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42. 첫 해외 연주

중앙일보

입력 2007.12.19 20:35

업데이트 2007.12.20 0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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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미국 호놀롤루 연주회 때 안내 프로그램에 실린 필자 사진.
1965년은 나의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해로 꼽을 수 있다. 한국에서도 가야금 연주회가 별로 없었던 때에 외국에서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기가 한참 상승세를 타고 있던 이즈음 하와이에 동서문화센터(East-West Center)가 설립됐다. 서양과 동양의 문화 교류를 돕는 일종의 문화원인데 여기에서 매년 ‘금세기 음악 예술제(Music and Arts Festival of This Century)’를 열었다. 하와이에서 가장 떠들썩한 이 축제는 음악을 중심으로 무용 공연, 미술 전시도 한 달 동안 함께 진행되었다.

여기에서 동양 작곡가로는 유일하게 나를 초청한 것이다. 동양과 서양에서 한 명씩의 작곡가를 뽑아 만나게 하는 프로젝트에 내가 선발된 것이다. 내가 작곡을 시작한 것이 62년이었다. 작곡 경력이 3년에 불과한 29세의 작곡가를 불렀다는 것에 참으로 감격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국악을 백안시하는 분위기여서 외국의 초청이 더욱 고마웠다. 김포공항에서 처음으로 미국행 비행기를 타면서 ‘내가 어떻게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에까지 가서 연주를 한단 말인가’ 하고 생각했다. 믿기지 않았다. 호놀룰루에서의 아파트 생활 역시 참으로 신기했다. 난생 처음 슈퍼마켓에서 장보기도 했다. 나의 서투른 아파트 생활은 한 달간 계속됐다. 당시 서울에는 아파트나 슈퍼마켓이 하나도 없을 때였다.

65년 4월 호놀룰루에서 두 번 무대에 선 것이 나의 첫 해외 연주였다. 연주를 마칠 무렵이 되니 동서문화센터의 출판국에서 음반을 내자고 했다. 앨범 타이틀은 ‘뮤직 프롬 코리아-더 가야금(Music from Korea-the Kayakum)’으로 했다. 하와이대 콘서트홀이 녹음장으로 결정됐다. 스튜디오에서 하면 자연스러운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콘서트홀은 전혀 색다른 공법으로 지어져 유명했다. 땅에 기둥들을 박고 거기에 건물을 걸어 놓아 홀 전체가 땅에서 30cm 정도 떠 있다. 신기하고 창의적인 건물이었다.

녹음 시간은 오전 1시. 바깥 소음을 막을 방도가 없어 아예 적막한 때를 택한 것이다. 나는 50분짜리 곡을 1시간여 만에 일사천리로 녹음해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땐 힘이 넘쳤다. 국악인은 나뿐이어서 장구 반주도 직접 해야 했다. 일단 가야금 연주를 녹음한 뒤 귀에 이어폰을 꽂고 가야금 소리를 들어가며 장구 반주를 덧입히는 식으로 녹음했다.

내가 작곡한 첫 가야금 독주곡인 ‘숲’ ‘가을’ ‘석류집’을 앞면에 넣고 뒷면에는 가야금 산조를 담았다. 이 모든 곡을 일사천리로 연주해 녹음하니 거기에 있던 기술자들이 놀랐다. 하와이 연주는 나에게 큰 의미가 있다. 이때 연주한 것을 듣고 LA·샌프란시스코·시애틀에서 독주회 요청이 들어왔다. 하와이 연주는 한국을 방문했던 미국 음악가들의 추천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뒤 공연은 내 연주를 듣고 싶어 하는 순수한 청중으로서의 외국인이 많아졌다는 뜻으로 다가와 뿌듯했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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