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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32> 나의 화살이 향하는 곳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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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풍경 1 : 얼마 전 몽골에서 잠시 귀국한 이용규 선교사(베스트셀러 기독교서적 『내려놓음』의 저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올해 마흔한 살입니다. 젊더군요. 그런데 그의 지향은 놀라웠죠. 그는 “‘나’라는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어져야 한다. 그렇게 ‘자아’가 죽은 빈 공간에서 예수님이 부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활시위는 ‘밖’을 향하지 않더군요. 한치의 오차 없이 ‘안’을 향했습니다. 그렇게 ‘자아’를 겨누더군요. 내 안의 집착, 내 안의 욕망, 내 안의 잘남, 내 안의 명예를 향해 거침없이 시위를 당기더군요. 이 선교사는 “그렇게 내 안의 집착이 하나씩 죽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저를 만지시는 게 느껴진다”고 말했습니다.

#풍경 2 : 중국에 ‘석공(石鞏)’이란 사냥꾼이 있었죠. 사슴을 쫓던 그는 마조(馬祖·709~788)선사의 토굴까지 갔습니다. 마침 휴식을 취하던 마조선사와 마주쳤죠. 석공이 물었습니다. “혹시 이쪽으로 도망가던 사슴을 못 봤습니까?” 마조는 태연하게 되물었죠. “그대는 뭘 하는 사람인가” “보시다시피 사냥꾼입니다” “그럼 활을 잘 쏘겠구먼” “잘 쏘는 편입니다” “그럼 화살 하나로 몇 마리나 잡는가” “한 마리 밖에 잡지 못합니다” “그럼 활을 쏠 줄 모른다고 해야지.”

발끈한 석공이 되물었죠. “그럼 스님은 화살 하나로 몇 마리나 잡으십니까” “나는 한 무리를 잡는다네” ‘옳거니!’하면서 석공이 받아쳤죠. “아니, 스님이 어찌 산 생명을 무리로 잡는단 말입니까.” 그러자 마조선사가 석공의 가슴을 가리키며 답했죠. “자네는 그런 것까지 알면서 왜 이쪽을 쏘지 못하는가.” 석공은 정신이 ‘번쩍’ 들었죠. 그리고 출가해 마조의 제자가 됐습니다.

크리스천이든, 불자든 마찬가지죠. 인간은 끊임없이 다가서야 하는 존재입니다. 부처를 향해서, 또 예수를 향해서 말입니다. 왜냐고요? ‘하나’가 되기 위해서죠. ‘하나’가 되는 순간의 온전함. 오직 거기에 자유가 있고, 평화가 있고, 생명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겠죠.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 그래서 부처님은 말씀하셨겠죠. “가자, 가자, 어서 가자. 깨달음의 세계로(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그런데 두손을 모은 채 “할렐루야!”만 외친다고 ‘하나’가 되진 않겠죠. 불공을 올리며 “부처님”만 찾는다고 ‘하나’가 되진 않겠죠. 그럼 어찌할까요. 나와 부처님, 나와 예수님 사이의 간격을 봐야겠죠. 그게 한 뼘인지, 두 뼘인지, 세 뼘인지 봐야겠죠. 그래야 ‘간격의 이유’도 보이겠죠.

그제야 우린 활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겨눌 수도 있습니다. 내 안의 무엇이 예수를 가리나, 내 안의 무엇이 부처를 가리나. 그게 보일 때 ‘과녁’도 보입니다. 쉽진 않습니다. 왜일까요? 기나긴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은 ‘움켜쥐는 방식’에만 익숙할 뿐, ‘놓아주는 방식’에는 익숙치 않기 때문이죠. 우리의 마음도 그렇고, 우리의 몸도 그렇습니다.

그걸 알고 시위를 당겨야겠죠. 단 하나의 화살로 “쿵!”하고 쓰러지는 ‘자아’는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 쏘고, 쏘고, 쏘고, 또 쏘아야죠. 정확하게 과녁을 찾으며 말입니다. 그러다 ‘퍽!’하고 ‘자아’가 고꾸라지는 순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절절하게 느껴지겠죠. ‘난생 처음 맛보는 생명력, 이게 바로 부처의 숨결이구나’ ‘밀물처럼 밀려오는 온유함, 이게 바로 주님의 어루만짐이구나.’

그러니 물어야죠. 나의 화살은 지금 어디를 겨누는가.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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