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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연장 순례] 파리 살 플레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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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가르니에, 오페라 바스티유, 오페라 코믹, 테아트르 샹젤리제, 테아트르 샤틀레…. 파리에 있는 공연장들은 대부분 오페라 극장들이다. 샹젤리제ㆍ샤틀레 극장에서 음향 반사판을 설치해 음악회를 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콘서트홀로 지은 것은 1927년 개관한‘살 플레옐’(Salle Pleyel)뿐이다. 1907년에 문을 연‘살 가보(Salle Gaveau)’는 1200석으로 실내악 공연에 적합하다.

프랑스 최고의 교향악단으로 손꼽히는 파리 오케스트라는 1998년 11월 하루 아침에‘노숙자’ 신세로 전락했다. 1967년 창단 이후 줄곧 주무대로 써오던 살 플레옐이 크레디 리요네 은행에서 한 민간 투자자의 손에 넘어가면서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그후 파리 오케스트라는 샹젤리제 극장과 샤틀레 극장을 전전하다가 2002년부터는 오페라 코믹과 라파예트 백화점 사이 골목에 있는 모가도르 극장(1800석)에 임시 무대를 마련했다. 1919년 개관해 오페레타ㆍ뮤지컬 극장을 거쳐 한동안 영화 상영관으로도 쓰이던 곳이다.

파리 유일의 심포니 전용홀

파리 유일의 콘서트홀 ‘살 플레옐’은 파리에 본사를 둔 피아노 제조회사 플레옐 사가 1907년에 건립한 음악당이다. 플레옐사가 부도 위기에 직면하면서 1935년 크레디 리요네 은행이 헐값에 인수했다. 개관 당시 건축비를 빌려줬던 이 은행은 살 플레옐을 인수한 다음 음악회 뿐만 아니라 국제회의, 정치 집회, 종교행사, 미용 컨테스트, 복권 추첨, 버라이어티 쇼에도 대관을 해줬다.

1996년 5월 5일 크레디 리요네 파리 본사 건물에 대화재가 발생했다. 12시간동안 건물의 3분의 2가 불에 탔다. 귀중한 은행 서류와 컴퓨터 데이터가 잿더미로 변했다.

1997년 파산 직전의 크레디 리요네 은행이 살 플레옐 건물을 매각한다는 신문 광고를 실었다. 1000만 유로(약 170억원)를 내고 선뜻 건물을 사들인 사람은 위베르 마르티니(Hubert Martigny. 1939∼). 대학에서 산업미술과 시각 디자인을 전공하고 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미국 회사 KPMC의 컨설턴트를 거쳐 1980년 하이테크와 혁신 자문회사인 알트란 테크놀로지를 창설했다. 마르티니는 살 플레옐을 사들여 건물을 헐고 이 자리에 대형 마트를 세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내의 반대에 부닥쳤다. 그의 아내 카를라 마리아 라르디티는 이탈리아 출신의 여성 지휘자였다. 마르티니는 리노베이션을 거쳐 살 플레옐을 재개관하면 아내 타르디티에게 예술감독을 맡길 생각이었다.

살 플레옐이 문을 닫으면서 프랑스 정부 당국에는 파리의 음악가, 음악애호가들로부터 심포니 전용홀을 지어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프랑스 음악계의 대부(代父)인 작곡가 겸 지휘자 피에르 불레즈는 프랑스 정부가 오페라에는 관심이 많아도 교향악에는 무관심하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파리 오케스트라는 공연을 취소하고 파업에 돌입하면서 당시 자크 시라크 대통령에게 2008년으로 예정돼 있던 국립 콘서트홀 준공을 앞당겨달라는 내용의 공개서한을 보냈다. 이 교향악단은 민간 교향악단으로 출발해 정부 예산의 지원을 받으며 사실상 ‘국립’이나 마찬가지였다.

매각 후 해체 위기 직전 개보수 공사

살 플레옐은 2002년부터 3000만 유로의 예산을 들여 개ㆍ보수 공사에 돌입했다. 파리 음악도시(Cite de la musique) 단지에 들어설 예정이던 국립 콘서트홀 신축 계획은 예산 부족 때문에 지지부진하다가 결국 2012년 개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음악당의 명칭은 필아르모니 드 파리(Philharmonie de Paris)으로 정했고 건축가 장 누벨(Jean Nouvel)의 설계안이 선정됐다. 객석수는 2200∼2500석 규모다.

2003년 살 플레옐의 리노베이션이 한참 진행될 무렵 장 자크 엘라공 문화부장관에게서 연락이 왔다. 마르티니가 살 플레옐의 개ㆍ보수 공사비를 대고 48년간 프랑스 문화부 산하의 ‘음악도시’에 운영권을 이양하면 매년 1500만 유로(약 260억원)의 임대료를 지불하는 조건이었다. 2055년에 1유로를 내고 살 플레옐을 정부가 완전히 매입하겠다고 약속했다. 말하자면 한꺼번에 매입하기엔 예산이 부족하니까 48년간 분할 상환하겠다는 얘기다.

