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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인구 현재 남한의 30%-통계청 자료로 본 개화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지금부터 약 1백년전인 1900년 우리나라의 정부 歲出가운데軍部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24.8%로 오늘날의 국방예산비중과거의 비슷했다.
또 1895년부터 3년동안 치러진 명성왕후(민비)장례식에는 쌀 4만4천3백섬에 해당하는 돈이 들었는데 이것을 지금 쌀값으로 환산해 보면 1백억원에 이르는 거액이다.이 장례비용은 당시정부내 경제부처와 교육부 예산을 합친 것보다도 많았다.
개화기의 범죄는 강도가 주류를 이루었다.1910년의 경우 인구 10만명당 23.9건의 강도가 발생했는데 이는 지난 92년(5.8명)의 4배수준이었다.반면 당시 10만명당 5.6건에 불과했던 詐欺는 92년 1백66.4건으로 폭증했다 .
28일 통계청이 동학혁명및 갑오경장 1백주년을 맞아 정리.발표한 통계자료는「開化期의 경제.사회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1910년 우리나라의 외국인 거주자는 18만4천명으로 작년말 현재 등록된 외국인(6만6천7백명)과 비교할 때 거의 3배에 달했다.외국인들은 1906년이후 4년동안 집중적으로 몰려들었는데 90%이상이 일본인이었다.
1906년 우리나라의 인구밀도는 평방㎞당 60명으로 작년 세계평균(41명)보다도 높았다.당시 전체 인구는 1천3백2만명으로 현재 남한인구의 30%수준이었다.
▲1910년 정부 국장급인 한국인의 한달봉급은 2천1백76원이었는데 일본인 공무원의 봉급은 우리나라 사람보다 2~3배 높았다.1898년 쌀 한섬 값은 8圓수준이었다.
또 대다수 경찰고위직은 일본인이 차지했으며,판.검사의 74%가 일본사람이었다.
▲1899년 서울에는 모두 4만2천8백76채의 집이 있었는데이중 69.6%가 초가집이었으며 30.4%는 기와집 또는 반기와집이었다.
▲1910년 5월을 기준한 가구별 직업은 농업이 84.1%로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으며 2위는 상업(6.2%),3위는 날품팔이(2.4%)였다.직업을 「양반」이라고 밝힌 계층도 1.9%(5만4천여가구)나 됐는데 이중 절반이상이 충청 도에 거주했던것으로 나타났다.
▲농가당 경지면적은 1.03㏊(1909년)로 작년의 1.29㏊와 별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80여년동안 가구당 경지면적이 25%밖에 늘지 않았던 셈이다.쌀 생산량(1909년)은 7백45만섬으로 작년(3천2백98만섬)의 22.6%에 불과했다.
소는 지금의 4분의 1,돼지는 10분의 1수준이었으나 말은 3만3천마리(1909년)로 지금보다 5배나 많았다.
▲1908년 제조업 현황을 보면 88개 공장이 있었으며 종사자는 3천4백21명에 불과했다.공장중 34개가 정미소였으며 전체 종사자중 38%가 일본인이었다.
1910년 서비스업 종사자는 14만명이었는데 이중 음식점 종사자가 약 30%를 차지했으며 날품을 파는 노동자가 26.6%,여인숙종사자가 11.9%,선원이 3.1%를 각각 차지했다.
▲書堂이 교육의 중추기관이었다.1910년 전국의 서당은 1만6천5백40개로 지역별로는 전남.평북.경기등의 순으로 많았다.
서당에서 공부하는 학생수는 14만1천6백명으로 서당당 약 9명이 수학했다.대부분의 서당에 훈장이 1명정도 있었다.
〈沈相福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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