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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의 미래를 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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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04면

사냐 이베코비치의 39양귀비 프로젝트39

예술, 정치 현실을 발언하다
피를 뿌려놓은 듯 붉은 광장이 눈을 확 끌어당긴다. ‘카셀 도쿠멘타 2007’(6월 16일~9월 23일)의 주 전시장인 ‘프리데리치아눔 미술관’ 앞에 도착했을 때, 미술 순례자를 맞은 건 바람에 하늘거리는 양귀비꽃 천지였다. 사냐 이베코비치의 작품 ‘양귀비’는 전시가 이어지는 100일 동안 이 광장을 지키다가 자연스레 져버릴 것이다. 독일 현대미술의 거장 요제프 보이스가 심은 떡갈나무 옆에서 핏빛 ‘양귀비’는 죽음의 상징으로 피어났다.
‘양귀비’는 ‘정치적 발언’이 강한 ‘카셀 도쿠멘타’의 정신을 한눈에 보여주는 상징 같은 작품이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무장세력의 주 수입원은 그곳 농부가 키우는 양귀비, 즉 마약이다. 미군은 주요 양귀비 산지인 헬만드주를 집중 공습해 탈레반의 목을 조인다. 모순되게도 이 마약의 주 소비지는 미국이다. 작가는 양귀비꽃밭 앞에 선 관람객이 오늘도 어디선가 계속되는 전쟁과 희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어디선가 귀에 익은 노래가 흘러나온다. 우리의 운동가처럼 들리는 그 합창의 주인공은 광장 위쪽에 선 회전목마다. 유럽 주요 도시에 서 있는 왕과 장군의 동상을 소재로 작업하는 안드레아스 지크만은 이번에도 광장에 선 동상 주변에 돌아가는 구조물을 만들고 공권력의 횡포를 고발한다. 인종차별과 정치적 폭력을 담은 그림이 회전목마 대신 빙글빙글 돌아간다. 1980년대 한국 사회의 상황을 미술로 묘사했던 ‘민중미술’이 저절로 떠오른다.
‘도쿠멘타 할레’ 전시장에서 만난 ‘붉은 방’은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다. 창문 한쪽을 새빨갛게 착색한 스페인 작가 이니고 망글라노 오발레는 방 한가운데 군용 라디오 한 대를 배치했다. 붉은색을 바라보며 일방적 정보를 듣던 관객은 눈을 밖으로 돌리는 순간, 착시 현상으로 온통 파랗게 보이는 세상을 발견한다. 강력한 언론통제를 수단으로 한 우민정책, 즉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정치세력의 비유인 셈이다.
정치색과 함께 올 ‘카셀 도쿠멘타’가 드러낸 현대미술의 주요 흐름은 여성주의(페미니즘)와 자연주의다. 초대작가 중 반이 여성이다. 21세기 첫 10년에 두드러진 미술 사조를 잡아내지 못한 세계 미술계는 이제 여성주의에 주목한다. 섬세한 바느질 작업으로 전시장을 채운 코지마 폰 보닌, 유리집과 일기로 여성의 섬세한 내면을 드러낸 마리 켈리, 사진작업으로 카펫을 직조하듯 현대판 만다라를 창조한 조피아 쿠리크 등 여성 작가의 작품이 주목받았다.

‘카셀 도쿠멘타’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 독일 현장 취재

스페인 작가 이니고 망글리노 옵발레가 만든 붉은 방

‘카셀 도쿠멘타 12’의 주제는 ‘현대성(modernity)? 삶(Life)! 교육(Education):’. 각기 ‘모더니티는 우리의 구제도인가’ ‘헐벗은 삶은 무엇인가’ ‘문화교육적인 면에서 무엇이 행해져야 하는가’를 미술로 물었다. 부부 큐레이터인 총감독 로저 M 뷔르겔과 루트 노악은 몹시 진지한 이 질문들로 점차 세련된 자본주의 시장의 총아로 변질돼 가고 있는 현대 미술에 물음표를 달았다. 초대 작가도 서구 중심이 아니라 아프리카와 제3세계 작가가 많아 화려하고 세련된 스타 중심의 다른 국제 미술전과 비교됐다.
때로 20세기 미술의 총정리 같기도 한 전시장을 물러나오며 지금 우리 미술계가 물어야 할 질문이야말로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에게 현대성은 무엇일까? 미술은 남루한 우리의 삶을 감싸 안고 있는가! 미술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의 욕구를 평등하게 실현하는 교육이 이뤄지고 있나.

