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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길 떠나는 시 ④

중앙일보

입력

유쾌 발랄, 고양이처럼….

『리스본行 야간열차』 황인숙 시집, 문학과지성사

황인숙의 시를 두고 평자들은 ‘발랄’이라는 단어로 상큼하게 채색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또 ‘고양이의 시인’이라고 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발랄과 고양이, 참으로 묘한 울림을 낳는다. 그 울림의 골목길을 잠시나마 한 번 걸어봅시다.

어제도 오늘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그 사람들이나 지나다닌다
나무 한 그루 없는 골목쟁이
심심함이
바닥을 패고
시멘트벽을 금 내고
페인트칠을 벗긴다
낯선 강아지 한 마리가 흘러들거나
어느 집에 손님이라도 오면
골목쟁이는 두근두근
보안등을 밝히고 귀를 바짝 세운다

내가 백 번도 천 번도 더 읽은
우리 집 앞 골목쟁이
골목쟁이도 날 훤히 외울 것이다
때로 골목쟁이도
다른 발걸음이 읽고 싶을 것이다.
-<골목쟁이> 전문

이 시에서 이른바 시적 주체는 둘이다. 시의 화자 곧 ‘나’와 ‘골목쟁이’가 바로 그들이다. ‘골목쟁이’는 국어사전에서 “골목에서 좀 더 깊숙이 들어간 좁은 곳”으로 풀이된다. 일종의 막다른 공간인 셈이다. 그 좁고 막다른 곳에 시의 화자가 있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골목쟁이와 나는 같은 신세로 있다. 심심함, 무료함, 지루함, 반복을 견디며, 나는 골목쟁이에 있다. 그 풍경 속에서 나는 일종의 착란을 경험하기도 한다.

내가 멍하니 있으면
누군가 묻는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느냐고

내가 생각에 빠져 있으면
누군가 묻는다
왜 그리 멍하니 있느냐고

거미줄처럼 얽힌 복도를 헤매다 보니
바다,
바닷가를 헤매다 보니
내 좁은 방.
-<알 수 없어요> 전문

하지만 그 같은 착란은 나에게서만 일어나는 특별한 사건은 아니다. 일상에 갇혀 꿈을 잃어버리고 무한반복만을 누리며 사는 우리네 삶의 전형적인 풍경이 빚어내는 증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곧 우리 모두는 좁고 막다른 곳에 무료하게 갇혀 있다.

이 세상을 몇 십 년 살아도
내 세상 같지 않다는 얼굴로
나이 지긋한 양반이 간다
회사 십 몇 년 다녀도
내 회사 같지 않다는 얼굴로
회사 지긋지긋한 양복쟁이가 간다
꽃눈 잔뜩 단 꽃나무들이
웅크리고 진눈깨비를 맞는다
이런 생각을 할 꽃눈도 있으리라
“좋아, 이번이 아니라면 다음 생에는!”
-<흐린 날> 전문

좁고 막다른 곳, 일상의 반복이 되풀이 되는 곳, 심심함과 무료함이 지배하는 곳에서, 시인은 꽃눈의 입을 빌어 “이번이 아니라면 다음 생에는” 무언가 새로운 것, 무언가 발랄한 것, 무언가 놀랄만한 것을 갈구한다. 그러나 발 없는 꽃이 어찌 다른 곳에서의 다른 생을 기약할까! 꿈은 간절하되 속절없다. 그렇다면 정녕 시인의 갈구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일까?

새로움/발랄함/놀라움을 찾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리라. 가장 먼저 생각되는 것은 그 좁고도 막다른 공간을 벗어나 이른바 광장과도 같은 장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일종의 탈출이라면 탈출이다.

일요일 아침
공립 고등학교 텅 빈 운동장을
오토바이 폭주족이 내달린다
목적지도 없이, 그러니까 끝없이
영원까지 달릴 듯 저 굉음들
쌩쌩 도는 원심분리기들
운동장을 뜨겁게 휘저으며
제 갇힌 청춘들을 휘저으며
폐곡선을 무한공간으로 만든다
일요일 아침이
하얗게 뒤집힌다

꽃 한 다발

던져주고 싶다.
-<무한공간을 달리는 오토바이> 전문

시인은 골목쟁이를 벗어나 운동장으로 향한다. 그 운동장에서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젊음이 보이고 속도가 느껴지고 굉음이 들려온다. 그것들에 시인은 “꽃 한 다발 툭 던져주고 싶다”고 말한다. 일종의 환호나 격려 혹은 대리만족의 표시이리라. 그러나 이 시에는 묘한 이율배반이 숨겨져 있다. 운동장을 달리는 폭주족을 생각해보라. 폭주라함은 지나친 속도, 곧 맹렬한 속도로 공간을 돌파하는 것일 터인데, 시에서의 오토바이 폭주족들은 겨우 울타리 쳐진, 곧 보호받는 공간인 운동장을 그저 마구 달릴 뿐이다. 그것도 직선의 질주가 아니라 곡선, “폐곡선”의 질주이다. 그들의 폭주는 말 그대로의 폭주는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또 하나의 다람쥐 쳇바퀴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쯤에서 우리는 슬슬 시인과 시인의 꽃이 안타까워지기도 한다. 혹시 산을 오르면 조금 나아질까?

