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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기획 가짜 사냥] ‘진짜’ 농락한 ‘가짜’ 열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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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희대의 사기꾼들은 종종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인구에 회자되고는 한다. 되돌아보면, 시대마다 굵직굵직한 ‘가짜’들이 항상 있었다. 이들은 왜, 그리고 어떻게 진짜 행세를 했을까?


밤에는 피아노 조율사, 낮에는 호텔 보이. 별볼일없는 리플리의 삶.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만 기회도 없고 행운도 따라주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서글픔만 안겨 주던 뉴욕을 뜰 기회가 찾아온다. 선박 부호 그린리프의 눈에 띈 것. 그는 믿음직해 보이는 리플리에게 이탈리아로 가서 망나니 아들 디키를 찾아오라고 부탁한다. 이탈리아로 가기 전, 리플리는 디키의 정보를 수집한다. 디키가 좋아하는 재즈 음반을 들으며 그를 느낀다.

드디어 이탈리아행, 리플리는 프린스턴대 동창이라며 디키에게 접근한다. 어느새 디키의 연인 마지와도 친해진 리플리. 자신도 상류사회의 일원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평생 써도 바닥나지 않을 재산, 아름다운 여인, 달콤한 인생, 자유와 쾌락. 리플리와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불안해지는 마지. 계약기간이 만료되자 초조해진 리플리는 결국 진짜 디키가 되기 위해 그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한 번 가짜로 사는 달콤함을 맛본 리플리에게 어두웠던 과거의 진실로 돌아간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알랭 들롱의 명작 <태양은 가득히>를 리메이크한 영화 <리플리>는 ‘진짜 같은 가짜’가 되기 위해 시작한 거짓말의 말로를 잘 보여준다.

의학계에서는 이처럼 본인이 되고 싶은 상황이나 만들어낸 위치를 스스로 믿고 사는 사람들을 ‘리플리 효과’라고 부른다.

동경으로 시작된 자기 파멸. 신정아 사태가 우리에게 던진 충격은 컸다. 유명 화랑의 큐레이터, 대학 교수, 세계적 비엔날레의 총감독이 될 뻔했던 신정아라는 이름이 가짜 석·박사라는 포장된 지식으로 상식의 사회가 약속한 신의를 깨버린 희대의 사기꾼 이름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런 뻔뻔한 사람이 또 있을까? 이렇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비슷한 사례는 지면이 모자랄 정도로 많으니까.

세상을 뒤흔든 가짜, 아마 그 첫 번째 기록은 ‘가짜 이강석’ 사건이 될 것이다.

▶ 가짜 이강성 '강성병'

1. 1957년, 이강석 사칭 사건

- 대입 낙방 후 가출한 상습 사기꾼, 대통령 양자 사칭하다

1957년 8월30일 밤, 경북의 한 경찰서장은 걸려 온 전화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온 말은 “나 이강석이오”라는 한마디.

이강석은 1957년 3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이 83세 생일에 맞춰 양자로 들인 당시 국회의장 이기붕의 아들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경북도지사의 아들이 진짜 이강석의 친구인 줄 모르고 도지사 관사에서 묵으려다 체포됐다. 자유당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대에 벌어진 웃지 못할 사건이었다.

대학 입학시험에 낙방한 뒤 집을 뛰쳐나와 서울 등지로 돌아다니던 대구 출신의 사기꾼 강성병은 우연히 자신의 용모가 이강석과 비슷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는 마침내 1957년 8월30일, 경찰서장을 찾아가 “아버지의 명을 받고 경주지방 수해 상황을 살펴보러 왔다”고 거짓말을 한다. 이 말에 깜짝 놀란 경주경찰서장은 진위 여부도 확인하지 않고 즉시 그를 경주에서 가장 좋은 호텔로 극진히 모셨다.

다음날 서장은 강성병에게 경주 일대의 유적지를 관광시켜 주면서 많은 선물을 주고 기념 촬영을 한 뒤 다음 행선지까지 자기 차를 빌려 주었다.

자신감을 얻은 가짜 이강석은 그 차를 타고 영천으로 갔다. 연락을 받고 대기하던 영천경찰서장도 아무런 의심 없이 그를 환대했다.

