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진실 나침반’ 쥔 소녀, 절대 권력에 맞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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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와 또 다른 세계가 있다. 판타지영화의 이 같은 대전제는 고스란히 판타지를 보는 이유가 되곤 한다. ‘황금나침반’은 ‘반지의 제왕’을 만들었던 영화사 뉴라인이 내놓은 새로운 판타지 블록버스터. 현실세계는 물론이고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나니아연대기’ 등과 또 다른 거대한 세계를 담고 있다.

일단 ‘반지의 제왕’과 견주는 것은 섣부른 기대다. 원작소설은 꽤 음울하고 심오한 내용으로 알려졌지만, 영화는 독한 맛을 덜어 내 어린 아이도 소화할 만한 무난한 판타지로 만들어졌다. 정교한 이야기보다 화려한 볼거리를 앞세운다. 원작을 찾아 읽고 싶어질 만큼 미진한 대목을 남긴다. 음식에 비유하자면, 잔뜩 속을 넣어 버무렸으되, 김장김치로 두고 먹기에는 숙성이 덜 된 맛이다.

중심인물은 12세 어린 소녀 라라(다코타 블루 리처드). 부모 대신 삼촌인 아스리엘 경(다니엘 크레이그)의 보호 아래 고매한 분위기의 대학 안에서 자랐다. 과학자·탐험가인 아스리엘 경은 ‘더스트’라는 물질을 통해 이 세계와 바깥의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본격적인 연구를 위해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극지방을 향해 떠난다.

사실, 또 다른 세계의 존재는 현재 이 세계를 지배하는 절대 권력 집단 ‘매지스테리움’이 금기시하는 내용이다. 매지스테리움의 고위급 인사인 콜터 부인(니콜 키드먼)은 우아하고 품위 있는 몸가짐을 뽐내지만, 실은 어린 아이를 납치해 사악한 실험을 하는 주모자다. 콜터 부인은 라라에게 남다른 호감을 품고 매지스테리움의 본부로 데려가는데, 라라는 곧 음모를 눈치채고 도망친다.

황금나침반은 숫자 대신 기호를 통해 진실을 알려 주는 기계다. 라라는 이를 읽을 수 있는 보기 드문 능력을 가졌다. 다만 자신이 예언에 나오는 능력자인 줄도, 황금나침반의 내력도 모른다. 도망친 라라는 아이들을 납치당한 집시들, 비행선의 괴짜 조종사 존 파(짐 카터), 탁월한 전투 능력을 지닌 흰곰 이오렉(목소리 이언 매켈런) 같은 조력자를 차례로 만나 아이들을 구하러 나선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종족 헥사의 세라피나(에바 그린) 역시 라라를 돕는다. 참,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동물 형태의 수호정령 ‘데몬’(deamon)이 있다. 애완동물처럼 보이는 데몬은 라라에게도 수다스러운 친구 역할을 한다.

데몬을 비롯, 영화 속의 다양한 상징을 세세하게 짚자면 이 영화의 본 모습은 나이 어린 관객을 위한 손쉬운 판타지가 아니다. 호기심도, 의심도 많은 라라의 눈을 통해본 주변 인물들이 첫눈에 선악을 판별하기는 힘들게 묘사되는 것도 그 한 예다. 영화는 이런 미묘함을 드라마를 통해 적극적으로 부각시키는 대신 시각적인 볼거리로 관객의 관심을 돌리곤 한다.

귀족적인 우아함과 근대적 풍물을 결합한 듯한 영화의 배경은 그 자체로 볼만한 눈요깃감이다. 런던을 닮은 매지스테리움의 본부, 1900년대 초의 제펠린 비행선을 닮은 탈것 등이 차례로 눈을 사로잡는다.

당돌하고 되바라진 라라의 성품은 이 판타지의 또 다른 새로운 맛이다. 이 소녀는 판타지의 소년들처럼 육체적 고행을 통해 성장하는 대신 탁월한 잔꾀로 위기를 모면하고, 조력자를 얻곤 한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내가 네 애비다”에 상응하는 출생의 비밀을 알고도 단박에 이를 거부할 만큼 막무가내로 당돌하다.

영화 속에서는 이 소녀가 굳이 예언의 주인공인 이유를 달리 찾기 어려운데, 제멋대로인 그 성품만큼은 절대권력의 통제사회에 균열을 낼 수 있는 미덕으로 보인다.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신예 아역 배우 다코다 블루 리처드의 연기가 생기발랄하다.

원작은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영국작가 필립 풀먼이 1995년 펴낸 3부작 소설 『그의 검은 물질』. 제1부 ‘황금나침반’을 스크린에 옮겼다. 특히 작가는 매지스테리움을 통해 유일신 신앙을 공격해 기독교계의 강한 반발을 부르기도 했다. 영화에는 그런 기색이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다. 감독 크리스 웨이츠. 19일 개봉.

주목! 이 장면컴퓨터 그래픽의 힘을 빌린 화려한 액션은 요즘 판타지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목. 이 영화에서는 라라를 구하기 위해 이오렉이 아머베어(갑옷을 입은 곰) 종족의 왕과 대결하는 장면을 첫손에 꼽을 만하다. 이오렉의 비극적인 과거를 배경으로 흰곰 두 마리의 육중한 무게감과 거친 몸싸움의 질감이 잘 살아난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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