라고 밝혔다.

- 이 당선자와의 알려지지 않은 인연이 있으면 소개해 주시죠.
“나는 포항에서 오래 일했고, 아시다시피 당선자도 포항 사람이죠. 당선자가 기업에서 오래 일하는 동안 선후배로서 어쩌다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당연히 그 시절에는 내가 대선배였죠. 그때는 나를 편하게 대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앞으로야 거꾸로 될지 모르지만.(웃음)”

국제경쟁에서 밀리면 끝장

- 박세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우리나라가 당면한 최대 문제로 ‘국가 비전의 상실과 정치적 리더십의 위기’를 꼽습니다. 대한민국의 비전이 무엇이라야 한다고 보십니까? 이명박 당선자에게 어떤 리더십을 기대하시나요?
“대한민국의 장래는 국제경쟁에 달렸습니다. 국제경쟁에서 밀리면 대한민국은 끝장입니다.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아야 이 나라가 제자리를 지킬 수 있어요. 무섭게 추격하는 중국·인도·러시아 등에 추월당했다가는 여기서 주저앉을 수 있습니다. 내수가 문제가 아니에요. 세계가 시장입니다. 그런데 국제경쟁에서 이기려면 국민이 각오를 새로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명박 당선자에게 무엇보다 통합의 리더십을 주문하고 싶어요. 국가경쟁력이 국민통합 없이도 강화될 수 있을까요? 나는 어렵다고 봅니다. 드라이브를 시작하기 전에 어떤 공약이 이런 비전과 부합하고, 어떤 공약이 통합에 역행하는지 이 당선자가 심각하게 고민하기 바랍니다.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비서진을 어떻게 구성하느냐도 중요합니다.”

- 대통령비서실은 비서실장 원톱 체제로 가는 것 같습니다. 청와대는 강화되고 총리의 권한은 약화되는 모양새죠.
“그럴수록 비서실장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조정 역할을 잘해야 하기 때문이죠. 이럴 때일수록 권한이 집중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비서실장을 맡아야 합니다.”

- 이병철·정주영 회장과는 어떤 인연이 있나요?
“기업인 중 이병철 회장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 회장은 본래 우리나라에서 제철소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경제 기반이 약하다는 거였죠. 일본도 메이지(明治)유신 때 시작해 실질적으로는 2차대전 이후에나 성공했으니 그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죠.

한번은 걱정이 된 이 회장이 나를 찾아왔습디다. 그래서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했죠. 나 역시 우리나라 최고의 경제인에게 인정받고 싶었거든요. 1시간20분 걸려 설명하고 나서 우리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말씀해 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재무구조 보면 다 알 수 있는 거 아니냐’고 하시더군요. ‘삼성도 포스코 이상 빚이 있고, 현대는 아마 삼성보다 빚이 더 많을 것’이라면서…. 이 회장이 인정해 주니 고맙기도 하고, 자부심도 생겼죠. 그 후 삼성에서 자기네 이사회에 참석해 달라, 식사를 같이하자 등 이런저런 요구가 많았어요. 삼성 연수원도 우리 연수원 보고 가서 지은 거예요.

정주영 회장은 현대조선을 만들기 전 포항에 왔었습니다. ‘박 회장, 나 배를 만들려고 그래’ 하기에 우리도 조선용 후판을 만들 것이라고 했죠. 그렇게 우리 공장을 둘러보고 난 후 자신감을 얻어 조선소 기공식을 했습니다. 정 회장은 참 실질적인 분이었어요. 되겠다 싶으면 바로 행동으로 옮겼고.”

- 정 회장의 그런 추진력과 이병철 회장의 합리성, 이 두 거인의 장점을 박 회장님이 잘 갖추신 것 같습니다.
“뭐 그렇게까지…. 제철소라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는 합니다. 커다란 고로에서 쇳물이 나오면 다시 여러 단계의 공정을 거치죠. 다이내믹하다고 할까요?”

