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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한국현대사>4.개화파 그들은 누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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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개화파는 시대의 선각자인가,외세의 앞잡이인가.오늘의 시점에서근대화의 주도 세력으로도 평가받는 개화파가 당시 일반 대중의 눈에는 왜「일본의 앞잡이」로 비쳐졌을까.그들의 시각에도 어느 정도 수긍할 만한 점이 있다면,개화파는 어떤 이 유에서 외세 의존적 태도를 취했을까.
개화파에 대한 평가가 연구자에 따라 엇갈리게 나타나는 것도 바로 개화파의 그와 같은 태도 때문이다.
신용하(愼鏞廈.서울대)교수는『개화파가 구국(救國)의 목표와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일본의 힘을 빌리려고 한 실수를 범하기는했지만,당시의 역사적 조건과 역사발전 단계에서 민족의 시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가진 세력은 개화파뿐 이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유영익(柳永益.한림대)교수도『개화파가 일시적으로 일본에 의존하려 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그들은 여러모로 자주.자존(自尊)의 태도를 견지하려고 했으며,역사를 변혁하려는 창조적소수자로서의 잠재력을 갖춘 애국자였다』고 주장한 다.
이에 반해 일부 학자들은 개화파를 친일파(親日派)내지 일본의앞잡이라고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신국주(申國柱.동국대)교수는『개화파는 정권욕에 사로잡혀 민족주체성을 망각한채 일본과 손을 잡은 전형적 친일파』라고 단정하면서『개화파가 마치 우리나라 근대화의 선구자로 미화(美化)되는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邊健太郎)도『갑신정변(甲申政變.1884년)은 지배층 내부의 정권쟁탈전에 불과하다.김옥균(金玉均)일파가 갑신정변에서 한 역할은 개화 정신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앞잡이로서 행동했다.따라서 나는 그들을 개화파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혹평한다.
이와 같은 상반된 평가속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일부 학자들은 개화파가 외세 의존적 태도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선각자로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일본에 대한 개화파의 인식과 그들이 설정했던 시대적 목표등을 올바로 고찰할 때만이 가능하다.
개화파가 일본의 발전상을 알게된 것은 승려 이동인(李東仁)을통해서였다.그는 일찍이 일본을 비공식적으로 왕래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명치유신(明治維新)이후의 일본 사회 변화를 익히 파악하고 있었다.
개화파의 핵심 인물인 김옥균은 중인(中人)출신의 한의(韓醫)로서 불교에 조예가 깊은 유대치(劉大致)의 소개로 이동인을 알게 되고,다시 그를 통해 일본에 관한 여러가지 지식과 정보등을얻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개화파의 주역들은 속속 일본을 방문해 일본과 세계의 움직임을 직접 목격하고,일본의 비약적 발전에 깊은 감명을받았다. 개화파는 일본 방문시「게이오 기주쿠(慶應義塾)」의 창설자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로부터 커다란 사상적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는 김옥균.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유길준(兪吉濬).서재필(徐載弼)등 개화파 주역들에게 서양의 발전상을 소개하고,진정한 발전을 위해서는 단순히 서양의 기술만 받아들여서는 안되며,사고(思考)나 생활의 근저로부터의 개혁이 필 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개화파가 당시 받은 충격이 어떠했는지는 박영효의 다음과 같은실토에 잘 나타나 있다.
『일본은 명치유신의 대개혁을 단행하던 때라 상하가 결속하여 내치외교(內治外交)에 국운(國運)은 날로 융성하여 가는 판이었다.「우리나라는 언제나」하는 조급한 마음이 일어나는 동시에 개혁의 웅심(雄心)을 참으려 하여도 참을 수 없었다 .』 신복룡(申福龍.건국대)교수의 주장처럼『개화파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등 명치공신(明治功臣)들처럼자기들도 국가 중흥의 기둥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이제 개화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뚜렷해졌다.그것은 다름아닌일본식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룩하는 것이었다.그들에게 있어 일본은 선망의 대상이자 추구해야 될 절대선(絶對善)이었다.
개화파로서는 일본을 모방함에 있어 주저해야 될 아무런 이유가없었다.어떻게 해서든 일본과 같은 발전을 이룩하는 것이 중요했다. 만약 일본의 도움을 받아 조국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 수만있다면 그들에겐 더 바랄 나위가 없었다.때문에 그들은 조금도 거리낌 없이 일본을 끌어들여 갑신정변이라는 쿠데타를 단행할 수있었다. 일반 대중의 눈에 자신들의 일본 의존 행위가「외세의 앞잡이」로 비쳐지는 것은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그들에게 중요한것은 거사(擧事)의 성공을 통한 정권 장악과 그 후의 개혁 추진이었지 그들의 행위에 대한 일반 대중의 이해가 아니었 다.
서재필은 50년의 세월이 지난 1935년에 일반 대중을 설득해 그들을 조직화 하지 못한 것이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임을 다음과 같이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중의 조직과 훈련 있는 후원없이 다만 몇사람의 선각자만으로 성취된 개혁은 없다.이는 마치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것과 같다.』 아마도 개화파는 거사가 성공하고 시간이 흐른다면 일반 대중도 언젠가는 자신들의 외세 의존적 태도를 이해해 주리라고 믿었는지 모른다.선각자는 자기들이사는 시대보다 훨씬 앞선 시대를 사는 것이기에 고독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자위했 을 가능성도 있다.
***外勢개입의 빌미 그러나 개화파의 외세 의존적 태도는 또다른 외세를 조선에 불러들이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일부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일면 타당한 면도 있지만,개화파의 의도와 동기를 무시한 결과론적 해석일 수 있다.
개화파가 일본에 의존한 것은 식민지화를 전제로 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개화파는 분명히 꿈이 있었다.그 꿈은 부국강병이었다.개화파가판단하기에 부국강병이란 강자만이 살아 남고 약자는 먹힐 수밖에없는 냉혹한 국제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었다.
또한 그것은 강자로 발돋움하여 세계화 대열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돌파구이기도 했다.
바로 이와 같은 꿈의 좌절이 조선을 식민지로 전락시킨 주요 원인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개화파는 그 시대의 선각자임에 틀림없다.설령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이 무모하고 거칠었을는지 몰라도 자신의 꿈을 현실속에서 과감히 펼치기 위해 결단을 내린행동하는 실천가로 개화파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 다.
***요지**** 1.개화파의 꿈은 부국강병이었다. 그꿈은 생존의 방안이자 세계화대열에 참여할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2.개화파는 명치유신 이후 일본의 비약적 발전상을 묵도하고 일본을 조선의 발전 모델로 선택했다.
3.개화파는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요,행동하는 실천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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