영천경찰서 경무과장의 경호를 받으며 안동으로 간 이강석은 지방 유지들로부터 다시 융숭한 접대를 받고, 이들이 여비 및 수재의연금에 보태 써 달라고 내놓은 거금까지 챙겼다.

그의 사기 행각은 계속됐다. 강성병은 의성을 거쳐 대구로 향했다.

가짜 이강석이 대구로 가는 동안 육군 모 사단장은 지프를 몰고 달려와 노상에서 이강석이 육사 생도로 있을 때 자신이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있었다면서 어찌 그냥 가시느냐며 인사를 청하기도 했다.

강성병은 “아버지의 명령으로 암행어사로 나섰으니 나를 보았다는 말을 절대 퍼뜨리지 마시오”라고 엄하게 분부하며 다녔다. 칠곡까지 마중나온 경북경찰국 사찰과장의 안내를 받아 대구에 들어간 날 저녁, 가짜 이강석은 도지사 관사에서 묵게 됐다.

그런데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던 경북도지사가 진짜 이강석의 친구인 자기 아들을 불러 얼굴을 확인했다.

강성병의 기행은 이곳에서 끝났다. 이강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경북도지사는 서울에 확인 전화를 한 뒤 경찰에 연락해 그를 체포했다.

이 사건으로 한때 ‘귀하신 몸’이라는 유행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온 국민의 경멸과 조소를 불러일으켰다.

▶ 박인수

2. 1963년, 박인수 사건

-‘댄스홀’에서 만난 여성 70여 명 농락한 카사노바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 보호할 수 있는 것을 밝혀두는 바이다.”

1963년, 결혼을 빙자해 1년간 70여 명의 미혼 여성을 농락한 혐의로 기소된 박인수(당시 26세)가 혼인빙자간음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를 받는 순간이었다.

재판장 권순영 판사의 판결문은 그로부터 44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회자된다.

박인수는 해병대에 입대해 군생활을 하던 중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애인에 대한 복수심에서 이 같은 범행을 저질렀다. 그는 당시 한창 유행하던 ‘댄스’를 미끼로 약 1년 동안 무려 70여 명의 여인을 농락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상대가 대부분 적어도 고등교육을 받았거나 대학에 재학 중인, 지성을 갖추었고 당시 사회에서 선도적 지위에 있다고 자부하던 여성들이었다는 점이었다.

법정에서 그는 자신이 상대한 70여 명의 여인 가운데 처녀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음으로써 당시 사회를 전율시켰다. 이 사건으로 “자기 스스로 보호하지 않는 순결은 법이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유행했으며, ‘자유부인’ ‘사모님’ 등의 유행어가 속출했다.

박인수 사건은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던 1950년대 한국의 웃지 못할 풍속화였다. 자유로워진 성풍속도, 그러나 여성의 정조와 순결을 강조하던 윤리의 이중 잣대, 미군문화를 통해 전파된 춤바람과 댄스 홀…. 이 모든 새로운 사회·문화 코드의 조합이 박인수 사건으로 응축됐다.

대학 재학 중 한국전쟁 발발로 입대했던 훤칠한 미 청년 박인수는 해병대 헌병으로 근무하면서 해군장교구락부(LCI)·국일관·낙원장 등 고급 댄스 홀을 드나든다. 그는 1954년 제대한 이후에도 해군 대위를 사칭해 인기 댄스 홀을 휩쓸며 여성 편력을 한다.

박인수가 만난 여성들은 대학생이 대부분이었으며 정부 고관, 국회의원 등 상류층 가정 출신도 많았다. 검찰은 박인수를 혼인빙자간음죄로 기소했지만 이 죄는 친고죄였다. 정작 박인수를 고소한 여성은 둘뿐이었으며, 재판정에 증인으로 출두한 여성도 네댓 명밖에 안 됐다.

그는 또 “그들과 결코 결혼을 약속한 사실이 없으며, 약속할 필요도 없었다”며 “댄스 홀에서 함께 춤을 춘 후에는 으레 여관으로 가는 것이 상식화돼 있었으므로 구태여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빙자할 필요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권순영 판사는 피고 박인수에게 공무원 자격 사칭에 대해서만 2만 환의 벌금형을 부과했다. “댄스 홀에서 만난 정도의 일시적 기분으로 성관계가 있었을 경우 혼인이라는 언사를 믿었다기보다 여자 자신이 택한 향락의 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는 말에 이어진 무죄 판결 이유였다.