“대운하는 신중히” 권유

- 이번 <월간중앙> 서베이에서 경제인 4위는 최근 특별사면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었습니다. 김 전 회장은 외환위기 당시 수출을 늘려 국난을 극복하자는 파격적 제안을 했죠.
“나도 한 제안입니다. 축소조정의 방향이 아니라 확대조정으로 가자는 것이 골자였죠. 축소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하던 일도 그만둬야 하고 국민의 사기도 떨어집니다. 그래서 외화의 밸런스는 조절하되 확대조정으로 나아가자고 주장했습니다. 김우중 회장은 아이디어가 많은 분이었어요. 행동력도 있었는데, 자신의 아이디어를 제대로 관철하지 못해 문제가 생겼죠.”

- 그러고 보면 기업가정신이 과거보다 약해졌다는 느낌입니다. 투자가 부진한 것도 이런 기업가정신의 약화와 관계가 있는 듯싶고요.
“ 그런 점이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나라 전체의 기강이 해이해진 듯합니다. 공무원사회도 그렇고, 기업 쪽도 그렇고.”

- 새로 들어서는 정부에 기업가정신의 고취를 기대해볼 수 있을까요?
“나는 이 당선자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 한반도대운하는 어떻게 보시나요?
“당선자와 둘이 식사하면서 신중하게 생각하시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은 있지만 제대로 스터디해 보지 않았어요. 어쨌든 국민의 동의를 구해야죠. 그래서 전체적으로 협조하는 분위기가 돼야 합니다.”

이명박 당선자의 측근인 정두언 의원은 공무원 시절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비서실 등에 오래 근무했다. 요즘 새 정부 첫 총리 인선 작업을 하고 있는 정 의원은 2001년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이 모신 18명의 총리 중 가장 부지런했던 사람으로 박태준을 꼽았다. 박 회장은 김대중 정부 시절 4개월간 총리로 재임했다.

- 총리의 조건은 무엇인가요? 이 당선자는 대학 총장 출신을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만.
“장관회의는 기업으로 치면 중역회의입니다. 총리 시절 비서실에 회의 준비를 착실히 시켰죠. 확인도 철저히 하고. 그러다 보니 장관들이 대통령보다 내 앞에서 더 긴장합디다. 총리는 행정을 알아야 합니다.”

- 이 당선자를 일본 쪽에서는 어떻게 봅니까?
“일반적으로 한·일 관계가 지금보다는 나아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 중국의 추격은 무섭고 일본과의 격차는 좀처럼 좁히기 어렵다는 이른바 ‘샌드위치론’을 어떻게 보시나요?
“과거 신일본제철의 사이토 회장은 ‘부메랑론’을 폈습니다. 한국에 기술을 이전한 결과 따라 잡혔다는 거였죠. 그러나 스승보다 나아지는 것이야말로 스승에 대한 보답입니다. 포스코가 그 실례죠. 지독하게 따라붙으면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느슨하게 해서는 물론 못 따라잡죠.”

- 이번 <월간중앙> 서베이에서 포스코가 삼성·현대·LG에 이어 건국 후 한국사회를 상징 혹은 대표하는 기업 4위에 꼽혔습니다. 포스코가 앞으로 어떤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라십니까? ‘우향우 정신’이 21세기에도 필요하다고 보시나요?
“한마디로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 우뚝 서야죠. 포스코에서는 창업세대가 심어놓은 애국심, 기업정신, 구성원들의 좋은 분위기, 애사심 그리고 책임자들의 우수한 자질 등이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세계 최고 수준의 철강기업이라는 위상을 계속 유지할 것입니다. 우향우 정신은 지금도 필요합니다. 우향우가 뭐냐? 사심 없이 헌신하자는 거예요. 무한경쟁, 사생결단의 국제경쟁시대일수록 기업들이 우향우 정신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우향우 정신이란 박 회장이 포항에 제철소를 건설할 당시 “여기서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해 영일만에 빠져 죽자”고 한 데서 유래했다. 제철소에 투입된 대일청구권자금은 일제강점기 조상들이 흘린 피의 대가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정신은 포스코에서 지금도 작동한다. 포스코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파이넥스 공법을 취재하러 2006년 가을 포항제철소를 찾았을 때 배진찬 파이넥스2공장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향우 정신’은 21세기에도 ‘약발’