DOCUMENTA KASSEL

마르코 레한카의 39뮌스터를 위한 꽃39

카셀(Kassel)은 독일 중부의 평범한 중소 도시다. 군수산업의 중심지였던 까닭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집중 폭격을 맞아 시 전체가 쑥대밭이 된 아픔을 겪었다. 전쟁이 끝나고 10년 뒤. 시민들의 쓰라린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시는 다소 도발적인 축제 하나를 준비했다. 1955년 출발한 ‘카셀 도쿠멘타(Kassel Documenta)’다. 패전의 상처만 가득했던 무명의 도시는 5년마다 열리는 현대미술의 큰 잔치로 삶의 활기를 얻었다. 시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시민축제로 거듭난 이 행사는 이제 12회를 맞아 지역경제의 활력소로도 큰 구실을 하고 있다.

로즈마리 트로켈의 나무 설치물

세계 미술 노크하는 중국의 저력- 한국인 ‘아트 가이드’ 이강연씨

올해 ‘카셀 도쿠멘타’ 조직위는 세계 각지에서 찾아오는 미술 순례자를 위해 ‘아트 가이드’를 포함한 교육 프로그램을 강화했다. 영어·프랑스어·스페인어 안내 외에 동아시아권(한국·중국·일본)을 새로 만들어 세 나라 출신 ‘아트 가이드’를 뽑았다. 한국인으로는 처음 ‘아트 가이드’로 활동하고 있는 이강연(29·카셀 미술대학)씨를 만났다.
-‘아트 가이드’의 역할은 무엇인가.
“전시 준비가 마무리에 들어간 6개월 전부터 ‘카셀 도쿠멘타 12’ 전반에 관한 교육을 받고 출품작에 대한 이해와 행사 성격을 파악했다. ‘아트 가이드’ 80명은 전시장에 배치돼 정기적인 전시 설명회를 맡는다. 카셀을 찾는 외국인 가운데 중국인과 한국인이 특히 증가하는 추세여서 아시아권이 추가됐고, 한국어 전시 설명이 안내 프로그램에 포함된 것으로 안다.”
-전시 주제에 ‘교육’을 명기했을 만큼 미술 교육을 강조하고 있는데.
“미술을 알고 싶어 하는 일반인을 위해 만든 충실한 교육 프로그램이 ‘카셀 도쿠멘타’의 특징이다. ‘하인리히 뵐 장학재단’의 재정 지원으로 다양한 계층을 위한 미술 강좌가 이어진다. 예를 들어 시각장애인을 위한 미술 이해 프로그램, 병원 환자가 만나는 미술전, 어린이가 즐기는 현대미술 등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행사가 푸짐하다.”

skulptur-projekte mnster
사람들은 독일 북서부의 자그마한 도시 뮌스터를 ‘성소의 도시’라 부른다. 유서 깊은 가톨릭의 중심지로 시 도처에 선 해묵은 성당 건물이 도시의 인상을 경건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뮌스터는 ‘자전거의 도시’로 유명하다. 이런 특성 덕에 시 전체 지형이 아담하면서도 고풍스럽고 시민을 위한 녹지 공간이 풍부하다. 77년 시작한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skulptur projekte munster)’가 시 전체를 일종의 전시장으로 해 ‘공공 장소에서의 미술’을 축제의 주제로 내걸게 된 까닭이다. 10년마다 도시 공간과 미술의 만남을 실험해온 이 프로젝트는 올해 4회째를 맞아 뮌스터의 자부심이 되었다

숨은 조각 찾기의 즐거움
눈을 들면 어디나 하늘 위로 솟은 성당의 뾰족탑이 보인다.
성당, 또 성당이다. 신에게로 더 가까이 가고자 했던 보통 사람의 애절한 마음이 묻어난다. 뮌스터란 도시 이름 자체가 성당을 가리키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첫인상이 아담하고 단단하며 신앙심 깊은 촌부를 연상시킨다. 자전거 도시로 이름난 만큼 거리 곳곳을 가로지르는 자전거 물결 또한 장관이다.
이제 뮌스터는 또 하나의 자랑거리로 도시의 풍모를 새롭게 한다.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07’(6월 17일~9월 30일)가 이 참한 대학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10년마다 열리는 이 공공미술 야외 조각전에 보내는 시민들의 성원은 대단하다. 7년째 뮌스터에서 조각 공부를 하고 있는 이문호(쿤스트 아카데미 마이스터 슐러)씨는 “조각 프로젝트의 해가 다가오면서 시 전체에 넘치는 에너지를 강하게 느꼈다”고 전했다. 2년마다 열리는 미술축제인 비엔날레가 세계 각국 도시에서 우후죽순처럼 창설되는 요즈음, 70년이란 긴 세월을 응축해 시 곳곳에 공공 조각을 세우고 즐기는 뮌스터 시민의 자부심이 놀랍다.

