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이 된 그는 초인이었다"

중앙일보

입력 2007.12.17 04:57

업데이트 2007.12.17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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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피아니스트인 남편은 영화에, 영화배우인 부인은 음악에 전문가 못지않은 지식과 관심이 있다. 백건우씨의 이번 베토벤 도전에서 부인 윤정희씨는 남편의 한 음 한 음을 함께했다. 이 둘은 서로를 천생연분이라고 부른다. [사진=최승식 기자]
8회 평균 유료 관객 점유율 90%, 전 공연에 참석한 청중 600여 명. 피아니스트 백건우(61)씨가 8일부터 14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베토벤의 소나타 32곡 전곡을 연주하며 세운 기록이다. 그가 무대에 올라있는 동안 부인 윤정희(63)씨도 내내 한자리를 지켰다. 남편의 손놀림과 관객의 반응이 모두 보이는 B블록 22열 14번이었다. 32번째 소나타가 끝나자 윤씨는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나는 모두 다 지켜봤잖아요." 수년 동안 베토벤과 씨름하며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한 남편을 '피아니스트 백'이라 칭하는 윤씨가 그간의 소감을 직접 적어 중앙일보에 전했다.

어느 날부턴가 우리 집 곳곳엔 베토벤의 악보와 그에 대한 책들이 널리기 시작했다. 피아니스트 백은 6~7년 전부터 베토벤의 32개 소나타를 좀 더 가까이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베토벤이라는 거장의 삶을 이해했고, 복잡하고 굴곡 심한 그의 삶을 피아노 소리로 그리고 싶어했다. 모닝 커피를 앞에 둔 우리는 신혼 때 찾았던 빈의 베토벤 산책길, 베토벤이 살던 집들을 떠올리며 흥분했다.

피아니스트 백이 연습에 들어가는 건 늘 쉽지 않았다. 화가가 텅 빈 캔버스에 첫 선 긋기를 힘들어하듯, 그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나 보다. 기다리던 내가 장보러 갈 때, 마늘과 배추를 다듬을 때, 집안 청소를 할 때면 어느덧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두세 시간 후 피아노 소리가 멈추면, 2층에서 내려올 그의 모습이 난 궁금해졌다. 하지만 난 애써 모른 척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며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피아니스트 백은 때론 깊은 한숨으로, 때론 웃음 가득한 얼굴로 "된다, 돼! 돼가고 있어. 내가 만들고 싶어하는 베토벤의 음악이 나오고 있어. 해결책은 항상 조그마한 곳에 있다니까!"라고 소리치곤 했다. 이럴 때면 우리는 손을 맞잡고 함께 웃었다. 그는 하루도 베토벤을 떠나지 않았다.

어둡고, 밝고, 또 어둡던 날들…. 음반사 데카와 베토벤 소나타 전곡 녹음을 하기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이런 많은 날이 지난 후였다. 3년 동안 녹음한 CD에 많은 사람이 사랑을 보냈다. 프랑스 국립고등음악학교의 레미 스트리커 명예교수는 그가 녹음한 29번 소나타 '함머클라비어'를 듣고 "듣자마자 시간이 멈춰버리는 듯했다"고 평했다. "그 어떤 피아니스트도 재현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베토벤을 백건우가 그대로 다시 불러냈다"는 것이었다.

앨범을 낸 후 한 번은 내가 아이디어를 냈다. "나 베토벤에게 러브레터 쓸 거야. 괜찮아?"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연애편지를 허락했다. 베토벤에게 어떤 말을 쓸 수 있을까. 마지막 문장만큼은 "We love you(우리는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끝맺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빈에 있는 베토벤의 무덤을 다시 찾아 편지와 함께 피아니스트 백의 소나타 전곡 녹음 CD를 바칠 생각이다. 베토벤과 백건우는 또 대화를 나눌 것이다.

전곡을 녹음한 CD를 만들어낸 것은 꿈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는 7일 동안 매일 여덟 번에 걸쳐 32개의 소나타를 연주한다는 도전을 꿈꾸고 있었다. 보통 연주회보다 8배나 긴 이 연속 연주회는 전에 없던 일로 초인간적 시도다.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피아니스트 백은 그 꿈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이전도, 이후도 아닌 지금 이 순간 꼭 해야 한다. 50년의 연주 생활에서 꼭 지금 느껴보고 싶다"고 했다.

전국 연주의 시작은 중국 광저우에서였다. 청중의 반응이 기대 이상이었다. 11월 15일부터 일주일 동안의 연주가 끝난 뒤 아홉 살짜리 한 아이는 "선생님 음악이 너무 아름답고 음악을 통해 베토벤을 사랑하게 됐다"면서 꽃다발을 전해줬다. 마지막 날 무대 위에는 중국 청중이 놓아둔 쿠키와 책, 차(茶)가 한가득 쌓였다. 우리와 헤어지면서 중국 청중들은 "이제 우리는 허전해서 어쩌냐"고 아쉬워했다.

한국인 피아니스트의 도전 소식을 들은 세계 각국의 공연장에서도 베토벤 전곡을 연주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우리는 중국 상하이와 이탈리아.대만의 도시들에서의 연주 스케줄을 잡는 중이다. 32곡의 모든 음을 다시 만들면서 가슴이 쓰렸던 그의 모습을 처음부터 곁에서 지켜본 나는 '흐뭇하다'는 말 정도로는 이 결과를 표현할 수 없다. 그저 농담하듯 "나는 베토벤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당신이 부러워"라고 말하면 남편은 예의 그 빙그레 웃는 미소를 보낸다.

12월 서울 예술의전당, 큰 힘을 주지 않고 피아노를 치기 때문에 근육에 무리가 생긴 적이 없던 남편도 조금 지쳤다. 광저우 공연장 관계자가 "수많은 피아니스트를 봤지만 이렇게 하루 종일 연습만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할 정도로 연습에 몰두했던 그다.

그는 파스 붙인 손으로 매공연이 끝난 뒤 팬들에게 일일이 사인을 했다. 주위의 만류에도 완강했다. "청중들과 만날 시간이 지금밖에 없어. 이렇게 귀 기울여 듣는 청중을 본 적이 있어?"라며.

과연 청중들은 피아니스트의 모든 음을 하나하나 같이 연주하는 듯했다. 매일 2000석 넘는 자리를 채운 이들은 연주자에게 최고의 예의를 다했고, 일부는 눈물을 흘리며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다음날 또 연주를 해야 하는 사람이 40분 넘게 사인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베토벤 꿈엔 청중들과 만나는 이 장면도 어쩌면 들어있었던 것 같았다. 꿈의 시작은 베토벤이었지만, 이 꿈을 완성해 준 것은 바로 청중들이다.

글=윤정희(영화인), 사진=최승식 기자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세계적으로 이 도전에 성공한 피아니스트는 손에 꼽을 정도다. 스튜디오에서 32개의 곡을 녹음하는 것 자체가 큰 이슈가 된다. 테크닉과 음악성, 해석 능력 등 피아니스트의 모든 것을 요구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알프레드 브렌델, 빌헬름 켐프,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등이 전곡 녹음 이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자리를 확고히 했다. 녹음과 함께 연주에도 도전해 성공한 사람으로는 다니엘 바렌보임이 있다. 바렌보임의 전곡 연주에는 3주가 걸렸고, 내년 2월 런던에서 2~28일에 걸쳐 또 한번 전곡 연주를 한다. 백건우씨는 이를 7일로 단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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