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CoverStory] 내가 찍은 후보가 대통령이 될까요

중앙일보

입력 2007.12.13 15:04

업데이트 2007.12.14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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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명박 후보를 찍은 박상훈 작가, 권영길 후보를 찍은 김동하 작가, 문국현 후보를 찍은 백지연 작가, 정동영·이인제 후보를 찍은 고창수 작가.[사진=권혁재 전문기자]
요즘 길거리 어디서나 마주치는 대통령선거 후보들의 벽보, 한 번쯤 찬찬히 살펴보셨나요?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도산공원 입구, 12명의 후보 사진이 나란히 붙어 있는 벽보 앞에서 회사원들이 이야기합니다. “A씨는 원판보다 너무 잘 나온 거 아냐?” “B씨는 포샵했나봐. 열 살은 젊어 보이는 걸” “근데 이 사진들은 다 누가 찍었지?” “글쎄, 돈깨나 들였겠지?”

 Week&도 궁금했습니다. ‘선거 마케팅의 종합예술’이라 불리는 가로 52㎝, 세로 76㎝짜리 벽보. 과연 어떤 사람들의 손을 거쳐 탄생했을까요. 후보들의 표정과 옷차림, 넥타이 코디, 배경 색과 활자의 크기 등은 어떤 고민 끝에 나왔을까요. Week&이 여러분을 역대 대선 중 가장 긴 6m24㎝ 짜리 17대 대선 포스터 속으로 안내합니다.

글=이영희·홍주연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근엄한 박정희, 활짝 웃는 김대중, 입술 튼 노무현

 떠올려 보라. 권위주의 정권 시절, 포스터 속의 대선 후보들은 하나같이 굳게 다문 입술에, 결의에 찬 눈, 2대 8 가르마로 빗어 넘긴 헤어스타일이었다. ‘선거’도 ‘정치 광고’도 의미가 없던 시절이었다. 카메라의 위치는 대부분 인물보다 낮았다. 아래쪽에서 인물을 올려다보고 찍어 전투적이고, 강한 이미지를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사진=서울시립대학교 박물관 · 중앙일보 자료사진]
‘체육관선거’로 당선된 전두환 전대통령은 벽보 사진이 없다. 시대가 변하면서 사진도 달라졌다. 1987년 13대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는 군인의 딱딱한 이미지를 벗기 위해 온화하게 웃는 모습을 포스터에 담았다. 90년대가 되자 ‘웃는 표정’이 포스터 사진의 대세가 됐다. 97년 김대중 후보의 활짝 웃는 모습을 담은 포스터는 후보의 이미지를 대중친화적으로 바꾸는데 성공했다. 작가군도 다양해졌다. 예전에는 대통령 의전사진 전문가들이 주로 정치인의 사진을 촬영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의전사진 담당이던 ‘란(蘭) 스튜디오’의 김재환 사장이 대표적이었다. 그러다가 점차 패션과 인물사진 전문가들이 가세하기 시작했다. 16대 대선은 인물사진 작가를 대표하는 조세현(이회창), 박상훈(노무현), 김중만(정몽준) 세 사람이 대선 주자 ‘빅3’의 사진을 찍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번 대선은 상황이 또 다르다. 많아진 후보만큼 포스터 사진의 이미지도 각양각색이다. 유명한 기성 작가를 찾아가 사진을 의뢰한 후보가 있고, 널리 알려지지 않은 젊은 작가를 선택해 보다 신선한 이미지를 추구한 후보도 있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이회창 후보는 ‘시간과 경비절약’ 차원에서 유명작가인 조세현씨가 지난 대선 때 찍은 사진을 ‘재활용’ 했다고 밝혔다.

이명박 후보 찍은 박상훈 작가 "시원하게 웃으라고 요구했어요”

 

2000년, 노벨 평화상 수상을 위해 노르웨이의 오슬로를 방문한 이희호 여사는 역대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의 사진과 나란히 걸려 있는 남편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다른 수상자들은 밝게 웃고 있는데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정면을 보는 영 어색한 모습이었던 것. 대통령이 귀국한 후 청와대는 오슬로 노벨평화상위원회에 걸 사진을 새로 만들려고 작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중앙대 사진학과 겸임교수인 박상훈(55) 작가가 정치인 촬영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다.

 “청와대에 들어갔는데 김 대통령의 표정이 영 어두웠어요. 전날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와 영수회담이 있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다더군요.” 회의장을 비워 임시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분위기를 풀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던 중 마침 김 대통령이 97년 대선 후보 당시 한 방송 프로에서 남대문시장에 나가 전대를 차고 ‘골라 골라’를 외치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 방송프로그램의 PD가 저의 제수씨였거든요. 그 인연을 얘기하니까 갑자기 표정이 환해지시더라고요. 덕분에 자연스러운 표정을 얻었지요.” 박 작가는 이 인연으로 지난 대선에선 노무현 후보를 촬영했고, 이번에는 이명박 후보의 포스터 사진을 찍었다. 물론 그는 ‘새벽여행’ 연작, 스타들의 인물사진으로 이미 이름난 작가였다.

