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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사람 심수봉씨 15년만에 회고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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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79년「10.26」당시 궁정동 안가「최후의 만찬」자리에서 박정희(朴正熙)대통령 시해현장을 목격했던 가수 심수봉(沈守峰)씨가 15년만에 말문을 열였다.沈씨는 28일 나올 수기『사랑밖엔난 몰라』(문예당刊.전 2권)에서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이 朴대통령에게『각하,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또 차지철(車智澈)경호실장에게『버러지 같은 놈』이라고 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회고했다.회고록 중에서「10.26」에 관련된 부분을 요약한다.
[편집자註] 79년10월26일 아침 나는 한 남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약속장소인 내자호텔에 나갔다.검은색 관용차가 미리 와 있었다.뒷좌석에는 신재순(申才順.당시 H대 재학중)씨가 기다리고 있었다.차는 5분만에 궁정동에 도착했다.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리다가 방으로 안내됐다.대통령은 리모컨으로 TV채널을 옮기는데 열중하는 것 같았다.車경호실장,김계원(金桂元)비서실장,金부장이 함께 있었다.분위기가 몹시 무거웠고 특히 金부장 얼굴이 경직돼 보였다.
TV 오후 7시뉴스가 시작됐다.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이어 내한한 미국 국방장관이 신민당(新民黨)총재직을 박탈당한 김영삼(金泳三)씨를 당수자격으로 찾아갔다는 보도가 나왔다.그 순간 대통령은 퉁명스런 표정으로『야당 당수는 무슨 야당 당수야.무슨소리를 하고 있는거야…』라며 TV를 꺼버렸다.
대통령은 분위기를 바꾸려는듯 내 이름을 물어보고는『어디,자네노래나 한번 해보지』라고 했다.내가『그때 그사람』『눈물젖은 두만강』『황성옛터』등 세곡을 부르자『다음 노래를 부를 사람은 자네가 지목하게』라고 말했다.나는 표정이 가장 밝 은 車실장을 지목했다.
그때 한 남자가 들어오더니 金부장에게 귓속말을 건넸고 金부장이 따라 나갔다.아무도 그들의 움직임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미스申은『사랑해 당신을』을 불렀는데 朴대통령도 긴장이 풀리는듯 따라 했다.金부장이 다시 돌아와 자리에 앉을 때까 지 노래는 계속됐다.
바로 그때.『짜식,넌 너무 건방져!』라는 소리와 동시에「탕!」하는 짧고 급격한 천둥소리같은 것이 들렸다.『어,피!』車실장이 소리쳐 보았더니 그의 오른쪽 손목 아랫부분에 구멍이 뻥하니뚫려 있었다.金실장이 벌떡 일어나더니 마치 줄행 랑을 놓듯 급히 뛰어나갔다.
대통령은 허리를 곧추 세우고 손을 양무릎 위에 얹은 정자세로지그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흡사「이것들이 또 이 짓들이구나」못마땅해 하는 모습이었다.
다음 순간 金부장이 대통령 쪽을 향해 총을 겨눈채 뒷걸음치듯일어나며 2~3m거리에서 대통령의 가슴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대통령은 정자세를 흐뜨리지 않았다.
金부장은 다시 한번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이었다.車실장이 일어서서 어이없는듯『저사람 왜 저러지』라고 중얼거리며 화장실로 들어갔다.그순간 방안 조명이 모두 꺼졌다.
金부장이 큰소리로 외쳤다.『야!불 켜.』그때『괜찮으세요.』미스申의 말이 들렸다.『음,괜찮아.』대통령의 대답이었다.車실장이방으로 뛰어들어오더니 급박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각하,괜찮으십니까.』『음,나는 괜찮아.』대통령은 단호하게 또박또박 대꾸했다 .車실장이 경호원을 부르는듯 다시 나갔다.
대통령 목에서「…크르륵…크르르륵…」가래가 끓어오르는듯 기분나쁜 소리가 들렸다.나는 반사적으로『괜찮으세요?』하고 물었다.대답이 없었다.불현듯 대통령이 죽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무서웠다.그러나 대통령을 두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정말 괜찮으신 거예요?』물었으나 역시 대답은 없었다.
대통령을 부축해 일으켰다.새털처럼 너무나 가벼웠다.그분 뒤에 뭔가 짙고 검은 것이 번들거렸다.나도 모르게 손을 내뻗자 물컹했다.질펀하게 고여있는 대통령의 피였다 .