“파이넥스 공장은 박태준 명예회장의 ‘우향우 정신’이 여전히 살아 있는 곳입니다. 1968년 영일만의 모래 벌판에 포항제철소를 지을 당시 박태준 사장은 이렇게 말했죠. ‘만일 실패하면 전 임직원이 바로 우향우해서 저 포항 앞바다에 빠져 죽자’.”

경영자의 확신과 기술자의 집념·열정이 만나지 않았다면 이 ‘꿈의 기술’은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배 공장장은 덧붙였다.

1992년 정계에 몸담고 있던 박 회장은 포스코에 고로 없이 쇠를 만드는 신공법을 개발해 보라고 권했다. 21세기에는 환경문제로 인해 고로(용광로) 방식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선견이었다.

포스코가 파이넥스 공법을 개발하기까지 쇳물은 고로에서만 뽑아냈다. 14세기 이래 고로 방식은 제철공법의 대명사였다. 박 회장의 권유를 받고 포스코는 곧바로 신공법 개발에 착수했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공법이어서 참고서도 없었다. 포스코는 그러나 시행착오를 수없이 거듭한 끝에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지난 1월10일 열린 포스코 ‘2008년 CEO 포럼’에서 이구택 포스코 회장은 “파이넥스 공법의 경제성에 대해 목표의 95%는 달성했다”고 말했다.

‘자원은 유한, 창의는 무한.’

지금도 포항제철소 구내 곳곳에 걸려 있는 박태준 회장 재직 시절의 표어다.

- 박태준 경영의 키워드는 무엇인가요?
“경영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원칙을 지키는 것입니다. 또 외국의 사례에 한국적 요인을 접목해 플러스 알파를 찾아내는 거죠.”
- <이코노미스트>가 2006년 오피니언리더 서베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10가지 화두를 뽑았습니다. 고용불안, 정치적 리더십 부재, 저출산-고령화, 집단이기주의, 경쟁력 낮은 교육, 노사갈등, 기업활동 규제, 분단 체제와 그 비용, 반기업·반부자 정서, 성장동력의 소진 등이었죠. 경제문제와 경제외적 문제가 뒤섞여 있습니다. 경제외적 문제 가운데서는 어느 것을 가장 우려하십니까?
“리더십 부재, 교육의 난맥, 집단갈등, 분단, 국민정서 등이죠. 무엇보다 리더십 문제가 큽니다. 개인적으로 군에서, 기업에서, 그리고 정치현장에서 지도자의 중요성을 절감했습니다. 나름대로 실천적 노력도 했고요. 리더가 잘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따라가게 마련입니다. 따라가는 편이 유리하니까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일본 메이지유신과 개국의 모태가 된 가고시마 시내를 가리키고 있다. 뒤쪽으로 보이는 사쿠라지마는 지금도 용암을 분출하는 활화산이다.

1978년 8월 중국의 최고 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이 신일본제철소를 찾았다. 기미츠(君津)제철소를 둘러보던 이 작은 거인이 신일본제철 측에 “중국에 포철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신일본제철 회장은 “가능할 것 같지 않다”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제철소는 돈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짓습니다. 그런데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습니까? 박태준 같은 인물이 없으면 포철 같은 제철소는 지을 수 없습니다.”

이나야마는 “포철은 기적”이라고 덧붙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덩샤오핑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박태준을 수입하면 되겠군요.”

이 얘기를 박태준에게 전한 이나야마는 그에게 “중국이 당신을 납치할지 모른다”고 농담했다.

