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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연의패션리포트] 톰 포드 이전, 톰 포드 이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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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카르댕, 크리스티앙 디오르, 지방시, 발렌시아가, 니나 리치….
패션의 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디자이너들의 이름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겐 욕실 수건걸이에서 만나는 낯익은 이름들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더니 어느샌가 이들이 최고급 백화점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21세기 패션사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는 패션 명가는 어떻게 부활했나.

헤어 드라이기·자명종·후라이팬, 심지어는 비데까지…. ‘피에르 카르댕(Pierre Cardin)’이라는 이름이 붙은 상품만 세계적으로 800여 개에 달한다고 한다. 일명 ‘라이선스 비즈니스’라 불리는 마케팅 방법이다. 이름을 빌려주고 그 브랜드의 이미지나 아이덴티티를 이용해 해당 제품의 가치를 높이는 이런 전략에 특별한 애정을 보여 온 디자이너가 피에르 카르댕이었다. 그는 1940년대에 오트 쿠튀르(고급 맞춤복) 시장이 지고 기성복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알았다. 자신의 이름을 이용한 라이선스 비즈니스에 적극 나선 까닭이다. 『The End of Fashion』을 지은 테리 어긴스의 책에 따르면 피에르 카르댕의 비즈니스 파트너였던 헨리 베르그하우어는 “피에르는 패션 디자이너보다는 라벨이 되고 싶어했다. 그는 결국 ‘르노(Renault)’같은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피에르 카르댕의 생각이 한 사람의 개인을 부자로 만들었을지는 몰라도 브랜드로서의 희소성이나 가치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피에르 카르댕의 라이선스 비즈니스는 요즘도 매년 3600만 유로를 벌어들이고는 있다. 하지만 욕실용 수건과 비데에 아로새겨진 패션 디자이너의 이름 탓에 그 이름을 달고 나온 옷은 정작 사람들이 사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피에르 카르댕 자신도 깨닫고 있을지 모른다. 60년대에 화려한 한때를 보낸 정상의 브랜드 피에르 카르댕은 이렇게 해서 서서히 패션의 역사 뒤로 잊히고 있다.

이렇게 몰락하거나 잠자던 패션 브랜드들이 화려하게 등장하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우리 사회가 아직 IMF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을 90년대 말이다. 도산 위기에 처할 만큼 스러져 가던 이탈리아의 오래된 고급 가죽 하우스였던 구찌의 톰 포드다. 90년 구찌는 톰 포드라는 뉴욕 출신의 젊은 디자이너를 수석 디자이너로 영입했다. 그 덕분에 피에르 카르댕처럼 이름을 파는 라이선스 브랜드로 몰락할 뻔했던 구찌는 10년 뒤 43억 달러 규모의 럭셔리 하우스로 부활했다. 파리 보그 편집장인 카린 로이펠트는 “패션의 역사는 ‘톰 포드 이전 시대(pre-Tom ford)’와 ‘톰 포드 이후 시대(After-Tom Ford)’로 구분된다”고 말할 정도다. 그는 다른 전통 있는 브랜드를 되살려낸 성공적 선례를 만들었다. 패션 마케팅 저서인 『Fashion Brands』의 저자 마크 턴게이트는 톰 포드를 이렇게 평가하기도 했다. “톰 포드는 마케팅의 힘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결코 패션을 예술이라 부르며 잘난 척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옷을 팔고 싶을 뿐이다.”

구찌의 대나무 손잡이 가방

톰 포드는 단지 옷을 만들고 재단하는 디자이너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패션 디자이너들과 확연히 달랐다. 그는 브랜드의 이미지와 아이덴티티를 정립하고 이를 마케팅 전략으로까지 발전시킨 진정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였다. 그가 구찌에 입성한 이후 노인들이나 들고 다녔던 구찌의 대나무 손잡이 가방은 케이트 모스와 귀네스 팰트로 같은 글래머러스한 여성들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백이 되었다. 95년의 일이다. 그는 구찌의 ‘섹시’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제품뿐만 아니라 광고와 매장 전시에서도 그랬다(브랜드보다 그의 이름이 너무 크게 부각돼선지 결국 2004년 톰 포드는 구찌를 떠나 홀로서기를 하게 된다).

당시 구찌의 ‘환골탈태’가 패션계에 던진 파장은 컸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러한 브랜드의 부활 작업은 83년 샤넬 하우스의 수장을 맡아 샤넬을 현대적으로 변신시켰던 칼 라거펠트가 먼저다. 하지만 파급 효과로 보면 단연 구찌의 톰 포드다. 어쨌든 이후 하나 둘, 잠자고 있던 오래된 패션 브랜드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84년 루이뷔통 그룹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은 크리스티앙 디오르를 인수하고 20년도 채 되지 않아 루이뷔통뿐 아니라 디오르와 셀린·겐조·지방시·로에베·펜디·마크 제이콥스·도나 카란까지 모두 거느리게 되었다. 그는 한동안 세계 최고의 패션 저널리스트들을 만나 어떤 디자이너가 가장 독창적이고 재능이 있는지를 묻고 다녔다. 이때 발굴한 스타 디자이너가 존 갈리아노다. 갈리아노는 96년 디오르의 수석 디자이너가 됐다. 지방시는 런던 출신의 알렉산더 매퀸, 루이뷔통은 마크 제이콥스가 맡았다. 놀랍게도 중책을 부여받은 이들 모두는 20대 중·후반이었다.

이후 버버리, 이브 생 로랑, 클로에, 페라가모, 발렌시아가, 니나 리치, 기 라 로슈, 겐조 등 적게는 수십 년, 많게는 100년이 넘은 역사를 가진 패션 하우스들이 앞다퉈 젊고 재능있는 디자이너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했다. 이제 패션계의 이러한 시스템은 통과의례가 된 듯하다. 유명 패션 디자이너들의 이름을 내 집 목욕탕에 걸린 수건에서 볼 수 있는 시대는 저물고 있다.

강주연 패션잡지 엘르 수석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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