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종수시시각각

‘하면 된다’ 정신의 부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그동안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았던 일이 부지기수다. 공무원들은 많은 규제를 풀 수 있는데도 풀지 않았고, 기업은 더 많은 투자를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더 열심히 가르칠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았고, 젊은이들은 어렵고 힘든 일자리를 외면했다. 그러는 사이 우리 사회는 알게 모르게 맥이 빠져버렸다. 무얼 새롭게 해보겠다는 진취적인 기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엔 무사안일과 현상유지의 타성이 들어섰다. 섣부른 이념을 앞세운 아마추어 정권이 도처에서 설익은 실험을 벌이는 동안 무기력증과 냉소주의가 우리 사회에 전염병처럼 번졌다. 그러곤 정권이 바뀌기만을 기다려오지 않았던가.

대불단지의 전봇대 이전은 이런 타성을 깨는 신호탄이다. 그동안 그저 그러려니 체념했던 일들이 실은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았던 일이라는 각성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5년간 버티고 서 있던 전봇대가 한순간에 간단히 뽑혀나가는 장면은 한동안 잊고 지냈던 우리 사회의 미덕 하나를 일깨워준다. 바로 ‘하면 된다’는 정신이다. ‘하면 된다’ 정신이야말로 개발연대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의 전 과정에서 우리나라를 지탱하고 이끌어 온 힘이다. 맨바닥에 공장을 일으켜 세우고, 쓰레기통에서 민주화를 이루어낸 저력이다. 지금이야말로 무기력증과 냉소주의를 털어버리고 ‘하면 된다’는 희망과 도전의 정신을 되살려야 할 때가 아닐까.

사실 지난 10년간은 ‘하면 된다’ 정신이 철저하게 매도된 세월이었다. 이른바 민주화 세력은 ‘하면 된다’를 군사독재정권의 무지막지한 철권통치 방식이자 개발연대의 철 지난 구호로 치부했다. 좀 안다는 사람들은 ‘하면 된다’를 무식한 장사꾼의 천박한 저돌성쯤으로 보고 무시했다. 그러나 ‘하면 된다’정신이야말로 한국인의 피에 면면히 흐르는 특질 가운데 하나다. 이어령 선생은 박우희 선생과 함께 쓴 『한국의 신자본주의 정신』에서 한국 문화의 특질을 ‘한(恨)풀이’와 ‘신바람’이라고 했다. 한국인은 한이나 시름을 풀면 신바람이 나고, 일단 신바람이 나면 없던 힘도 절로 솟는다는 것이다. 신바람이 뭔가. 신명이 나서 일을 하는 기운이다. 무언가 함께 해보자는 의욕이요, 해보니까 되더라는 자신감이다. ‘하면 된다’는 바로 신바람의 구체적·실용적 표현이다. 도전과 긍정의 선순환을 불러오는 마법 같은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다.

‘하면 된다’ 정신은 서구의 근대 경제학에서도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 하비 라이벤스타인은 조직 운영의 효율성이나 개인의 열성이 경제적 성과의 차이에 더 크게 작용한다는 ‘X-효율성 이론’을 도입했다. 똑같은 여건에서도 신바람이 나서 일하는 조직은 X-효율성이 높고, 결과적으로 성과도 더 크다는 것이다. 잘나가는 회사와 망해 가는 회사를 가 보라. 직원들의 눈빛부터 다르다. 외형이나 수치만으로 측정할 수 없는 기운의 차이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새 정부의 출범을 앞둔 마당에 나라 안팎의 경제여건이 썩 좋지 않다. 세계경제는 침체가 예상되고, 그 여파가 국내에도 밀려올 것이다. 그러나 여건이 나쁘다고 지레 겁을 먹고 주저앉을 필요는 없다. 이럴 때일수록 ‘하면 된다’ 정신이 절실하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그 기운이 감지되고 있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