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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차에도 불법주차 딱지(경찰과 시민사회:1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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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법대로” 엄정 집행… 독립성 확립/“창설후 정계진출 간부 전무” 긍지/영국
런던 킹즈 크로스역 주변 유흥가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91년 10월2일 자정을 한시간쯤 앞둔 으슥한 밤거리에서 하룻밤을 20파운드에 파는 「거리의 여자」에게 고급승용차가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차를 몰고 나타난 50대 노신사와 22세 여인이 흥정을 마칠 무렵 야간순찰을 돌던 경찰관이 나타났다.
경찰관은 노신사와 여인을 검문,인적사항과 여인의 매춘혐의를 조사하고 돌려보냈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사건처럼 보였지만 다음날 아침 영국의 검찰총장은 사직서를 내고 휴양지로 떠나버렸다.
노신사가 바로 현직 검찰총장이었던 것이다.
경찰의 힘과 수준은 「법대로」 집행할 수 있는 능력에서 절대적으로 판가름 난다.
경찰이 금력이나 권력으로부터 얼마나 초연한 법집행 태도를 갖느냐는 그 나라 경찰이 국민으로부터 얼마만큼 신뢰를 받고 있느냐와 직결된다.
베를린 23경찰서 미햐엘 뮐러 경사로부터 들은 독일 경찰의 엄정한 법집행도 선진경찰의 한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함부르크주 경찰관이 음주운전을 하던 신사를 단속했다. 다급해진 신사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선처를 요구했다. 신사는 함부르크주 지방자치경찰을 지휘하는 내무장관.
하지만 경찰관은 곧이곧대로 음주측정기를 들이댔고 허용치를 초과하자 벌금과 면허정지처분을 내렸다. 사건은 곧 언론에 보도됐고 내무장관은 공직을 떠났다. 음주운전을 한 불법행위보다 공직을 내세워 단속을 피하려 했다는 사실이 더 비난받았다.
선진국에선 일정 수수료만 내면 자신이 원하는 번호나 단어로 자가용 번호판을 달 수 있다. 주영 한국대사관의 차량번호는 「대한민국」의 영문 약자인 「ROK」로 시작한다. 누구나 돈내고 원하기만 하면 「장관」이나 「검찰총장」이라고 쓰인 번호판도 달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특권이나 특혜를 의식한 차량번호판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봐야 아무런 반대급부가 없기 때문이다. 총리전용 차량도 불법주차하면 딱지를 떼는 경찰관 앞에는 특권이 존재하지 않는다.
영국경찰은 영미법계를,독일경찰은 대륙법계를 대표하는 경찰로 유명하다. 대개 영미법계 경찰은 경찰이 수사권을 갖고 대륙법계 경찰은 검찰이 수사권을 갖는다.
그러나 제도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선진경찰은 「법앞의 평등」을 실천하다는데는 엄정하기가 똑같다.
주워진대로 권한을 행사하는 경찰의 당당함은 피의자 체포로부터 재판 종료 때까지의 권한과 의무를 규정한 제도로 뒷받침받는다. 수사기관이 피의자를 체포,수사에 착수할 수 있도록 체포장 청구권이나 영장없는 체포권도 제도와 규정으로 보장하고 있다. 임의동행을 빌미로 한 강제연행 시비를 원천봉쇄하기 위해서다.
다만 피의자 체포권은 48시간 이내에 검찰이나(일본) 치안판사의 검증을 받음으로써(영국) 월권의 소지를 견제하고 있다. 이를 어기고 피의자를 구금하거나 기소하면 반드시 불법수사 책임을 묻는다.
경찰의 중립적 법집행은 경찰을 단순히 집행·단속기관으로 규정한데서도 비롯된다. 영국경찰은 오락실 영업허가권 등 행정처분권을 갖지 않는다. 그같은 권한행사와 관련된 규칙제정권도 없다.
이는 경찰이 이권에 개입할 소지를 사전 차단하기 위해서다. 이해당사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단속업무가 독립성을 확보하고 당사자간의 불만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경찰의 중립성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영국경찰도 정부로부터 예산을 배분받고 정부가 경찰청장의 임면 등 인사권을 갖고 있어 국가정책을 외면한 경찰권 행사는 하지 않는다. 국가경찰의 경우 내무부로부터 1백% 예산지원을 받고 지방자치경찰은 내무부로부터 예산의 51%를 지원받는다. 국가경찰인 런던의 수도경찰청은 예산업무를 전담하는 재무관을 두고 있다. 재무관의 연봉은 총리보다 높다. 이 재무관은 과학적인 예산집행과 세입·세출의 공정성을 확보하면서 정부의 부당한 간섭이나 입김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지방자치경찰은 자치단체의 경찰위원회가 중앙정부의 간섭을 막고 예신잡행을 감시한다. 경찰위원회는 3분의 2가 당적을 가진 여야 지방의원들로,3분의 1은 치안판사들로 구성돼 경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는 안전판 구실을 한다.
경찰청장 임면권과 예산을 지원하는 내무부,49%의 예산을 심의하고 경찰청장 임면 추천권 등을 행사하는 경찰위원회,그리고 경찰정책의 집행권을 갖는 경찰청장 3자간의 견제와 균형이 영국경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수도경찰청 윔블던경찰서의 한 간부는 영국경찰이 정치적 독립을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세계경찰의 모범생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데는 무려 3백여년이 걸렸다. 그 기간중에 경찰조직을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한 간부가 없었다는 전통이 영국경찰의 자랑거리다.』
결국 경찰의 독립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를 지키려는 국민과 거기에 부응했던 경찰의 당당한 법집행 자세가 어우러져 확립된 것이다.
내무부 치안본부에서 경찰청으로 변신을 꾀한지 4년째를 맞이하는 우리나라 경찰이 진정한 「독립」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참고할만하다.
◎정치적 중립 거리 먼 한국/고위간부 인사권도 내무부장관이 행사/임기보장안된 경찰청장 눈치보기 급급
우리 경찰은 내무부 산하 치안본부에서 91년 경찰청으로 승격되면서 외견상 독립을 시도했지만 실제 운영은 그렇지 못하다. 아직도 경무관 이상 경찰 고위간부의 인사권과 경찰청장 제청권이 내무부장관에게 있고 여전히 경찰청은 내무부의 산하기관 노릇을 하고 있다.
각종 선거업무를 집행하는 내무부의 관장아래 있다보니 자연히 선거에 관여하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친여 전위조직이란 인상을 주고 있다. 선거철만 되면 일부 경찰은 조직적으로 특정지역구 후보를 「관리」해주고 그 대가로 인사상 혜택을 받는 예가 비일비재하다.
또 경찰청장의 임기가 보장되지 않은 것도 정치적 중립의 한 걸림돌이 되고 있다. 경찰청장이 위에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위치에 있는한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역대 경찰청장(치안본부장 포함)이 평균 1년을 못넘긴 것을 봐도 얼마나 정치적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역대 청장 대부분은 재임때 소신있게 일을 추진하기 보다 인책당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또 퇴임후 정치권이나 장·차관,시·도지사 등으로 낙점받기 위해 위쪽의 눈치를 잔뜩 보고 있는 것이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 경찰이 정치적 중립을 이루어 당당하고 예외없는 법집행을 하는데는 가로막고 있는 난관이 너무 많다. 이는 경찰·국민·정치권력 모두의 대오각성과 국가전체의 선진화와 병행해 시간을 두고 관철할 수 밖에 없을듯 하다.<권영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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