1990년 11월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철강산업에 끼친 공로를 평가해 박태준에게 레종 도뇌르 코망되르 훈장을 보내왔다. 미테랑 대통령은 축사에서 박태준을 이렇게 치하했다. 박태준에게 바친 헌사였다.

“한국이 군대를 필요로 했을 때 당신은 장교로 투신했습니다. 한국이 기업인을 찾았을 때 당신은 기업인이 됐습니다. 한국이 미래의 비전을 필요로 할 때 당신은 정치인이 됐습니다. 한국에 봉사하고 또 봉사하는 것, 그것이 당신의 삶에서는 지상명령이었습니다.”

덩샤오핑 “박태준 수입할까요?”

- 미테랑 대통령의 말이 인상적입니다. 군장교·기업인·정치인으로 살아오는 동안 어느 길에서 가장 큰 보람을 느끼셨습니까? 인생을 다시 산다면 어느 길을 가시겠습니까?
“모든 길에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분이 놓쳤지만, 나는 교육에서도 특별한 보람을 느낍니다. 포스텍과 포스코교육재단 산하의 열두 학교는 언제 떠올려도 포스코를 대할 때처럼 가슴이 뿌듯해지죠. 나는 인생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기업인으로서 포스코를 성공시키는 과정에서 일본의 각계 지도자들을 설득했던 것이 특히 잊히지 않습니다. 나는 애국심을 발휘했고, 일본사람들의 영혼과 신뢰를 얻었습니다. 다시 태어나더라도 나는 다시 애국심을 발휘할 것이고, 그러면 결과는 더 좋겠죠. 그 사이 우리나라는 더 발전했고 국민도 더 성숙해졌으니까요.”

이대환은 박태준 평전 <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에서 그를 이렇게 평했다.

“생존의 길을 찾아 일본으로 들어간 아버지의 뒤를 좇아 현해탄을 건너간 수많은 식민지 아이들 가운데 사춘기를 벗어난 무렵에 해방된 고향으로 돌아와 빈곤에 허덕이는 신생 독립국의 어른으로 성장한 다음, 유·소년기에 어쩔 수 없이 익혔던 일본어와 일본문화로써 가장 훌륭하고 가장 탁월하게 조국에 이바지한 인물은 박태준일 것이다.”

- <일본경제신문>도 3년 전 고위 관료와 기업인을 대상으로 일본을 상징하는 경제인을 조사했습니다. 당시 마쓰시타전기의 창업주인 고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회장이 1위를 차지했죠. 마쓰시타 회장은 박 회장님처럼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마쓰시타정경숙을 창립했습니다. 마쓰시타정경숙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한국정치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마쓰시타 선생이 정경숙을 세웠듯 나도 포스텍(포항공대)과 일류 학교들을 세웠는데….(웃음) 일본이 2차대전의 폐허를 딛고 경제 선진국으로 올라섰지만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 마쓰시타의 생각이었죠. 마쓰시타정경숙의 탄생 배경입니다. 그분의 철학은 단순했습니다. 평화와 행복은 번영하는 사회라야 이뤄지고, 지속적으로 번영하는 사회를 만들려면 좋은 정치가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좋은 정치가는 좋은 사람들 가운데서 나오니 좋은 사람을 계속 길러내자 이겁니다. 한마디로 정치분야에서도 인재 양성이 필요하다는 발상이죠. 인재를 길러내는 것은 국가적으로는 물론 기업으로서도 필요합니다. 포스코는 ‘창의는 무한, 자원은 유한’을 회사의 운명이 걸린 슬로건으로 삼았는데, 인재 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기도 하죠.

한국정치, 무엇이 문제인가? 내가 보기에 가장 큰 문제는 ‘일급의 젊은 인재들’이 국회에 들어갈 마음이 없다는 거예요. 기업·연구소·관료 조직·언론에는 일급의 젊은 인재들이 모여드는데, 정치는 그렇지 않다는 거죠. 이래서는 우리 정치의 미래가 밝아지기 어려워요. 정치 지도자들이 진정으로 정치를 개혁하려면 그 첫걸음으로 ‘일급의 젊은 인재들’에게 기회를 줘야 합니다.”

