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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 사학법은 국가의 계약 파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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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우리는 지금 암울한 시대에 살고 있다. 국가와 개인 사이에서 신의가 사라지고 있다. 어느 나라든 계약과 사유재산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면 자본주의 체제 발전은커녕 개인·기업의 원동력 자체가 상실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둘을 함께 잃어버리고 있다. 특히 개정 사학법은 국가권력이 힘에 의해 계약을 파기하고 개인재산을 탈취해 좌편향 이념교육의 숙주로 만들어간 경우다.

사학법 개정은 현 정권이 사학 비리를 척결한다는 이유로 사학재단 이사회에 관선 임시이사를 파견해 사학을 감독하겠다는 데서 연유한다. 오랜 세월 온 나라를 들끓게 한 뒤 재개정됐다는 사학법도 개방형 이사제와 대학평의원회를 끼워 넣어 대학 운영을 과격한 소수집단의 손에 넘기고 있다. 앞으로 대학 내에 각종 단체가 할거하면서 분규가 연일 이어지게 됐다. 대학의 세계화와 무한경쟁 시대에 이 무슨 시대착오적인 교육행정인지 모르겠다.

미국도 비슷한 전례가 있었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뉴햄프셔 주의회는 1815년 대학의 투명성과 공공성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독립 전 영국 국왕 조지 3세가 인가한 다트머스대를 접수했다. 12명인 이사회를 주지사가 추가 선임해 21명으로 늘리고, 별도의 감사회를 설치한 것이다. 뉴햄프셔 주법원에서는 주정부가 승소했으나 연방대법원은 이를 뒤집었다. 유명한 ‘다트머스대 이사회 대 우드워드’ 판결이다. 지금도 국가권력으로부터 법인 권리를 보호하는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역할을 하고 있다.

판결문의 내용은 “사유재산을 사학에 내놓을 당시 개인과 국가가 맺은 신의와 계약은 존중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이사회에 개방형 이사의 진입은 사학의 공립화를 뜻하고, 개인과 국가 간의 계약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는 것”이라며 “계약 존중은 자유민주국가의 기본질서”라고 헌법을 해석했다. 이 판결은 그 후 대학은 물론 미국 사회의 모든 주식회사에도 확대 적용돼 기업과 미국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그러나 이 판결도 그냥 쉽게 내려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미국은 영국 왕실에 반기를 들고 독립했던 터라 영국 왕이 인가한 대학을 명분상 그냥 둘 수 없었다. 또 대학 운영자금을 정부에서 상당 부분 지원받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보조금 사용 투명성 요구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따라서 제퍼슨 대통령과 상당수 국민은 주의회와 주정부에 법인 정관을 고칠 권한이 있다고 믿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내린 대법원 판결은 미국사회와 대학·기업 발전에 관한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고, 미국을 오늘날의 초일류 국가로 만들었다. 이 판결에 힘입어 미국 독립 이전에 설립된 하버드·예일·프린스턴대 등 경영권이 유지돼 수많은 지도자를 배출했다.

그런데 우리 사정은 어떤가. 대학 투명성을 빙자한 개방형 이사제는 사학에 대한 국가의 신의와 사유재산 보전을 말살했다. 사학의 명예와 자부심, 신앙의 자유 등을 송두리째 무시하면서 사학 전체를 범죄집단으로 매도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학을 정권 세력의 전리품으로 탈취해 이념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물론 사학의 혁신과 자율적인 비리 척결도 사학 자율의 필수·전제조건이다. 그래야 정권의 부당한 개입을 막아 낼 수 있다.

박우희 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