친구와 북한산 자락을 오른다
나는 숨이 찰 정도로 빨리 걷고
친구는 느릿느릿,
그의 기척이 이내 아득하다
나는 친구에게 돌아가 걸음을 재촉한다
그러기를 몇 번, 기어이 친구가 화를 낸다
산엘 왔으면, 나무도 보고 돌도 보고
풀도 보고 구름도 보면서 걷는 법이지
걸어치우려 드느냐고
아하!
친구처럼 주위를 둘러보며 걸으려는데
어느 새 휙휙 산을 오르게 되는 나다
땀을 뚝뚝 흘리며 바위에 앉아 내려다보면
멀리서 친구가 느릿느릿 올라온다
나무도 데리고 돌도 데리고
풀도 데리고 구름도 데리고.
-<산오름> 전문

이 시는 쉽게 읽힌다. 이야기의 얼개가 뚜렷하고, ‘빨리’와 ‘느릿느릿’, 걷는 것과 걸어치우는 것의 단순하고도 강렬한 대비가 효과를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시가 쉽게 다가오는 것은 시 속에서 토로되는 시인의 활기와 여유가 시 밖으로까지 충분히 분출돼 독자들인 우리들 역시 그 활기와 여유를 더불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이제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일상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일까?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산이라는 공간에서의 활보가 아직은 완전히 익숙하지 않다. 공간과 시인의 보폭이 맞지 않는다. 공간은 넓고 시인은 단지 너무 빠를 뿐이다. 좁고 막다른 공간 태생에게 온 사방이 공간이 산은 버겁다. 공간을 타인과 공유하고 함께 느끼기에는 더더욱 역부족이다. 따라서 광장으로의 이행은 아쉽게도 지금으로서는 유보적일 수밖에 없다.

다음. 좁고도 막다른 공간을 탈출로 벗어나지 않는다면, 남는 방법은 그 좁고도 막다른 공간 그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우주의 수준으로 확대시키는 것, 곧 공간 자체를 자세하고도 꼼꼼하게 샅샅이 탐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새로운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때 가장 유력한 방법은 이제까지의 평범한 시각에서 벗어나 다른 시각으로 공간을 바라보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나’의 시선으로만 보지 않고 ‘다른’ 시선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다른 시선’을 찾을 때, 시인은 그 유명한 ‘고양이’를―왜 고양이어야 하는지는 다른 설명이 필요하겠지만―마침내 발견한다. 미리 앞질러 말하면, 그 고양이야말로 아니 고양이와 더불어 노래하는 것이야말로 황인숙 시의 심볼이다. 황인숙이 고양이인지, 고양이가 황인숙인지 모를 정도로 흔쾌히 한 몸이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황인숙의 고양이’는 시인이 이루어낸 유쾌하고도 발랄한 탈출인 셈이다. 보라.

기와 지붕, 슬레이트 지붕, 콘크리트 지붕, 천막으로 덮인 지붕,
굽이굽이 지붕들의 구릉과 평원을 굽어본다
지붕들이 품고 있을 크레바스와 동굴들, 겹과 틈까지
샅샅이 굽어본다
와우, 저 지붕을 쫘아악 펼치면
지상을 몇 번이나 덮을까? 견적을 뽑는데
은빛 천막 위에서 몸을 쭉 뻗고
일광욕을 즐기던 고양이가 예감이 이상한 듯
고개를 들어 둘러보다 나를 향해 얼굴을 멈춘다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다
걱정 마시라, 네 영역을 공유하기에
내 몸은 너무 무거우니까
저 空中空間의 활용자인 고양이들
고양이의 몸 안에서 뻗치는 기운이
고양이를 위로위로 올려 보내서
광활한 이 영토를 발견하게 했으리라
아들레날린 중독자인 고양이들이여
기울어진 지붕, 흔들거리는 처마,
말하자면 기우뚱함에, 그리고 지붕과 지붕 사이의 허공에
너희는 환장을 하지
그래서 마치 지붕들이 고양이를 낳는 듯
불쑥불쑥 고양이가 지붕 위로 솟는 것이다

뒤안길도 사라진 이 도시에서
지붕 위의 뒤안길, 말하자면 위안 길에
살풋 호흡을 얹어본다.
-<지붕 위에서> 전문

시인과 고양이는 이제 지붕 위에 있다. 지붕 위는 구릉과 평원이 있는 광활한 영역이다. 그렇다면 이 광활한 영역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시인은 그 비밀을 숨기는 동시에 드러낸다. “고양이의 몸 안에서 뻗치는 기운이 / 고양이를 위로위로 올려 보내서 / 광활한 이 영토를 발견하게 했으리라”고 말하는 대목이 바로 그 비밀이 담긴 대목이다. 풀어보면, 좁고 막다른 골목 위로 솟구치면 바로 그 곳에 지붕이 있고 그 지붕이야말로 광활한 영역이라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폐곡선의 폭주’, ‘산오름’이 아니라 위로 솟구침이 바로 새로운 공간으로의 새로운 발걸음을 낳는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주목할 것은 위로 솟구침이 저 그리스 신화의 이카로스의 비상과는 다른 솟구침이라는 사실이다. 시인의 비상은 지상에서 지붕까지 2~3미터 안팎의 도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조금 우스개로 말하면 마이클 조던이 덩크슛 할 정도의 점프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 자체도 일반으로서는 비상(非常)한 비상(飛上)이겠지만 이카로스에게야 그 정도는 참으로 비상(非想)할만 수준일 터이다. 요컨대 시인과 고양이의 도약은 영웅적이거나 비극적이지 않다고 이해하면 되리라.
생각해보라. 고양이가 어떤 짐승인지를. 길들여지면서도 결코 길들여질 수 없는 동물, 도약해서 끝내 추락하는 비극 대신 땅과 하늘의 경계를 산보하는 것을 자신의 운명을 내세우는 동물이지 않은가. 따라서 고양이와 시인이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영웅이 되거나 비극적이지 않아도 충분히 세상을 즐길 수 있다는 심볼이지 않을까. 물론 이 때의 즐김은 세상을 잘 살고자 하는 노력과 다를 바 없다. 하늘을 걷는 것, 그것이 바로 그 길이다.

글_ 북리뷰어 김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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