그러나 세간은 떠들썩했고 검찰은 항고했다. 항소심에서 박인수는 징역 1년형을 받았고 대법원 상고가 기각되면서 유죄가 확정됐다. “댄스 홀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 내놓은 정조가 아니라는 전제 하에, 고의로 여자를 여관으로 유인하는 남성이 나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 유죄 판결 이유였다.

▶ 수하은 체(본명 최은하)

3. 1968년, 수하은 체의 국적 위조 사건

-인도네시아인 행세 20년, 속고 속인 끝에 맞고소로 쇠고랑

수하은 체(Suh Fwa Oung The). ‘은하수’를 거꾸로 쓴 이름 ‘수하은’을 인도네시아어로 표기한 것이다.
이는 1964년 4월 남산에 있던 모 작명소에서 “이름을 ‘은하수’로 고치면 앞길이 트인다”는 말을 들은 최은하가 범행에 사용한 가짜 이름이다.

경찰은 1964년 5월 최씨가 인도네시아협회를 만들 무렵부터 그의 국적을 수상히 여겼으나 한국과 인도네시아 간에 국교가 열리기 전이어서 조회할 길이 없어 내사만 하던 중 ‘가짜’끼리의 맞고소로 그 정체를 밝혀냈다. 수사당국자는 최를 ‘제2의 가네시로’로 명명했다.

최씨가 ‘인도네시아’인으로 행세한 것은 6·25직후부터. 1·4후퇴 때 제주도로 피란 갔다가 경찰의 검문검색이 심해지자 인도네시아 말을 아는 것을 계기로 인도네시아인 행세를 하며 자신의 불투명한 호적 등을 얼버무리려 한 것이었다.

최씨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군함의 선원으로 인도네시아에 종군했다. 종전이 되고 1947년 고국으로 돌아오기까지 약 5년 동안 최씨는 인도네시아에 머무르면서 인도네시아 말을 배웠으며, 이것이 국적을 속인 동기가 됐다.

최씨는 매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북 익산에서 김 모 여인의 사생아로 태어났으나 여섯 살 때 가출해 거지생활을 하다 열네 살 되던 해 최 모 씨가 운영하는 익산의 한 철공소에 직공으로 취직했다. 이곳에서 주인 최씨의 성을 따라 입적했기 때문에 진짜 성은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 귀국한 뒤에도 의지할 곳 없는 단신으로 익산 등지에서 어부로 전전하기도 했으며 한때는 구호물품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1964년 초 상경하기까지 결혼만 세 번. 그 해 5월 ‘한·인도네시아협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그의 본격적인 사기 행각이 시작됐다.

방한 인도네시아인들과 교제하는 등 발이 넓어지자 1967년 10월 김성태(당시 47·사기 혐의로 구속) 씨가 찾아와 “인도네시아에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최씨는 김씨를 우선 한·인니협회 지도위원으로 임명한 후 “인도네시아로 해녀와 산림 개발 기술자 2,800명의 인력 수출을 추진 중인데, 이것이 성사되면 선발대의 인솔 책임자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하고 협회 운영비, 방한 인도네시아인 접대비 등의 명목으로 50만 원을 받아 썼다.

그러던 중 1968년 4월12일 인도네시아의 상원의원 ‘마리프’가 주한 인도네시아 총영사관 개설 준비 사절단장으로 오게 됐다. 이에 김씨는 최씨와의 인연을 끊고 ‘마리프’ 사절단장 보좌관을 자칭하며 YMCA 601호실에 임시 사무실을 두고 최씨가 마리프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연막을 쳤다.

화가 난 최은하는 그해 5월11일 치안국에 “김이 인도네시아로 홍삼을 수출해 준다고 이 모 씨를 속여 18만여 원을 사기해 먹었다”고 고소했고, 김도 “최한테 사기 당했다”고 맞고소를 제기해 결국 둘 다 철창 신세를 지게 됐다.

▶ 박재욱

4. 1985년, 박재욱 일당 정변 사기극

-“쿠데타 성공 확실… 자금 대면 봐준다”

10·26 직후, 예비역 대위 출신 박재욱은 임관 동기생 김인한과 그의 지인인 정치 브로커 윤덕진을 만난다. 박재욱은 자신을 예비역 장성이라고 소개한 뒤 “이제 곧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며 자신을 정변 세력의 주도자로 과시했다.