중앙역에서 기차를 내려 거리로 나서자마자 ‘숨은 조각 찾기’가 시작된다. 36명 작가가 만든 34점에 이미 세 번에 걸친 프로젝트 때 설치된 작품까지 70여 점이 넘는 보물을 만나야 한다. 따로 마련된 안내 센터에서 작품이 설치된 지점의 상세한 지도와 자료를 얻었지만 어디에 들어앉아 있는지 발견하기가 만만치 않다. 술래잡기 놀이의 술래가 된 듯 조바심이 난다.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살핀다. 도시 풍경이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뮌스터란 도시와 만나는 순간이다.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가 의도한 것이 이 순간 아닐까.
‘아, 하나 찾았다’. 독일 여성 작가 이자 겐츠켄이 성당 앞 작은 광장에 설치한 ‘무제’ 작품이다. 12개의 찢어지고 망가진 양산과 파라솔 밑에 누더기 인형과 잡동사니를 늘어놓았다. 우리 무속에서 갖가지 잡물을 쓰듯 겐츠켄은 현대판 봉헌물 또는 굿판을 벌여 놓고 상처받은 영혼을 달랜다. 명품점 거리 벽에서 마르코 레한카의 ‘뮌스터를 위한 꽃’을 발견했다. 서핑 보드를 꽃잎 삼은 이 아름다운 작품은 이번 행사의 상징처럼 밝고 화사한 빛을 발한다.
좀 멀리 걸어 나가 보았다. 오락가락하는 빗속에 인공호수인 ‘아(Aa)’ 옆에서 로즈마리 트로켈의 식물 작품을 만난다. 언뜻 보면 영국식 장원의 주목 두 그루 같은 설치물로, 가늘고 긴 틈새가 다양한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호수 변에서 소리 한 자락을 들었다. 수전 필립스의 ‘잃어버린 반향’이다. 호수를 잇는 다리 양쪽에 스피커 8개를 달아 옛 노래를 흘러나오게 한 오디오 설치물이다. 작가 자신이 부르는 슬프고도 서러운 노래를 들으며 호수 수면을 바라보면 문득 ‘잃어버린 자아’를 어디선가 만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교외 나지막한 동산에 갑자기 발굴 현장 하나가 나온다. 기욤 바일의 ‘고고학적 터’다. 마치 진짜 옛 교회가 발굴된 듯 꾸며 놓은 장소다. 이 작가는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미는 작업으로 이름났다. 초현실적이면서 재미난 이 시리즈에 그는 ‘미안 오브제(sorry objects)’라는 제목을 붙였다.
도시 한복판에 마구간이 등장하고(마이크 켈리의 ‘접촉할 수 있는 동물원’), 피라미드를 거꾸로 세워 놓은 엄청난 규모의 흰 콘크리트 분지가 펼쳐진다(브루스 나우만의 ‘움푹한 광장’). 고개를 들어 빌딩 숲 사이를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마크 월링거의 ‘지역’까지 보고 나니 어둡고 침울해 보이던 독일 하늘이 따듯하게 다가온다. 뮌스터의 ‘숨은 조각 찾기’ 속에서 현대미술이 할 수 있는 일을 새삼 발견했다.

-전시가 시작된 지 두 달이 지나 종반부로 접어들고 있는데 특별히 느낀 점이 있다면.
“전시장을 둘러보면 중국인 관광객이 놀랄 정도로 많다. 130여 명의 참가 작가 중 중국 작가가 7명이나 된다. 한국 작가는 한 명도 없다. 한국은 ‘잡지’ 전시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사미술공간이 만드는 계간지 ‘볼(BOL)’이 유일하게 초대받았다. 중국이 다소 과대 평가받은 인상이 들지만 최근 세계 미술계 중심부로 뛰어든 중국 미술의 힘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인해전술이다’ ‘대륙적이다’ 식의 논평이 나오지만 경제 중심에서 문화 콘텐트 추구로 관심을 돌린 중국의 행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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