2006년 9월 13일 파리 오케스트라는 4년간의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원래의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음악감독 크리스토프 에셴바흐의 지휘로 말러의 교향곡 제2번‘부활’을 연주했다. 살 플레옐은 글자 그대로 다시 태어났다.

48년 분할 상환 조건으로 프랑스 정부에서 매입

현재 살 플레옐의 소유권은 마르티니가 회장으로 있는 부동산 개발회사 IDSH가 갖고 있고 운영권은 ‘시테 드라 뮈지크’에게 있다. 극장 예산의 40%는 정부 지원금으로 충당하고 있는데 그중 80%는 빌레트 공원에 있는‘시테 드라 뮈지크’재단이 부담하고 나머지 20%는 파리 시에서 지원한다. 물론 소시에테 제네랄(Societe Generale)등의 기업 에서 협찬금도 받고 있다. 2006년 기업 협찬금은 60만 유로(약 11억원).

개ㆍ보수 공사로 크게 달라진 것은 무대 뒤에는 합창석(160석)이 배치된 점이다. 객석 2∼3층에는 좌우 측면 발코니석도 추가했다. 무대는 지휘대를 중심으로 반원형으로 여러개의 조각으로 쪼개 악기 편성에 따라 무대의 높낮이를 자유자재로 신속하게 조절할 수 있도록 했다. 객석 의자 색깔도 전에는 우중충한 청색이었는데 우아한 부르고뉴 레드와인 색깔로 바꿨다.

아르데코 스타일의 로비도 밝고 화사로운 옛 모습을 되찾았다. 대리석 기둥에 붉은 카펫까지 마치 고급 여객선의 라운지 같은 느낌을 준다. 객석수는 2386석에서 1290석으로 줄였다(1927년 개관 당시에는 3000석이 넘었다). 객석 의자 간격도 넓혔다. 천장도 더 높여 무대와 객석 공간의 전체 부피를 20%나 늘렸다. 충분한 잔향(殘響)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버밍엄 심포니홀, 루체른 KKL, 싱가포르 에스플러네이드 센터 등의 음향 설계를 한 ARTEC의 러셀 존슨이 음향 컨설턴트를 맡았다.

‘살 플레옐’은 이그나스 플레옐(Ignace Pleyel. 1757∼1831)의 이름을 딴 것이다. 오스트리아 태생으로 요제프 하이든의 친구이자 제자인 그는 에스테르하치 궁정 악단의 악장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다. 스트라스부르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악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1791년 프랑스 혁명으로 하루 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됐다. 그후 런던으로 건너가 빌헬름 크라머가 창설한‘프로페셔널 콘서트’시리즈를 이끌었다.

당시 하이든은 ‘잘로몬 콘서트’에서 지휘를 맡았다. 본의 아니게 사제 간의 격돌이 벌어진 것이다. 이들은 음악적으로는 라이벌 관계였지만 인간적으로는 매우 친하게 지냈다.

파리 오케스트라의 상주 무대

런던에서 음악회로 많은 돈을 번 플레옐은 1795년 파리에서 음악 출판사‘메종 플레옐’을 냈다. 음악도를 위해 고안한 포켓판 악보 시리즈가 베스트셀러가 됐다. 또 하이든 4중주 전곡 악보를 비롯해 보케리니ㆍ베토벤ㆍ클레멘티ㆍ뒤섹의 작품 등 39년간 4000곡을 출판했다. 1807년 피아노 제조업자로 변신하기 전까지는 하이든과 베토벤을 잇는 유명 작곡가였다. 교향곡 41개, 현악 4중주 70개와 오페라까지 작곡했다. 그의 장남 카미유 플레옐은 신동 피아니스트로 1815년부터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았다.

플레옐이 맨 먼저 음악홀을 연 것은 1807년. 첫 피아노 출시를 기념해 카데 거리에 있던 자택 거실을 개조해 만든 110석짜리 음악 살롱이다. 쇼팽의 파리 데뷔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1839년 12월에는 로크슈아르 거리에 있는 피아노 공장과 전시장 한 켠에 ‘살 플레옐’(550석)을 개관했다. 이곳에서 1846년 5월 11세 소년 생상이 데뷔 독주회를 했다. 1848년 쇼팽이 이곳에서 파리 고별 무대를 열었다. 생상‘피아노 협주곡 제2번’(1868년), 라벨‘하바네라’(1898년)‘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1902년)‘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소나타’(1922년), 포레‘피아노 3중주’(1923년) 등이 초연되기도 했다.

