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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글씨 탁본전'을 보고] 보기만 해도 손에 잡힐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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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화가 장욱진의 평전을 썼을 만큼 미술 동네 사람임을 자랑해온 김형국 서울대 교수가 오는 18일까지 과천시 시민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추사체의 진수, 과천시절-추사 글씨 탁본전'을 보고 평을 보내왔다. 도시환경 전문가로서 서예도시의 성격을 다듬고 있는 과천시의 노력을 평가한 안목을 독자와 함께 나눈다. [편집자]


서울 강남 봉은사의 판전에 걸려 있는 현판 ‘판전(板殿)’. 추사가 죽기 3일 전에 유언 같이 써 놓고 간 글씨로, 추사 스스로도 자신이 쓴 편액 가운데 괜찮은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1786~1856)의 현판 탁본은 또 다른 가슴 벅찬 감동이다. 현장에 걸린 현판은 주변 환경의 일경(一景)에 불과하지만, 실내로 옮겨진 그 탁본은 전경(全景)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현장의 현판은 원경(遠景)으로 머물 뿐이지만, 탁(拓) 하던 손길이 느껴지는 탁본은 종이 위 붓끝에 서리던 기운생동(氣韻生動)마저 눈앞에서 돋보여주는 감동이다. 손에 잡힐 듯 지근거리에 다가온, 한 자(字) 크기가 사방 1m가 넘는 큰 글씨는 바라만 보라던 조각을 손으로 만질 때 느껴지는 양감(量感)과 질감(質感) 그대로다. '판전(板殿)''불광(佛光)'의 탁본이 특히 그랬다.

과천시가 앞장 선 '추사 글씨 탁본전'이 화제의 전시회다. 전원도시라고 하나 과천은 도읍 서울에 가려진 작디작은 고장인데, 바로 거기서 '전국 잔치'가 열렸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혼신의 힘으로 써내려 갔던 추사의 현판과 비석 탁본이 한 자리에 모였기 때문이다.

서예는 본디 종이에 먹으로 쓰는 것이니 실내공간용의 개인 수장품이기 일쑤지만, 현판이나 주련으로 옮겨진 것은 옥외공간용이 된다. 요즘 말로 환경예술인 것. 현판이 걸린 전각과 누각의 멋, 이들이 자리한 땅 지기(地氣)마저 그 탁본에 서려 있다.

십수년의 유배살이 등으로 오랫동안 세상을 등져야 하는 간고한 삶이었음에도 추사의 필적이 땅끝 대흥사에서 저 멀리 함경도 함초령까지, 그 중간의 양산 통도사.고창 선운사.계룡산 동학사.예산 화암사.강릉 선교장까지 널리 퍼져나간 것은 그의 방명(芳名)이 은근하면서도 깊은 난향(蘭香)이라 조선왕실 임금부터 억불 때문에 짓눌려 살았던 절간 스님까지 방방곡곡의 귀천(貴賤)이 두루 탐했기 때문이다. 그런 내력의 물증이 그가 떠난 지 근 1백50년 만에 처음으로 과천 일당에 모인 것이다.

과천 시절에 휘호한 글씨의 현판 탁본을 주로 선보인 이 전시는 한 마디로 추사의 귀향전이다. '일흔살 먹은 과천사람(果七十)''과천에 사는 노인(老果)'같은 뜻의 아호를 즐겨 썼음이 말해주듯이 만년의 그에겐 과천이 제2의 고향이었다.

과천과 인연 맺기는 장년 때 지금 경마장 뒤쪽, 참외인지 오이인지가 잘 자라는 터에 생부가 별서(別墅)로 '과지(瓜地)초당'을 마련한 데서 비롯됐다. 나중에는 뒷산에 안장한 생부 묘소에서 3년이나 시묘(侍墓)살이도 했다.

과천 시절은 자연과 하나된 경지에서 추사체가 절정으로 치닫는다. '비유컨대 책을 짓느니, 차라리 꽃을 심어 일년 내내 보는 것이 좋을진저(比似著書空用力 猶得種花一年看)'같은 시문에 담았던 예술혼이 지필묵으로 분출한다.

땅은 빼어난 사람으로 해서 이름난 곳이 된다. 예향(藝鄕)을 겨냥한 과천 도시브랜드 키우기는 불세출의 거장 김정희가 아속어(兒俗語)로 '딱'이다.

이번 전시가 탁본들을 모은 참한 추사미술관 하나 마련하는 출발점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그건 나중 일이고 당장은 조형예술 애호가들이 모처럼 안복을 누릴 수 있는 보석 같은 기회가 틀림없다. 추사에 대한 깊은 사랑과 정성 없이는 절대로 꾸밀 수 없는 '어진' 전시라서 하는 말이다.

<김형국.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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