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말로 내가 패션계에 영원한 안녕을 하기에 완벽한 때”라며 은퇴를 선언한 디자이너 발렌티노 가라바니.
거장의 퇴장
나이 75세가 되던 지난해 브랜드 ‘발렌티노(Valentino)’는 45주년을 맞았다. 그러던 그가 유명 인사 300여 명을 초대해 화려한 축하 파티를 열고는 한 달 뒤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지금이야말로 내가 패션계에 영원한 안녕을 하기에 완벽한 때”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는 이달 파리에서 열릴 오트 쿠튀르(고급 맞춤복) 컬렉션을 마지막으로 패션계를 떠난다. “나는 발렌티노를 입은 여성이 방에 들어섰을 때 모든 이가 돌아서서 그녀를 쳐다보며 감탄하고 숭배하길 원한다. 내가 생각하는 패션이란 아름답고 우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 인터뷰에서 “미니멀리즘(극도의 절제주의)과 그런지 룩(grunge look·‘쓰레기 같다’는 뜻으로 옷을 겹겹이 입거나 일부러 찢어지게 만들어진 스타일)이 유행했을 때 디자이너로서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고 말한 그는 “그런 유행은 여성 모독”이라고 주장했다. ‘노병’의 은퇴는 2007년 말미 패션계의 큰 화제였다.
그의 은퇴는 1950년대부터 패션계를 주름잡던 마스터들-크리스찬 디올, 이브 생로랑,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위베르 지방시, 피에르 가르댕, 에마뉘엘 웅가로 그리고 발렌티노 가라바니-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분명히 알리는 마지막 괘종 소리다. 이 마스터 리스트 중 반 이상이 이미 고인이 됐다. 발렌티노를 끝으로 나머지는 모두 디자이너로서의 활동을 접었거나 뒷전으로 물러났다. 그보다 두 살 아래인 조르조 아르마니 역시 최근 뾰족한 후계자 없이 자신의 브랜드를 인수해 줄 거대 기업을 찾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아르마니는 자신의 후계자를 거론하는 일조차 달가워하지 않는다.
발렌티노의 은퇴는 패션계가 더 이상 디자이너들의 판타지로만 이뤄지는 세계가 아님을 암시한다. ‘디자이너는 죽었다’고 얘기하는 평론가까지 있다. 실제로 질 샌더, 헬무트 랭, 마틴 싯봉 같은 브랜드는 현재 디자이너 없이 이름만 남았다. 자신의 이름으로 설립한 브랜드가 그것을 소유한 기업과 뜻이 맞지 않아 이름만 남기고 떠난 경우다.
저무는 브랜드를 10년 뒤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탈바꿈한 구찌는 그래서 눈여겨볼 만하다. 구찌는 수퍼스타급 디자이너 톰 포드 대신 상대적으로 무명인 디자이너들을 등장시켜 최근에는 ‘Gucci by Gucci’라는 의미심장한 향수까지 내놓았다. 디자이너의 유명세보다는 브랜드의 정체성을 더욱 앞세우겠다는 작전이다.
디자이너 1인의 독창적인 능력으로 브랜드가 클 수 있었던 50여 년 전과 지금은 다르다. 브랜드 대부분의 주인은 거대 재벌이다. 패션 디자이너들의 재능에 의존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하나라도 더 히트 백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 어떤 스타 마케팅이나 어떤 문화 마케팅을 하는 게 효율적인지를 판단하고 철저히 기획하는 브랜드 리딩의 시대가 온 것이다.
국내도 예외는 아니다. 디자이너 강진영·윤한희 ‘오브제’가 얼마 전 SK네크웍스에 전격적으로 인수합병됐다. 뉴욕에 진출한 여성복 브랜드인 ‘Y&Kei’와 ‘Hanii Y’, 국내 브랜드 오브제와 오즈세컨, 수입 브랜드인 클럽 모나코 등을 포함해 1000억원대의 연매출을 올리는 회사다. SK네트웍스에 지분 54%를 넘긴 부부 디자이너인 강진영·윤한희씨는 앞으로 디자인 업무만 담당하게 된다.
이런 흐름에 대해 ‘디자이너는 일에 전념하고 경영은 전문가들이 한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브랜드를 소유한 기업이나 경영자들이 디자이너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지지해 줄 때 제대로 빛날 것이다. 디자이너의 시대는 가고 브랜드의 시대가 오고 있다.
강주연 패션잡지 엘르 부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