 이명박 후보와는 지난달 18일에 만났다. “이 후보가 날카로운 이미지에 포토제닉한 스타일은 아니라” 촬영 전에 고민이 많았다. 사진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이미지는 세련되면서도 지적인 느낌. 그동안 이 후보가 작업복 차림의 ‘건설맨’ 이미지가 강했던 점을 고려해 깔끔한 정장에 열정적인 빨간 넥타이를 골랐다. 촬영 현장에서는 후보 본인이 “웃으면 눈이 안 보인다”며 환한 표정 짓기를 쑥스러워했다. 자신없어 하는 후보에게 작가는 “선거전에 나선 후보가 아니라 이미 당선됐다는 느낌으로 시원스럽게 웃어달라”고 요구했다.

 이번 대선에서 많은 후보의 사진이 ‘내추럴한 화장’에 신경을 썼다. 자연스러운 느낌을 강조하는 것은 지난 대선 때 노무현 후보 사진의 영향도 있다. 당시 박상훈 작가는 ‘포샵’을 조금 더 원하는 선거팀의 요구를 거절했다. 노 후보의 서민적인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피곤으로 부르튼 입술과 이마의 주름 등을 그대로 내보냈다. 후보의 뒤쪽에 태극기 문양이 들어간 것도 파격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태극기’ 하면 촌스럽다는 이미지가 대세였어요. 2002년은 월드컵의 영향으로 태극기의 디자인적 가능성에 주목하던 때였어요. 덕분에 배경 문양이 성공할 수 있었죠.”

 최근에는 TV 광고, UCC 등으로 선거 포스터에 대한 주목도가 많이 줄었다. 그래도 사진 한 컷으로 후보의 이미지를 강렬하게 나타내는 포스터 사진은 ‘선거의 핵심’이라고 박 작가는 말한다. “작가마다 고유의 특성이 있어요. 후보가 원하는 이미지와 작가가 추구하는 예술적 개성이 잘 맞아떨어질 때 좋은 사진이 나오게 되죠.”

정동영·이인제 후보 찍은 고창수 작가"시선처리에 가장 신경 써”

 

후보들은 포스터 사진에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려 애쓴다. 한 작가가 여러 후보의 사진을 맡지 않는 이유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는 한 작가가 두 후보의 사진을 찍는 일이 일어났다. ‘촉박한 시간’ 때문이다. 1번 정동영 후보와 4번 이인제 후보를 함께 찍은 작가는 인물사진 전문가 고창수(57)씨다.

 “이인제 후보가 2주쯤 먼저 왔죠. 정동영 후보는 벽보 부착을 나흘 앞둔 11월 26일 아침에 갑자기 연락을 했어요. 다짜고짜 ‘오늘 점심에 찍으러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시간도 한 시간밖에 없다는 거예요. 보통 포스터 사진이 4~5시간은 걸리는 작업이라 앞이 캄캄했지요.” 정 후보가 부랴부랴 ‘속성’사진을 찍은 것은 등록을 위해 준비해 놓은 정장 차림의 사진이 딱딱해 보인다는 지적 때문이었다. 선거 사진으로는 드물게 ‘빨간 스웨터 차림’이 등장한 이유다.

 정 후보 포스터의 전체적인 컨셉트는 온화한 분위기를 살리는 것이었다. 짧은 시간 내에 자연스러운 웃음을 끌어낼 수 있을지가 열쇠였다. “다행히 카메라에 많이 서 보신 분이라 그런지 메이크업 하는 친구와 전라도 사투리로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 가더라고요.” 고창수 작가가 가장 신경을 쓴 것은 시선처리였다. 기호 1번으로 제일 앞쪽에 붙는 포스터인 만큼 시선을 왼쪽으로 향하도록 해 다른 11명을 바라보는 ‘대장’의 느낌을 살렸다.

 이인제 후보는 ‘동적인 느낌’을 중요시했다. “본인도 긴장감·위기감이 감도는 분위기의 사진을 원하더군요. 기존 포스터 사진의 전형을 벗어난 파격적인 느낌으로 가려 했는데 너무 오버한다는 생각이 들어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고 있는 모습을 선택했습니다.”