카미유 플레옐은 1920년 파리 한복판에 대규모 음악센터를 짓기로 했다. 1924년 12월 5일 착공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레스토랑, 데생 학원, 청과물 가게, 물감 가게 등이 있었다. 지하철, 버스, 전차 노선이 무려 13개나 통과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살 플레옐’이라는 간판을 내건 두번째 음악당이었다.콘서트홀뿐만 아니라 실내악 연주를 위한 쇼팽홀, 드뷔시홀, 500여대의 피아노가 들어선 악기 전시장, 음악감상과 연주를 위한 58개의 음악 스튜디오가 건물 안에 들어섰다.

1927년 10월 18일 파리의 내로라하는 멋쟁이들이 살 플레옐 로비에 모습을 드러냈다. 파리 오케스트라의 전신인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가 필립 고베르의 지휘로 바그너의‘마이스터징어 서곡’을 연주했다. 프랑크‘교향적 변주곡’과 파야‘스페인 정원의 밤’에선 피아니스트 로베르 카자드쥐가 협연했다. 이어서 드뷔시‘2개의 녹턴’, 뒤카‘마법사의 제자’를 연주했고 스트라빈스키‘불새’와 라벨‘라 발스’에선 작곡자들이 각자 지휘봉을 들고 무대에 나섰다. 객석에는 프랑스 대통령 가스통 뒤메르귀, 국무총리 라이몽 푸앙카르, 교육예술부 장관 에두아르 에리오, 작곡가 폴 뒤카, 에마누엘 파야, 레이날도 한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아노 제조업체 플레옐사가 세운 ‘음악센터’

1928년 7월 19일 살 플레옐에 개관 9개월만에 화재가 발생했다. 개관 당시 객석 양쪽 벽면을 수놓았던 조메스(Jaulmes)의 프레스코 벽화는 자취를 감췄다. 재건축 과정에서 미국 출신의 왓슨(F. R. Watson)이 음향 자문을 맡았다. 대형 메가폰 또는 포물선 모양의 객석 설계는 그대로 살리는 대신 발코니석에 흡음 재료를 사용했고 바닥에는 카펫을 깔아 잔향시간이 오히려 줄어들었다. 내부 마감도 불에 잘 타지 않는 소재로 바꾸면서 객석 의자도 목제에서 철제로 바꿨다.

1929년 금융 위기로 마감재도 경제성 위주로 선택했다. 객석수도 2546석으로 줄었다. 음향은 오히려 더 나빠졌다. 메아리가 발생하면서 ‘살 플레옐에 사는 유령은 메아리’라는 농담까지 생겼다. 1929년 재개관하면서 카바이유 콜 사가 제작한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됐다. 1930년 3월 5일 마르셀 뒤프레의 연주로 웅장한 화음을 내기 시작했다.

그후 살 플레옐은 음향이 나쁜 홀이라는 오명을 씻지 못했다. 교향악단이나 청중이 이곳을 선호한 것은 단지 파리에서 유일한 콘서트홀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동안 여러차례 리모델링 공사를 했지만 소용없었다. 1958년 음향 개보수를 맡은 건축가는 부동산 건축 전문가였다. 1981년에 흡음재와 바닥 카펫을 제거했고 1994년에는 내부 벽면에 확산재(擴散材)를 부착했으나 획기적인 변화는 없었다. 만석(滿席)시 잔향시간이 1초 6에 불과했다. 교향악을 연주하기 위한 적정 수준의 잔향시간은 적어도 2초가 넘어야 한다.

이번 재개관으로 1960년대 댄스 스튜디오로 개조됐던 전시실도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60년대 당시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한참 발레를 배울 때 그의 스승인 마담 부르가의 댄스 스튜디오도 이 건물에 있었다.

◆공식 명칭=Salle Pleyel

◆홈페이지=www.sallepleyel.fr

◆초연=스트라빈스키‘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카프리치오’(1929년), 라벨 ‘피아노 협주곡 G장조’(1931년), 베리오‘Echoing Curves’(1988년), 리게티‘바이올린 협주곡’(1990년)

◆개관=1927년 10월 18일(2006년 9월 13일 재개관)

◆건축가=1927년 구스타브 리옹(Gustave Lyon), 2006년 프랑수아 세리아(Francois Ceria)

◆오르간=카바이유 콜(1929년)

◆객석수=1913석

◆상주단체=Orchestre de Paris, Orchestre Philharmonique Radio France

◆음향 컨설턴트=Albert Yaying Xu(1994) 러셀 존슨(Rusell Johnson, 2006년)

◆부대시설: 르 카페 살 플레옐(+33(0)1-53-75-28-44)

◆주소: 252 rue du Faubourg Saint-Honore, 75008 Paris

◆전화: +33-(0)1-42-56-13-13

◆교통: 지하철 2호선 Ternes역, 지하철 1, 6호선 Charles de Gaulle-Etoile역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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