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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왜 그래.희수 넌 유럽에 가도 되고 난 용호도에도 못간단 말이야?』 내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희수는 소라와 나를 번갈아보면서 눈치를 살폈다.그러자 소라가 희수를 흘기면서 그랬다. 『걱정하지 마.달수 건드리지 않았으니까.』 『뭐라구…? 계집애들이 못하는 소리가 없어.』 난 기가 막혀서 털털 웃었는데,희수와 소라는 뭐가 그리도 우스운지 허리를 잡고 킥킥거렸다.
「건드린다」는 거하고 「하는」거하고가 연상을 통해 구체적으로 연결되니까 아주 야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게다가 소라도 나하고같이 자는 장면을 한번이라도 상상해봤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참으로 민망해서 표정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어야 하는지 갑자기 막막할 지경이었다.
우리는 거기서 한 시간쯤 더 수다를 떨다가 헤어졌다.소라와 버스정거장에서 먼저 헤어지고 희수와 나는 지하철역으로 계단을 내려서서 가다가 희수가 불쑥 말했다.
『그 섬에서… 정말 아무 일 없었던 거지.어쨌든 넌 못했을 거구….』 『야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니.내가 뭐 고잔지 알어.』 『그럼…』희수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소라하고 그랬다 이거야?』 『섬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않았어.제발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구.희수씨 전 사실 거의 숫총각입니다.이런 말하는 거 익숙하지가 않아요.』 『거의 숫총각이라구? 하여간 남자들은 웃겨.거의 숫처녀라는 말은 인정해주지않잖아.』 지하철역 구내의 침대광고가 눈에 들어왔다.〈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를 보다가 내가 그랬다.
『침대를 험하게 쓰는 부부일수록 그 가정이 화목합니다.튼튼한침대는 화목한 가정의 필수품입니다.이게 더 괜찮지 않니.』 『XX침대는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이건 어때.』 희수와 나는 침대광고 앞에 서서 낄낄거리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넌 나하고 할 수도 있었어.이 바보야.』 나는 희수의 말을못들은 척하고 얼마쯤을 걷다가 말했다.
『그런 거에 대해서 너무 말을 많이 하고 나면 나중에 진짜로할 때 오리혀 싱거워질 수도 있대.자칭 도사라는 선배가 그러더라구.』 그러자 희수도 내 말을 못들은 척 아무 반응이 없었다.그러니까 희수는 내 말을 경청한 셈이었다.
내가 집으로 가는 골목길에 접어든 건 열 시도 넘어서였을 것이다.모퉁이를 돌아서 우리집 대문이 빤히 보이는 데에 이르렀을때였다.저만치 보안등 아래 쪽에서 갑자기 여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가 나하고 반대쪽의 골목길로 사라지는 것 이 보였다.여자가 한번 나를 흘끗 뒤돌아보고는 황급히 사라졌다.하기야 여자들은,밤길의 저기에 걸어오는게 단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몸을 숨겨야 하는 세상이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집으로 들어섰고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고 침대에 누웠다.한동안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가나는 퍼뜩 몸을 일으켜 세우고 마당으로 나갔다.그리고 담장 너머로 골목길을 내다보았다.텅빈 길에는 아무도 보 이지 않았다.
하기야… 그럴 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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