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지금 '럭비 전쟁'

중앙일보

입력 2007.10.13 05:08

업데이트 2007.10.13 06:44

지면보기

종합 14면

"무찔러라(VAINCRE)."

6일자 프랑스 일간 피가로 1면 상단을 가득 채운 제목이다. 럭비월드컵 뉴질랜드와의 8강전 승리를 다짐하는 기사였다. 종합일간지가 그것도 결승전도 아닌 스포츠 기사를 이렇게까지 비중 있게 보도하는 경우는 이례적이다.

이날 프랑스가 예상을 깨고 세계 1위 뉴질랜드를 꺾자 프랑스 전역은 밤새 축제 분위기였다. 샹젤리제와 바스티유 광장을 중심으로 밤새 폭죽이 터졌고 자동차들의 경적 소리에 도시 전체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과 프랑수아 피용 총리는 경기를 보기 위해 영국까지 날아갔다. 대회 독점 중계사인 프랑스 민영방송 TF1의 이날 경기 시청률은 무려 64.9%에 달했다. 시청자 수가 1870만 명이었다. 광고료는 올 봄에 치러진 프랑스 대선 당시 사르코지-루아얄 후보 대담 직전 30초짜리 요금 13만 유로(약 1억6900만원)보다 20% 이상 비쌌다.

◆진정한 민족주의 싸움장=럭비가 유럽에서 이토록 큰 인기를 모으는 가장 큰 이유는 어느 종목보다 '민족주의' 경향이 짙기 때문이라는 게 언론과 현지인들의 설명이다. 우선 럭비의 본고장인 영국을 필두로 스코틀랜드.호주.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 사이의 경쟁심리다.

이들 국가 간에는 역사적인 앙금이 아직도 남아 있다. 더욱이 투기 종목을 방불케 하는 몸싸움과 팀워크가 생명인 특성상 럭비에서는 지지 않겠다는 강한 민족 감정이 묻어난다는 것이다.

한.일전 같은 영국과 프랑스의 라이벌 의식도 럭비의 또 다른 재미다. 두 나라의 앙숙 관계는 몸싸움이 많은 럭비 경기에서 종종 선수끼리의 폭력 사태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번에도 13일 준결승전을 벌이는 영국과 프랑스는 어느 쪽 관중이 '갓 세이브 더 퀸'과 '라 마르세예즈'를 더 크게 부르냐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또 다른 요인은 선수 구성에 있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프랑스 축구 대표팀의 경우 프랑스 태생의 백인 선수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때문에 장마리 르펜 같은 극우파 정치인들은 98월드컵 우승 후에도 "저건 프랑스 대표팀이 아니다"는 식의 발언을 해 빈축을 샀다. 하지만 럭비는 대부분이 프랑스 태생의 백인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스포츠는 축구가 아니라 럭비라고 여기는 의식이 프랑스 국민 사이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이번 월드컵은 체 게바라 40주기 효과도 톡톡히 보고 있다. 체 게바라는 청소년 시절 럭비클럽에서 명성을 날린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르헨티나가 4강에 오르면서 체 게바라 추모 열기와 함께 럭비 열풍이 남미로까지 번지고 있다.

파리=전진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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