그는 자신의 계획에 동참하면 집권 후 모 부처 책임자 등으로 중용하겠다며 이들을 범행에 끌어들였다. 박씨는 1980년 3월 한국도로공사 부사장 정훈(전 건설부 도로국장) 씨에게 자신의 정변 계획을 설명하고 집권 후 중용하겠다고 속여 1985년 9월까지 모두 1,435만 원을 받았다.

1982년 4월 중순, 김인환은 공범 김정만을 부산 동아수산 대표 손범용(36) 씨에게 접근시켜 집권하면 사업을 지원해 주겠다고 회유했다. 물론 활동자금조로 돈을 받아 챙기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일당은 1,500만 원을 받아 이 중 1,000만 원을 주범 박씨에게 전달하고 나머지 500만 원을 김정만과 반씩 나누어 가졌다.

오랜 군사독재의 경험 때문이었는지 이들의 대범한 거짓말에 대부분의 사람이 속아 넘어갔다.

브로커 윤덕진도 자신의 넓은 인맥을 사기극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윤씨는 1980년 11월, 한국도로공사 부사장 정훈 씨를 통해 알게 된 삼부토건 조정구 회장에게도 사기극을 벌인다. 이번에는 공범 최달희를 접근시켜 정권 인수 후 사업을 지원해 주겠다고 말하는 수법으로 활동자금 3,000만 원을 받아 챙겼다.

주범 박재욱은 이 같은 사기극을 위해 “새 정부는 나를 주축으로 육사 출신 장군 그룹이 맡게 될 것이며, 미국 측과 정권 수립에 관한 각서에 서명했다. 미 중앙정보국(CIA)과도 접촉하고 있으며, 오산비행장을 통해 미군기로 미국을 왕래하며 정국을 협의한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지관 장 모 씨를 통해 알게 된 제9대 국회의원 박주현(62) 씨가 이런 유언비어를 평소 알고 지내던 변호사 박영호 씨에게 전했고 1985년 4월, 박 변호사가 다시 민헌연(민주헌정연구회) 상임이사 김충기 씨 등에게 전해 시중에 정변설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괴상한 소문은 검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검찰은 즉각 정변설의 진원지를 추적했으며, 이 과정에서 사기극의 전모가 드러났다. 검찰은 주범 박재욱을 포함해 그 일당을 사법처리했으며, 정변설을 듣고 이를 과장해 시중에 유포한 변호사 박영호는 법무부의 징계를 받았다. 민헌연 상임이사 김충기·고재숙 등 4명은 경고 조치했다.

검찰 관계자는 이와 함께 이들에게 돈을 준 삼부토건 회장 조정구 씨 등 8명에 대해서는 사기 사건의 피해자로 드러나 형사처벌은 안 했지만 “정변설에 돈을 댄 행위는 지탄받아야 하기 때문에 엄중한 주의를 주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또 이 사건이 “10·26 직후의 정치적 혼란 및 최근의 학생 소요 등 사회적 불안정을 이용한 고도의 정치 사기극이었으며, 현실에 불만을 가진 일부 계층과 기회주의자들이 비정상적 출세욕에서 이 같은 정변설에 현혹돼 금품을 제공하거나 유언비어를 유포했다”고 밝혔다.

▶ 린다 김

5. 2000년, 린다 김 사건

-미모의 무기 거래 로비스트 한국 고위층 흔들다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의 부적절한 관계가 드러난 신정아 씨와 린다 김은 권력형 로비 스캔들이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하고, 더욱이 두 여성의 행보와 외모가 유사한 점이 많아 언론에서도 둘을 ‘닮은꼴’로 비교하고 있다.

