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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10년 동안은 “수형자들 잡놈으로 보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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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천년 고찰 해인사에 첫 비구니 포교국장이 등장했다. 비단 해인사 뿐만 아니다. 송광사, 통도사, 수덕사, 백양사 등 불교 조계종 5대 총림(叢林)을 통틀어도 여성 포교국장은 사상 처음이다. 주인공은 정현(正現·54·사진) 스님이다. 총림에서 사람을 가장 많이 만나고, 가장 활동적으로 뛰어야 하는 소임이 바로 포교국장이다. 해인사 주지 현응 스님은 “해인사 역사를 통틀어도 비구가 아닌 비구니 스님이 이 직책을 맡은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 정현 스님을 아는 사람은 그를 ‘여장부’라고 평한다. 배포가 좋아서만이 아니다. 사람을 대하는데 걸림이 없고, 딱히 분별도 없어 보인다. 이달부터 소임을 맡은 정현 스님이 마침 서울을 찾았다. 22일 인사동의 한 찻집에서 그를 만났다. 지난해 12월 21일 오후 2시. 대구교도소에서 작은 ‘법회’가 열렸다. 30여 명의 무기수들이 강당을 메웠다. 주위에는 총을 든 교도관들이 빙 둘러서 있었다. 정현 스님은 “남을 원망하지 마세요. 대신 자신의 허물을 찾으셔야 합니다”라며 구성지게 노래를 한 곡조 불렀다.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앓을 사 그릇될 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우~름이 가아~득”하는데 수인들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스님은 “여러분의 참회하는 마음이 눈물이 되어서 흐르는 겁니다”라고 했다.

 대구교도소와 경주교도소에서 정현 스님은 ‘어머니’로 통한다. 1978년부터 지금껏, 꼬박 30년 동안 교도소 법회를 열고 있다. 매월 첫째, 셋째 금요일에 스님은 교도소를 찾는다. 특정한 단체의 활동도 아니고, 크게 뒤를 봐주는 이도 없다. “그냥 주머니 털어서 사탕 사고, 과자 사고, 과일 사서 찾아갑니다.”

 대구교도소에는 스님의 ‘양자’도 있다. 올해 서른 여덞 살이 된 사형수다. “그 아이가 스물일곱 살일 때 ‘아들’로 삼았죠. 처음에는 서먹했죠. 두번 째 만날 때 ‘내 아들아, 잘 있었나’라며 꼬옥 안았더니 마음을 열데요. 그건 나중에 받은 편지를 보고 알았죠. 요즘도 ‘아들, 우리 아들’이라고 불러요.”

 정현 스님의 ‘교도소 인연’은 엉뚱하게 시작됐다. 77년이었다. 대구 동화사 내원암에 있을 때, 오래된 매화 병풍을 도둑 맞았다. 경찰서에 갔더니 도둑이 잡혀 있었다. 40대 후반의 두 남자. 낮에 절에서 미숫가루를 얻어먹고 간 이들이었다. 스님은 “아이가 몇잉교?”라고 물었다. 한 명은 둘, 또 한 명은 셋이라고 했다. “어떡할까요?”라는 경찰의 물음에 스님은 훈방 조치를 청했다.

 이듬해 겨울이었다. ‘교도소 법회’가 있다기에 스님은 무심코 따라갔다.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했죠. 도둑도 보통 사람이던데 수형자는 어떨까 싶었죠.” 거기서 스님은 푸른 수의를 입은 수형자들을 봤다. “집에 왔는데 눈물이 막 나데요. 나하곤 아무런 연고도 없는데 말이죠. 그 사람들 슬픈 마음이 내 마음에 와닿은 거겠죠. 정말 참회하듯이 눈물이 마구 나데요.”

 밤이 되자 스님은 방의 보일러를 껐다. 그리고 얼음장 같은 방에서 며칠을 잤다. 결국 몸져누웠다. “수형자는 불 꺼진 방에서 잔대요. 그래서 그 사람들 마음을 알고 싶었죠. 과거생에 제가 사형수의 삶을 살았는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그들에게 꿈과 용기, 희망을 주고 싶었어요.”

 나중에 알았다고 한다. 그게 ‘큰 착각’임을 말이다. “처음 10년은 이렇게 여겼죠. 수형자들은 천하의 잡놈이구나. 그리고 나는 참 거룩한 스님인가 싶었죠.” 그래서 가르치려고 했다. 용기와 꿈, 희망을 말이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자 보이데요. 저 사람들과 내가 동등하구나. 참으로 동등하구나. 이게 정말로 둘이 아니구나. 부처님 말씀대로 사형수와 내가 법의 성품에서 동등하구나.”

 20년에 또 10년이 흘렀다. 정현 스님은 “30년이 지나서야 내 업이 녹는 게 느껴졌다”고 했다. “업이 녹으니 보이데요. 수형자들이 진흙 속에서 핀 연꽃이구나. 이 사람들이 부처로구나. 정말 살아있는 부처구나. 그때 깨달았죠. 제가 잡놈들을 가르친 게 아니더군요. 그 사람들이 저를 가르쳤더군요. 공덕은 그런 식으로 돌아오데요.”

 스님의 월급은 많지 않다. 요즘도 정현 스님은 월급의 반 넘게 ‘뚝!’ 떼서 교도소를 찾는다. 아는 사람 몇몇이 약간의 돈을 보태기도 한다. “옛날에는 제가 ‘슬픈 마음’으로 교도소를 찾았죠. 그런데 이젠 다르데요. 정말 부처님을 찾는 심정으로 사탕 들고, 과자 들고 찾아갑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쁜 마음’이겠어요. 제가 수형자에게 꿈과 희망, 용기를 준 게 아니더군요. 그 사람들이 제게 그걸 준 겁니다.”

 정현 스님도 ‘사형 선고’를 받은 적이 있었다. 84년 울진 불영사에서 동안거를 날 때였다. 단체로 간염 검사를 받았는데 의사가 “두 달 밖에 못산다. 격리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결국 선방에서 대중공사(大衆公事·모든 스님들이 참석해 승가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자리)가 열렸다. 결론은 “죽어도 같이 죽자”였다. 그래서 안거를 계속했다.

 “동안거가 끝나기 전에 죽을 수도 있었죠. 그렇게 죽기로 작정을 했었죠. 정말 백척간두에서 한 발 내딛는 심정으로 수행했죠. ‘나는 이생에서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 한철 공부가 스님에겐 ‘평생 양식’이 됐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왜 해인사에 첫 비구니 포교국장이 등장했는지 말이다. 정현 스님은 여고 2학년 때 출가했다. 할머니의 죽음을 겪고나서다. 그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글귀가 가슴을 쳤다고 한다. ‘꽃은 피어도 곧 지고, 사람은 나도 이윽고 죽는다. 이 허무한 법칙은 생명 있는 것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스님은 “사형수만 죽는 게 아니다”고 했다. 우리 모두가 죽는다고 했다. 그러니 잘 죽기 위해선 잘 살아야 한다고 했다.
 

글=백성호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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