- 포스텍은 <중앙일보> 대학평가에서 일관되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포스코의 교육사업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제철소에는 고가의 설비가 많습니다. 그래서 보험에 드는데, 보험회사에서 리베이트로 7,000만 원이 나왔습니다. 지금 돈으로 700억 원 정도 될 거예요. 그 돈을 당초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치자금으로 드리려고 했습니다. 중요한 선거가 많았는데 번번이 ‘정치자금은 절대 못 낸다. 돈이 나올 데가 없다’며 버텼거든요. 막상 그러면서도 가슴이 아팠죠. 보험회사에서 들은 대로 리베이트는 보험사 예산에 책정돼 있는 돈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이 분이 다시 돌려주면서 나더러 마음대로 쓰라는 거예요. 포항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생각했죠. 사원주택은 지었는데 학교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제철장학재단을 만들고 각급 학교를 하나 하나 만들어 나갔죠.”

박태준은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남조선경비사관학교 생도 시절 박정희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탄도학 강의 첫 시간에 교관 박정희가 낸 고난도 문제를 박태준이 푼 것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5·16군사정변 직전까지 이어졌다. 박정희가 박태준을 자기 부대로 끌어가기도 했다. 박정희는 그러나 정작 5·16을 일으키면서 박태준을 배제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자네를 가장 신뢰했기 때문일세. 만약 내가 실패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면 내 처자식을 부탁하려고 했네. 군의 장래를 위해서도 자네 같은 사람이 남는 게 좋고.”

이대환은 <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에서 이 말을 듣고 난 박태준은 콧잔등이 시큰했다고 기록했다.

3선개헌 때의 일이다. 박정희는 장기집권의 길을 열기 위해 예비역 장성들까지 3선개헌 지지성명에 동원했다. 박태준은 그러나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며 끝내 서명하지 않았다.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이렇게 내뱉었다고 한다.

젊은 인재들이 진출하는 국회 돼야

▶박태준 회장은 육군대학을 수석 졸업하던 1954년 백년가약을 맺은 부인 장옥자 여사와 사이에 1남4녀를 두었다.

“그 친구 원래 그래. 제철소 일이나 잘하게 내버려둬.”

박 회장은 자신의 그런 남다른 면을 보고 박 대통령이 제철소 건설을 맡겼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솔직히 나한테 잘 맡긴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맡았으면 아마 부실기업 됐을 거예요. 절대 관리를 못했을 것입니다.”

- 그런 성격에 정치는 잘 안 맞았겠습니다?
“누가 보든 말든 나는 성격을 드러냅니다. 사실 건전한 사람들 눈에는 우리나라가 건전한 사회가 아닙니다. 불건전한 것이 많아요.”

- 정치를 더 있다 하셨더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우리 정치도 많이 건전해졌거든요.
“나는 애초에 정치를 할 생각이 없었어요. 어쩌다 끌려간 거지. 숫자 맞춰 주러.”

- 일급의 젊은 인재들이 왜 국회에 들어가지 않는 걸까요?
“우선 국회의원들이 국가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주지 못했어요. 기업인에게도 정치자금 달라는 소리나 했지 규범적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기업인들도 물론 책임이 있죠. 그런 점에서 일본사회가 부럽습니다. 일본은 서로 인정합니다. 정치인들은 기업인들이 일본경제를 일으키느라 고생했다고 인정하고, 기업인들은 정치인들이 패전국을 정치적으로 안정시킨 공로를 인정합니다.”

-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박정희 대통령을 많이 닮았습니까?
“많이 닮았지. 닮은 데가 많아요.”

박 회장은 김우중 전 회장과의 일화를 들려줬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경제인들 사이에서 기업인 출신 대통령을 내자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다.