린다 김은 최근 측근을 통해 “언론에서 나와 신정아가 비슷하다고 하는데, 나는 세계적 무대에서 각국 고위 인사를 상대로 일하는 로비스트지만 신정아는 개인의 이익을 좇아 학위를 위조해 다른 사람을 속이고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사기꾼”이라고 밝히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미국 명문대를 나온 엘리트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매력 넘치는 여성 사업가. 린다 김(당시 47·김귀옥)은 2000년 5월 초 언론의 추적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그럴 듯하게 포장돼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부적절한 관계’라는 말만 유행하게 했을 뿐 엘리트도 아니고, 여성 사업가도 아니었다. 국내에서 가수활동을 하다 미국으로 건너간 뒤 로비스트로 변신했다는 사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린다 김의 알려진 신상명세는 1953년 경북 출생으로 초등학교를 대구에서, 중·고교를 서울에서 다닌 후 20대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것 정도. 그러나 이것도 린다 김이 1975년 출국 때 작성한 서류에는 ‘서울 H대 중퇴’라고 적은 것을 보면 확실한 것은 아닌 듯하다. 한때는 버클리대 박사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린다 김은 1998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3세 때 세계적 무기 중개상 카쇼기 밑에서 일하면서 중동지역을 무대로 무기 중개업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최근 김씨는 자서전 <코코펠리는 쓸쓸하다>(서울문화사)를 내고 SBS 토크쇼 프로그램에 출연해 여고생 때 재벌 2세와의 동거, 서울 명동의 한 미용실에서 한국 현대사 ‘원조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 정인숙을 알게 돼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을 만났던 일 등에 대해 이야기해 화제가 된 바 있다.

이야기의 발단은 11년 전인 1996년 6월로 올라간다.

당시는 국방부 통신 감청용 정찰기 도입 사업인 ‘백두사업’의 납품업체로 미국 감청장비 제조업체인 E시스템사가 최종적으로 선정되기 전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최종 재가가 나기 바로 3개월 전.

국방장관 이양호(63) 씨는 시내 모처에서 청주고 선배인 정종택 전 의원의 소개로 린다 김을 만난다.공군 파일럿 출신인 이씨는 천신만고 끝에 국방장관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로, 문민정부의 하나회 분쇄정책의 대표적 수혜자. 그러나 장관에 오를 때부터 구설수에 시달린 데다 수뢰 사건으로 장관직에서 해임된 뒤 구속되기 전까지도 자질 시비에 휘말려야 했다.

이씨는 린다 김을 만난 지 한 달 만에 편지를 보내기 시작해 잇달아 세 통의 편지를 보냈다. 같은 해 7월에는 국군기무사령부가 그의 불법 로비 혐의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수사 과정에서 문민정부 국회 국방위원장을 지낸 황명수 전 의원도 김씨를 소개받고 서로 알고 지내온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은 김씨가 벌인 로비에 대해 언론이 문제를 제기하기 전인 4월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한 뒤 재수사 여론을 외면했다.

그러나 법원은 검찰이 재수사에 나서지 않자 1심 선고일인 2000년 7월7일 그를 법정구속했다. 법원은 그 해 9월 항소심에서 김씨를 집행유예로 석방했다.

그 뒤 김씨는 미국으로 출국해 버렸다.

▶ 오선화(본명 오승일)

6. 2006년, 오선화 ‘新친일파’ 사건

-일본에서 ‘양심적 한국 지식인’ 대우 받던 여인, 알고 보니…

오선화는 1983년 27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우에노에 있는 한국 클럽 ‘뉴태양’에서 호스티스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일본인 남성 기요츠카 마고토를 만나 5년간 동거한다. 한국어 학원을 운영하던 마고토는 “오씨가 영리해 자신의 비서로 일하게 했으며, 이후 동거까지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오씨는 마고토의 비서로 일하며 학원에서 잡담 식으로 나오던 이야기를 1년 이상 받아 적어 1990년 <치마바람>이라는 책을 발행하기에 이른다. 이 책은 곧 베스트셀러가 됐다. 마코토의 주장에 따르면 오씨는 <치마바람>을 저술할 당시 엽서 한 장도 스스로 마치지 못할 정도의 일본어 실력이었으나, 여러 명의 대필자를 통해 저술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오씨의 글을 대필한 한 우익 성향의 잡지사 기자는 “나는 이제 오선화 씨와 관계없다. 이제는 다른 사람이 (대필을) 하고 있다”고 증언해, 오씨의 저서가 대필로 쓰여졌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책은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 접대부의 실태를 다루면서, 일본에 유학하는 많은 한국 여성이 부자 애인을 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오씨는 당시 저서에서 자신을 여군 출신에 대구대를 나왔으며 호스티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오씨의 출신지를 조회해 본 결과 본명이 오승일인 것으로 나타났고, 1951년 생 오선화나 오승일 어느 이름도 여군에 복무하고 대구대를 졸업한 사람은 없었다. 이 과정에서 오선화라는 이름은 그가 술집 접대부로 일할 때 쓰던 이름이라는 것도 밝혀졌다.

