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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역사도 한 줄기 노래로 흘러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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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호 06면

‘오페라의 유령’의 지하미궁 장면.

“애무하듯 감싸 안는 음악/ 듣고 느껴, 사로잡는 노래(Softly, deftly, music shall caress you/ Hear it, feel it, secretly possess you)”.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수놓은 명곡들 중 하나인 ‘밤의 노래(Music of the Night)’다. 노랫말 속 ‘애무하듯 사로잡는 노래’란 마치 이 곡을 작곡한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스스로에게 바치는 헌사처럼 들린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 세계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오페라의 유령’ ‘에비타’ ‘캣츠’ 등 뮤지컬 150년사를 뒤흔든 대중적 명작들이 모두 그의 오선지에서 나왔다. 현재 국내에선 최신작 ‘뷰티풀 게임’이 라이선스 공연 중인 데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오리지널 월드 투어팀이 첫 내한 공연을 하고 있다. 그칠 줄 모르는 ‘웨버 열풍’이다.로이드 웨버의 공식 사이트에 따르면 그가 작곡 혹은 제작한 뮤지컬은 모두 16편.

이 중 6편이 국내에 라이선스 혹은 오리지널 공연으로 소개됐다. 특히 2001년 한국 뮤지컬사상 최대 제작비, 최장 공연을 기록한 ‘오페라의 유령’(라이선스)은 브로드웨이에서 직수입한 화려한 무대연출로 관객의 눈높이를 껑충 높였다. 2005년 브로드웨이팀이 들어와 역시 ‘흥행불패’를 기록하면서 한국의 ‘웨버 열풍’은 계속됐다. 2004년엔 ‘수퍼스타’가 최초로 정식 라이선스 공연됐고, 웨버의 또 다른 역작 ‘에비타’도 지난해 처음 라이선스 무대화됐다. 소위 ‘오리지널 투어’로만 소개된 유일한 작품이 ‘캣츠’. 1994년 국내에 처음 소개됐던 ‘캣츠’는 2003년 예술의전당 공연을 비롯, 내한 때마다 점유율 100%를 기록하며 한국 뮤지컬계를 강타했다.

가수 이종용씨가 에수 역을 맡았던 1980년 39슈퍼스타39의 한국 초연 장면

두텁고도 넓은 관객층을 자랑하는 로이드 웨버 뮤지컬은 사실 한국과 인연이 깊다. 요즘도 연말마다 송년을 장식하는 ‘수퍼스타’가 국내에서 초연된 건 1980년. 척박한 토양 속에서 토박이 연출진의 힘으로 무대에 올려진 ‘해적판’ 공연이었다. 소박하지만 열정에 가득 찼던 한국식 ‘수퍼스타’의 초연은 어떠했던가. 미국 브로드웨이와 영국 웨스트엔드는 물론 국내에서도 흥행 보증수표로 통하는 웨버 뮤지컬의 매력은 무엇인가. 그 따뜻하고 역동적인 음악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당시 팸플릿 표지에는 운보 김기창 화백의 그림 ‘예수 물 위를 걷다’를 실었다. 운보가 52년 한국전쟁 때 피란지 군산에서 완성한 ‘예수의 일생’ 연작 30점 중 하나다. ‘성극’ 느낌이 강했던 초연 무대의 분위기가 드러난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국내 초연의 추억-‘서울의 봄’에 피어난‘인간 예수’에 쏟아진 갈채

“오리지널 공연이라…글쎄요. 1971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했던 팀이 와서 공연하지 않는 한 오리지널 공연이 무슨 의미일까요. 외국 제작진과 배우가 와서 영어로 공연하면 오리지낼리티(독창성)가 있는 건가요.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채 맨손으로 만들어낸 그때 그 무대가 우리의 오리지널 아닐까요.”

백발의 노(老)극작가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을씨년스러운 12월의 혜화동 로터리.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이 옛날식 다방의 위층엔 그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공연문화산업연구소가 입주해 있다. 다방에 바둑돌처럼 놓여 있는 손님들 사이에서 이따금 ‘햄릿’ ‘연극열전’ 같은 단어들이 새어 나왔다. 시계추가 지난 세기에서 멈춘 듯한 대학로의 오후다.

원로극작가 김의경(71) 이사장은 요즘 바쁘다. 76년 그가 창설한 극단 ‘현대극장’의 30년사를 집대성하는 책을 준비하고 있어서다. 책의 앞머리 어딘가에 위치할 80년 2월 22일, 극단사에 있어서나 한국 뮤지컬사에 있어서나 특별한 무대가 막을 올렸다.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개막한 ‘로크 오페라 수퍼스타 예수 그리스도’가 그것이다.

지난 12일부터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수퍼스타돔)에선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이하 ‘수퍼스타’)의 오리지널 월드 투어팀이 공연 중이다. 하지만 김 이사장의 자부심 속에 ‘수퍼스타’의 ‘한국 오리지널 초연’은 27년 전 그날이다. “외국에서 화제작이란 것만 알았지 제작진 중에 원작 공연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가진 거라곤 카세트 테이프와 악보뿐이었죠. 가사도 제가 한 달여에 걸쳐 직접 번역했으니까요. 무대 연출부터 배우 연기까지 모두 창작이었죠.”