 고창수 작가의 고객리스트는 화려하다. 1992년 제14대 김영삼 대통령후보로 시작해 그동안 한명숙 전 총리, 오세훈 서울시장, 김문수 경기도지사, 손학규 의원 등 수많은 정치인이 그를 찾았다. 홍대 앞 스튜디오에 놓인 의자에 ‘국회의원만 100여 명, 대통령도 여럿 앉았었다’고 말한다. 92년 당시 3당 통합으로 지지율이 고공비행을 하던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찍을 때는 ‘베테랑 사진가’로서도 정말 힘들었다. “김영삼 후보가 너무 ‘업’되어 있었어요. 산만하고 정신이 없어 이미 두 명의 사진작가가 촬영을 포기하고 돌아갔다고 하더라고요.” ‘오늘 촬영은 힘들겠다’고 말하며 돌아 나오는 그를 공보팀이 붙잡았다. 그는 김 후보를 빈 회의실에 밀어 넣고 “사진으로 겸손한 모습을 보여줘야 당선된다. 마지막 관문인데 왜 그걸 못하느냐”고 쓴소리를 한마디 했다. 그러고 나서도 조수들이 그의 뻣뻣한 등을 풀어주며 한참이나 자세를 바로잡은 끝에야 겨우 맘에 드는 사진을 얻어낼 수 있었다.

 정치인들은 ‘위에만 있던’ 분들이라 그런지 대개 표정이 근엄하다. 그런 이들도 고창수 작가 앞에서는 얼굴의 근육을 푼다. 그가 살짝 귀띔하는 편안한 웃음을 끌어내는 노하우.

 “막내 딸, 막내 아들 얘기를 꺼내 보세요”

문국현 후보 찍은 백지연 작가 "있는 그대로 보여줬죠”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진작가는 렌즈를 통해 피사체와 교감한다. 백지연(38) 작가는 문국현 후보를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처음 만났다. 하지만 뷰 파인더를 통해 그를 만난 뒤 ‘후원 회원’에 가입할 정도로 지지자가 됐단다. “파인더로 들어오는 모습에서 진실성이 느껴지더라고요. 인물 사진을 많이 찍어봤지만 흔하지 않은 경험이었어요. 사진을 찍고 나서 어떤 삶을 사신 분인가 알아보니 ‘역시’ 싶더군요.”

 문 후보 측은 후보가 가진 ‘딱딱한 교장선생님’의 이미지를 없애고 파격적인 스타일의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젊은 여성 사진작가인 백지연씨를 골랐다. “홍보팀하고 ‘어떻게 하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2대8 가르마를 없애고, 금테 안경도 젊은 느낌의 뿔테로 바꾸려 했죠.” 하지만 워낙 카메라에 익숙지 않고, ‘꾸밈’을 싫어하는 후보의 성격 탓에 이들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고 싶다’고 하니까 문 후보 본인이 ‘가식적인 게 싫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자’고 하더라고요.” 결국 입던 옷에 쓰던 안경, 원래의 헤어스타일로 무난하기 그지없는 포스터 사진을 만들었다. 작가로서는 아쉬웠지만 결국 그런 태도가 ‘후보의 본질을 보여준다’는 생각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단다.

 그동안 여러 정치인·연예인의 사진을 찍었다. 지난 대선에서는 노무현 후보의 예비경선용 사진을 담당하기도 했다. 백 작가는 “요즘엔 정치인들이 연예인보다 더 연출을 잘 한다”고 말한다. “90년대 초반만 해도 책상 위에 슬며시 손을 얹는 정도가 전부였어요. 요즘은 가족들과 이야기하고, 아내와 요리도 하는 등 부드러운 이미지를 살리려 노력해요. 정치인들의 연기력도 점점 좋아지는 것 같아요.”

권영길 후보 찍은 김동하 작가 "텔미춤 추고 놀며 찍어”

 

세 번째 대선에 출마하는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에게는 식상함을 상쇄할 ‘젊고 신선한 느낌’이 필요했다. 그래서 찾아낸 작가가 서른 살의 패션사진 전문가 김동하씨다. “권 후보 같은 경우는 예전 TV토론 등에서 ‘버럭’하고 화를 내는 이미지가 있었잖아요. 그런 딱딱하고 강한 모습을 벗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정식 촬영을 하기 전 개인적으로 만나 자연스럽게 웃는 모습을 스냅 사진으로 찍어뒀다. 후보의 좌측 얼굴이 우측 얼굴보다 잘 나온다는 것, 어떤 순간에 부드러운 표정이 스쳐 지나가는지 등도 촬영 전에 미리 체크했다.

 촬영장의 분위기는 편안했다. “투사적인 이미지를 생각했는데, 현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후보와 스태프가 함께 ‘텔미 춤’을 추면서 재미있게 찍었어요.” 원색의 세련된 넥타이 차림에 ‘짱’하고 위에서 떨어지는 느낌이 나는 접시 조명을 써 정치인보다는 CEO의 세련된 느낌을 살렸다. 적당한 나이가 느껴지되 늙어 보이지 않도록 ‘자연스러운 포샵’에도 신경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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