게다가 오씨는 1998년 10월29일 한국 국적을 완전히 포기하고 일본으로 국적을 바꿨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즉, 한국인이 아니면서 한국인 행세를 했던 것이었다.

<치마바람> 발간 후 오씨는 “창씨개명은 하고 싶은 사람만 한 것이지 강제적인 것이 아니었다” “강제동원한 ‘종군위안부’란 존재하지 않는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죽은 자의 영혼을 모시는 행사로, 침략전쟁과 관계없는 것이다” 등 일본 우익의 입맛에 맞는 발언을 계속했다. 그의 친일 발언은 그가 특히 ‘한국인’이었다는 점에서 화제가 되어 일본 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오씨는 현재 일본 우익 성향 대학인 다쿠쇼쿠대 국제개발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고액의 강연활동과 15년간 40여 권의 책을 내는 활발한 저술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 (좌) 가짜 박상민 '임 모 씨'
(우) 진짜 박상민

7. 2007년, 가짜 박상민 사건

-진짜, 가짜를 고발하다

<무기여 잘 있거라><해바라기> 등의 히트곡을 부른 가수 박상민(40)을 4년여 동안 사칭하고 다닌 임 모(41) 씨와 임씨의 매니저 김 모(35) 씨가 2006년 12월 경찰에 붙잡혔다.

박씨는 “가짜 박상민 때문에 각종 오해가 빗발쳤고, 한때 행사 섭외가 없어 경제적으로 힘들 만큼 큰 타격을 받기도 했다”고 밝혔다. 임씨는 ‘진짜 박상민’ 행세로 밤무대에서 한 달에 4,000만~5,000만 원까지 벌어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사기 행각은 2003년 임씨의 매니저 김씨가 먼저 박상민 사칭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임씨는 수염과 선글라스, 모자 등의 차림새를 박상민과 똑같이 꾸미고 박상민의 노래를 틀어놓고 입 모양만 따라 하는 이른바 ‘립싱크’ 공연을 했다. 심지어 공연 후에는 손님들에게 ‘박상민’이라는 이름으로 사인까지 해줬다.

유명 가수마다 그들을 모방한 가수가 한두 명씩 있게 마련. 하지만 임씨는 통상적인 모방가수와 달리 자신이 모방가수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임씨가 출연한 유흥업소에서도 임씨가 ‘가짜 박상민’인 것을 알면서도 무대에서 임씨를 ‘진짜 박상민’으로 소개했다. 일부 나이트클럽에서는 ‘특별출연 인기 가수 박상민’으로 광고해 마치 박상민이 직접 출연하는 것처럼 꾸미기도 했다.

임씨는 작년 말까지 경기도 성남·일산과 서울 신림동 등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지방 특산물 축제에서도 박상민 행세를 했다. 결국 임씨는 박상민 측이 작년 6월과 12월 사기와 저작권법, 부정경쟁방지법 등으로 고소하면서 덜미가 잡혔다.

하지만 임씨는 경찰에서 “자신은 ‘박성민’이라는 예명으로 모방가수 활동을 해왔다”며 “사인을 빠르게 하다 보니 ‘박성민’이 ‘박상민’으로 쓰여졌을 뿐”이라고 혐의를 부인했다.

이후 검찰에서는 2007년 6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박상민과 임씨의 대질심문이 있었다. 당시에도 임씨는 박상민과 똑같은 차림새로 나타나 일부 기자들이 ‘진짜 박상민’과 ‘가짜 박상민’을 혼동하는 소동이 벌이지기도 했다.

검찰은 이 사건을 임씨와 매니저 김씨, 그리고 임씨가 출연한 유흥업소의 합작품으로 결론내렸다. 그러나 친고죄의 특성상 박상민이 고소장을 제출하지 않은 나이트클럽 업소 측은 기소 대상에서 빠졌다.

임씨와 매니저 김씨는 부정경쟁방지법으로 불구속 기소됐다. 종래까지 물건에만 적용되던 부정경쟁방지법은 이 사건에서 처음으로 사람에게도 적용됐다.

이원형 월간중앙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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