순간 나는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정말 맞았구나,맞았어.대통령이 총에 맞았어.』나는 경련을 일으키며 미친 여자가 울부짖듯소리쳤다.『누구 좀 도와주세요,아무도 없어요? 누구좀 와달란 말이에요.』 얼마나 지났을까.갑자기 불이 켜지고 車실장이 뒷걸음질로 방안으로 들어섰다.바로 코앞에는 金부장이 권총을 겨누고있었다.車실장은 절망적인 시선으로 사방을 급히 살피다가 방 한쪽에 놓여있던 탁자를 집어들고 金부장에게 돌진했다.金부장이 뒤로 몇걸음 물러서면서 방아쇠를 당겼다.기껏 2m도 안되는 거리였다.「탕!」첫발은 탁자에 맞은 것 같았다.
계속해서 車실장은 탁자로 金부장을 후려치려했다.그래도 金부장은 탁자를 이리저리 피해가며 연달아 총을 쏘았다.
車실장은 총알을 맞고 퉁기듯 뒤로 나자빠졌다.金부장은 곧장 우리가 앉아 있던 식탁으로 돌아왔다.내품에 안겨 있는 대통령의머리에 총구를 겨누었다.50㎝도 채 안되는 거리였다.이미 대통령의 눈은 감겨 있었다.순간 나도 눈을 감아 버 렸다.
「철컥!」또다시 불발이었다.그러자 金부장은 방안에 들어와 있던 박선호과장으로부터 다른 권총을 넘겨받았다.내 상체가 바깥쪽으로 쓰러지는 순간「탕!」하고 총소리가 방안을 울렸다.그때 눈앞에 펼쳐지던 모습은 지금도 차마 글로 옮길 수 없을 정도로 처참 그 자체였다.나는 동물적인 본능으로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왔다.방밖 복도로 나오니 벽을 향해 등을 보이고 있는 김계원비서실장이 눈에 들어왔다.
또 얼마가 지났을까.『각하 괜찮으십니까? 각하,괜찮으세요?』비서실장의 목소리였다.바로 옆방에선듯 똑똑하게 들렸다.어이가 없었다.그는 첫번째 총소리가 울리자마자 도망치듯 방밖으로 빠져나간 사람이었다.그건 연극이었다.
역겨웠다.『조심 해 모셔.
업어!』비서실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사람들의 어지러운 발자국소리 뒤에 문이 열리며 미스申이 내 방으로 들어섰다.
『저것들이 다 짜고서 저러는 것 같아요.그렇죠?』미스 申은 끔찍한 공포 속에서도 침착성을 잃지 않았다.그 와중에서도 자기가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나왔고,車실장이 아직 살아 있길래 부축하려다 이 방으로 보내졌다는 말까지 했다.밖에서 는「타-타-타-타-타」총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렸다.아마 「확인사살」때 났던총소리였던 것 같다.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공포의 시간.한 20분 정도 지났을까.박선호과장이 나타났다.
朴과장은 『놀라셨죠? 고생들 했습니다』라며 우리를 어느 별채로 안내했다.『당분간 여기서 있었던 일은 비밀로 하고 기다리세요.일이 잘되면 두 분에게도 상이 있을 겁니다.돌아가셔서 연락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십시오.』그는 사례비가 든 봉투를 나눠준뒤 별채 현관앞에서 우리를 차에 태워주고 헤어졌다.
차에 타서도 불안은 여전했다.금방이라도 누군가 뒤에서 덜미를낚아챌 것 같았다.빨리 차에서 내리고 싶을 뿐이었다.내자호텔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횡단보도에서 내려 달라고 했다.우리는 뒤도 안돌아보고 차에서 뛰어내렸다.「아!이 제야 벗어났구나」하는 안도감이 온몸을 쓸어 내렸다.
***합수부 발표 달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지금까지 정설로 돼 있는 당시 합동수사본부 발표는 틀린 부분이상당히 많다.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주흥이 계속되는 동안朴대통령이『김영삼이를 구속해서 기소하라고 했는데 말려서 안했더니 역시 좋지 않아』라고 하자 김재규정보부장이 『각하,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라고 반론을 제기하며 말다툼을 벌였다는내용이다.
또 金부장이 김계원비서실장의 팔을 치며『대통령 각하를 좀 똑똑히 모십시오』라며 권총을 빼들었고,첫발은 『이 버러지같은 놈』이라 외치며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쏘았다는 것도 거짓말이다.그런데 왜 그 거짓말이 정설로 되었을까.합수부의 증 인조사과정에서 미스申은 그 내용이 틀렸다는 사실을 지적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찌됐든 대통령과 金부장의 대화는 그 자리에서 없었다.김계원실장에게 한 말도 없었다.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려 유명해진 말 「버러지같은 놈」은 완전한 창작이다.얼마전 미스申이 『그곳에 그녀가 있었네』라는 책에서 그때 사건을 털어 놓았지만 나는 마음이 편칠 않아 읽지 않았다.그런데 남편이 읽고서는 이미 세상에 알려진 내용뿐이라고 말했다.그 부분에 대해서만은 미스申까지도 사실과 다르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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