소위 ‘해적판’ 공연. 저작권 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당시 국내 실정상 원작자와 어떤 접촉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겁도 없이 이런 대형 공연을 기획하게 된 건 창작 뮤지컬 ‘빠담빠담빠담’(1977)이 성공한 데 따른 자신감이 컸다. ‘빠담…’의 헤로인이자 당대 최고 인기가수였던 윤복희씨가 막달라 마리아를 자처했다.

예수엔 ‘너’를 부른 가수 이종용씨가, 유다엔 김도향·추송웅씨가 캐스팅됐다. 헤롯 왕은 ‘후라이보이’ 곽규석 장로, 빌라도 역에는 당시 갓 제대한 유인촌씨와 박상원씨가 선발됐다. 정성조씨가 편곡을, 표재순씨가 연출을 맡았으니 한마디로 당대의 쟁쟁한 ‘선수’들이 총집합한 셈이다.

의기투합의 바탕에는 ‘예수 이야기를 뮤지컬로 올린다’는 의욕이 강했다. 알려진 대로 원작은 예수의 인간적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특히 유다를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을 갈망하는 청년으로 그려낸 파격 스토리다. 이 때문에 미국 초연 당시 기독교인들로부터 보이콧 시위까지 받았다.

하지만 윤복희씨를 비롯, 참여자의 80% 이상이 기독교인이었던 초연 팀은 일종의 ‘성극’으로 갈무리했다. 표재순 연출은 ‘인간 예수’를 그리되 신약성서의 ‘예수전’에 바탕해 무대와 연기를 끌어갔다. 각 교회 성악대가 코러스를 자원하고, 기독교인이 영업하던 ‘호산나 의상실’에서 의상을 제작하는 등 기독교의 지원이 큰 힘이 됐다.

역사적인 개막 1분 전, 모두가 성공을 기원하며 무대에 모였다. 연예인교회 하영조 목사가 기도했다. 추송웅씨가 속삭였다. “나는 원불교 신도인데….” 웃음조차 터지지 않는 긴장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객석은 텅 비어 있었다. 20여 년이 지나 윤복희씨가 비밀스럽게 이유를 털어놓았다.

“그때가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막 ‘서울의 봄’이었잖아요. 당시 권력 실세였던 군부 쪽에서 저한테 와서 노래를 해달라고 했어요. 못하겠다고 했더니, 극장 앞에 전·의경을 배치해 입장을 통제했어요. 이틀 동안 관객이 출연자보다 적었죠.”

그래도 공연은 계속됐고, 병력이 철수한 사흘째 관객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국립극장에서 28일까지 1주일 공연, 3월 5~9일까지 앙코르 무대, 15~17일 대구 공연으로 이어졌다. 80년에만 65일간 126회 공연에 23만여 명이 관람했다. 김 이사장은 “김종필씨와 김대중씨도 와서 보고 제작진을 격려했다”고 회고한다.

당시 공연은 몇 장의 흑백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최후의 만찬’ 장면을 찍은 사진엔 스탠드 마이크가 선명하다. “무대를 둘러가며 6개의 마이크를 세우고, 천장에서 마이크가 2개 내려오는 식이었죠. 요즘 같은 PA 시스템이 어디 있습니까. 문제는 밴드였어요. ‘정성조 밴드’는 순전히 관악기 편성이라 아무리 노래를 힘껏 해도 빵빵 울리는 트롬본·트럼펫 소리에 가사가 객석에 전달되기 힘들었죠.” 김 이사장의 회고다.

아무리 문화적 볼거리가 없던 시대라지만 그렇게까지 객석의 호응이 컸던 이유는 뭘까. “예수를 역사의 희생자로 그린 시각이 당시 정치 상황과 맞물려 카타르시스를 주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무엇보다 배우들의 열정이 대단했죠. 작품을 준비하면서 오후 6시면 모여 통행금지 직전까지 연습했으니까요.”

김 이사장은 81년에야 ‘수퍼스타’의 런던 공연을 봤다. “규모로 따지면 비교가 안 될지 몰라도 작품 질에 있어서는 우리 게 조금도 빠지지 않더군요. 실제로 어느 관객이 나한테 편지를 보냈어요. ‘당신들의 공연을 우습게 생각했었는데, 외국에서 보고 나니 우리 무대가 꽤 괜찮은 공연이었단 걸 알게 됐다’는 내용이었죠.”

현대극장 무대의 차별성은 마지막 장면. 원작에서는 예수를 땅에 묻었지만, 현대극장판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승천하는 식으로 처리했다. 신약성서적인 해석이 두드러지는 결말이다. 현대극장은 이 판본으로 2000년까지 공연했다. 이후 설앤컴퍼니가 웨버 측과 본격 라이선스 계약을 하면서 2004년부턴 국내에도 ‘브로드웨이 버전’이 소개됐다.

한국의 ‘수퍼스타’는 내로라하는 배우·가수들이 줄줄이 거쳐간 무대로 유명하다. 곽은태·조하문·윤도현·남경주·강산에·신성우 등이 예수 혹은 유다 역으로 가창력과 연기력을 과시했다. 초연부터 윤복희씨가 단골 열연했던 마리아는 양금석·박해미·이혜영·최주희 등이 거쳤다.

초연 이후 사반세기. 당시 청소년 공연 때 초롱초롱한 눈으로 응시하던 관객이 장년이 됐다. 추송웅·곽규석 등 고인이 된 이도 여럿이다. 정해년의 끝자락에서 오리지널 ‘수퍼스타’는 한국 관객에게 또 어떤 추억을 남겨주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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