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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그린스펀 화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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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87년부터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으로서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고 있는 앨런 그린스펀의 트레이드 마크는 모호함(ambiguity)이다. 미국 경제가 연착륙하느냐, 불황에 빠지느냐가 관심사이던 95년 6월 그린스펀이 시애틀에서 강연을 했다. 그의 강연에 대한 해석은 제각각이었다. 다음날 뉴욕 타임스 기사의 제목은 '그린스펀, 불황 가능성 우려'였던 반면 워싱턴 포스트는 '그린스펀, 불황 가능성 없다고 결론'이라고 보도했다. 엇갈린 언론보도를 본 그린스펀은 "건설적인(constructive) 모호함"이라며 웃었다.

그린스펀의 모호한 화법은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는 스무살 연하인 앤드리어 미첼 NBC 기자와 84년부터 사귀어 97년에 결혼했다. 그는 96년에 두번이나 미첼에게 프러포즈를 했지만 미첼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고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그는 결국 그해 크리스마스에 "결혼식을 성대하게 할까, 조촐하게 치를까"라고 미첼에게 물었고, 그제야 프러포즈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미첼의 승낙을 얻어냈다. ('마에스트로' 밥 우드워드 지음)

그린스펀이 말을 모호하게 하는 것은 경제상황 및 금리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시장에 영향을 미쳐 막상 정책을 썼을 때 효과가 반감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는 대신 실제 정책에서는 선제적으로 기민하게 대응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1년 초와 9.11테러 직후엔 과감하게 금리를 내려 시장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이에 비하면 우리 금융당국의 발언은 직설적이다. 지난해 박승 한국은행 총재는 경제상황 및 금리에 대해 말을 앞세워 눈총을 받았다.

얼마 전엔 재정경제부 당국자가 환율 방어를 위해 발권력을 동원할 수도 있다는 화끈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직설적이고 화끈한 발언과 달리 실제 정책 및 조치는 타이밍을 놓칠 때가 많다는 게 시장의 평가다.

그린스펀 화법까지 기대하긴 힘들겠지만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는 금융당국을 보고 싶다.

이세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