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꽃’의 시인 김춘수(82)씨가 해방 이듬해부터 시작한 60년 가까운 문학인생을 결산하는 『김춘수 전집』(전 5권, 현대문학)을 펴내고 11일 소감을 밝혔다.
김씨는 “한 방송사의 설문 조사에서 ‘꽃’이 연예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로 뽑혔다는데, ‘꽃’은 사실 그렇게 애착이 가는 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꽃’이 그렇게 애송되는 이유는 연애시로 읽었기 때문일 것”이라며 “작가가 작품에 담긴 의도를 독자에게 강요할 수는 없지만 ‘꽃’은 릴케와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아 지어진 시”라는 것이다.
김씨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철학적 명제처럼 사물은 이름지워야만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온다는 점과 모든 개체는 숙명적으로 고독한 존재이기 때문에 유대가 필요하다는 두가지 테마를 ‘꽃’이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어떤 시를 대표작으로 꼽겠느냐”는 질문에 김씨는 “‘꽃’으로 대표되는 관념적인 경향의 시를 짓던 초기, 소위 무의미시를 쓰던 중기, 그 이후 지금까지의 후기 등 시기별로 두드러진 몇작품들을 꼽을 수는 있지만 내 모든 시 1천여편 중에 한편을 뽑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김씨는 “50년대 내내 관념적인 시를 쓰다보니 60년대 들어 스스로의 작업을 반성하게 됐다”고 말했다. 언어와 이미지에서 대상을 지시하는 관념성을 배제,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 만으로 채워지는 무의미시로 돌아선데 대한 설명이다. 김씨는 ‘50년대 작업에 대한 반성’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76년 출간된 시론집 『의미와 무의미』에서는 “관념공포증에 걸려들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김씨는 관념공포증에 빠진 배경이 된 20세를 전후한 동경 유학시절의 체험을 소개했다. 그는 40년대 초반 동경의 일본대학에 다니던 중 한국인 고학생들과 함께 동경에서 가까운 가와사키 항에서 화물 하역일을 했다. 휴식시간에 자연스럽게 모인 한인들은 한국말로 일왕을 욕하고 총독정치를 비난하곤 했는데, 김씨가 불경죄의 주동인물로 걸려들었다.
그는 “한겨울에 찬 물이 채워진 욕조에 들어가게 되자 공포에 사로잡혀 ‘무슨 일이든 다 불겠다’고 형사에게 대답했고, 혐의가 부풀려졌다”고 말했다. 취조 중에 맞닥뜨린 도쿄대 좌파 교수의 모습도 김씨가 관념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데 일조했다. 몇달째 변변히 먹지 못하는 식민지 청년 앞에서 민중을 위한다는 좌파 교수는 함께 고초 당하는 입장이면서도 사식으로 들여온 따끈한 빵을 먹어보라는 권유 한마디 없이 혼자 먹어 치웠다고 한다.
김씨는 “훗날 무의미시를 쓸 수 있었던 가능성은 그때의 경험 탓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전집 1권에는 시가, 2·3권에는 시론이 담겨있고, 5월께 출간되는 4·5권은 산문을 모은다.
신준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