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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완도 보길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가을 햇살이 잦아드는 해남 땅끝마을(토말.土末)에서 무한대로열린 수평선을 바라보다 훌쩍 보길도(甫吉島.전남완도군)行 배를잡아타는 재미는 쏠쏠하다.
조선조 제일의 문객이었던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가 섬 가득 문향(文香)을 남겼다는 그 섬을 1시간여만에 찾아들었을 때어두워진 보길도가 외지인에게 보낸 첫신호는 어이없게도 붉은 네온사인이 명멸하는 「러브장 나이트클럽」의 간판이 었다.
웬만한 도시에서도 신물이 나도록 접한 선홍빛 강렬한 네온사인을 여기서도 만나다니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새벽 푸른 해무(海霧)속에 모습을 드러낸 보길도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난히 많아 보였던 붉은 네온의 십자가,해변가에 줄지어 늘어선 벽돌집이 어둠 속에 깊이 잠들기를 기다렸다 새벽 여명 속에다시 보는 보길도는 원래의 얼굴로 돌아간 듯했다.
아침이 오기 전에 어디론가 쪽배를 저어 떠나는 어부의 모습을보면서 노년의 발길을 이곳에 붙들어매인 채 주옥같은 싯귀들을 쏟아낸 孤山의 삶(1587~1671)이 가깝게 느껴졌다.
『앞개에 안개 걷히고 뒷산에 해비친다/배 띄워라 배 띄워라/썰물은 물러가고 밀물이 밀려온다/지국총 지국총 어사와/강촌의 온갖 꽃이 먼 빛이 더욱 좋다.』 조선 중기 당파싸움에 밀려 파직당한 후 제주도로 가는 뱃길을 돌려 잠시 이곳에 들렀다가 수려한 경관에 끌려 아예 삶의 닻을 내려버린 곳.『물외(物外)의 가경(佳境)이요 선경(仙境)』이라고 찬탄하며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13년간을 칩 거했던 보길도는 아직 시조 시인의 체취로가득차있는 듯했다.
고요에 잠긴 마을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선착장 입구에서 부황리 마을을 2㎞정도 가로질러 당도한 孤山의 정원,세연정(洗然亭)은 해무 속에 잠겨 있었다.孤山이 만년의 무료함과 쓸쓸함을 달래기 위해 연못과 정자를 만들어 자연의 벗들과 우정을 나눴다는 곳이다.
『내 벗이 몇이나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동산에 달 오르니 긔더욱 반갑고야/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야 무엇하리.』 그가『오우가(五友歌)』에서 5명의 친구인양 애지중지했던 물과 돌,소나무,달,대나무는 세연정 주변에서 주인이 떠나간 연못을 말없이 지키는 듯했다.
孤山이 五友를 벗하면서 가는 세월을 노래한 세연정 뒤쪽으로는물이 돌아 흘러 또하나의 장방형 연못을 이루고 있다.이 회수담에는 탱탱한 연잎들이 함초롬한 흰 꽃을 피워내고 있다.
회수담 안에 놓인 작은 무대같은 평평한 바위는 무도암(舞蹈岩).그 위에서 어여쁜 아낙이 춤을 추면 물 위에 비친 그 모습을 즐겼다는 孤山은 그때 무엇을 생각했을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는 그가 사색과 휴식을 위해 정원 곳곳에 마련해놓은 활쏘기터인 사투암(射鬪岩),세연지(洗然池)의 물을 저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물이 넘쳐 만드는 폭포를 감상하기위해 만들었다는 굴뚝다리 등은 역으로 그가 얼마 나 긴 세월과힘든 씨름을 했을까를 느끼게 했다.1천2백여가구에 5천3백여명이 사는 이 섬은 마치 孤山의 넋을 기리기 위해 수백년을 흘러온 마을처럼 느껴진다.
부황리의 세연정에서 조금 떨어진 보길면부용리에는 孤山이 초막을 짓고 살다가 주변의 잡목을 베어 세웠다는 낙서재(樂書齋)가초석만 덩그러니 돌무더기터 남아 있다.
그 북서쪽 위로는 바위 사이에 정자를 짓고 사색과 독서로 외로움을 달래며 밤에는 달 뜨는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았다는 동천석실(洞天石室)과 망월대(望月臺)가 바위더미 속에 서있다.동천석실 경내에는 연꽃을 담은 3개의 작은 연못이 있다.
고산의 체취를 느끼기 위해 이곳을 찾는 외지인들은 보길도가 그저 옛모습으로 남아있기를 소망한다.孤山이 「세상을 등지고 산다」는 뜻의 「무민(无民)」이라는 편액을 걸어놓고 살았던 보길도는 그러나 여행객의 승용차를 실은 페리호가 하루 에도 몇차례씩 완도에서,토말에서 찾아들어 빠르게 변모해가고 있다.
〈高惠蓮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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