“김우중 회장이 한창 뜰 때였습니다. 사람들이 김 회장더러 대통령선거에 나가라고 한 모양입니다. 그 말을 들은 김 회장이 펄쩍 뛰면서 ‘나는 자격이 없고, 할 만한 사람이 따로 있다’고 했답니다. 그러고는 나를 찾아온 거예요. 자꾸 찾아오는 바람에 마음고생이 심했죠. 나중에는 강원룡 목사까지 가세했어요. 그때마다 내 대답은 ‘하고 싶은 사람이 해야 한다’였죠.”

-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집권이 확실시됐을 때 직접 집권해야겠다는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그런 생각 했으면 타협했겠죠. 그랬다면 YS가 먼저 하고 그 뒤에 하고 그랬겠지. 그런데 타협 안 했잖아요? 민자당에서 3년 동안 김종필 총재(JP)와 셋이서 매일 아침 회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잘 알아요. 일을 같이 안 했다면 모를까, 같이 해봐서 아는데 어떻게 밉니까? 겪어본 사람만이 압니다. 결국 그 자리에 있으면서 일을 저질렀지. 외환이 고갈된 상태에서 수습해 달라고 나한테 왔습디다.”

- JP는 어떻게 보셨어요?
“JP야 유능하지.”

박 회장이 묵고 있는 시로야마호텔은 가고시마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의 방에서는 바다가 보였다. 그 바다에 지금도 용암을 분출한다는 화산섬 사쿠라지마가 떠 있었다. 사쿠라지마는 해신의 옆 얼굴을 연상시켰다. 배영을 하듯 얼굴만 내놓고 누운 해신.

김우중 한때 ‘박태준 대통령’ 추진

인터뷰가 길어지면서 평화로운 한 폭의 수채화에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승용차를 타고 가고시마 시내의 일본 전통식당 산에이(山映)로 자리를 옮겼다. 가족이 운영하는 이 식당은 아버지와 아들이 주방에서 일하고, 어머니와 딸이 서빙을 했다. 서글서글한 외모의 딸은 영국 유학파라고 했다.

- 가업을 잇는 풍습은 민족성과도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는 이런 음식점을 물려주려고 해도 자식이 달가워하지 않기 일쑤죠.
“민족성과 관계가 있는 듯싶습니다. 음식점이 고달프기는 여기도 마찬가지예요. 그렇지만 일본사람들은 부모가 한 일 나라고 못할까, 이렇게 생각하죠.”

- 한국의 젊은이들이 청년실업으로 고통을 겪고 있고 취업을 해도 비정규직, 이른바 88만 원 세대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원로로서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삶의 지혜를 들려주시죠.
“‘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직하고 싶다’는 청년 실업자가 넘쳐난다고 합니다. 딱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세상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너무 쉽게 살려는 젊은이들이 많아요. 전자의 경우 정치 지도자들의 책임이 크고, 후자는 사회 분위기 탓이 큽니다.

후자에 속하는 젊은이들에게 이런 충고를 해주고 싶군요. 경제 발전, 민주주의 발전의 혜택을 그런 식으로 누리려는 것은 자기 시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젊은 세대에게 ‘항상 10년 뒤 자기 모습을 그려보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나는 그렇게 해왔습니다. 세대 간 대화도 필요합니다. 젊은 세대는 우리나라의 위상이 어느 정도이고 내 실력이 어느 수준인지 알아야 합니다. 더불어 기성 세대는 젊은 세대를 질책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어쩌다 원로 없는 사회가 돼버린 것 같습니다. 원로 대접도 제대로 안 하고, 원로도 침묵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원로들이 할 말을 합니다. 원로로서 발언도 하고, 이들에게서 훈련받은 사람들도 원로를 선배로 대접하죠. 결국 사회 분위기가 제대로 잡혀야 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틀렸어’ 하는 분위기는 잘못된 것입니다. 틀린 사람도 많지만 옳은 말 하는 사람도 많은 것을 알아야죠.”

이필재 월간중앙 편집위원 < jelpj@joongan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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