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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한국 정치는 포니차만도 못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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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브스코리아올해 대선 화두는 ‘CEO형 대통령 후보’다. 대표적인 인물이 현대건설 회장 출신인 이명박 전 시장. 이 밖에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 김혁규 전 경남도지사 등 전 · 현직 기업인들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이에 앞서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대권에 도전했다가 시련을 겪었다. 기업인 출신이 선거판에 뛰어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범여권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지지도가 높은 이유를 국민이 CEO형 대통령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보고있다.

▶범여권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지지도가 높은 이유를 국민이 CEO형 대통령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보고있다.

위 그림은 범여권이 요즘 구상하는 ‘2007년 대통령 선거 필승 시나리오’ 중 하나다. 올해는 ‘CEO형 대통령 후보’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그대로 배어 있는 정치권의 각본이다. 범여권은 스스로 “정치인을 내세워 더 이상 국민을 설득할 수 없다. 올해 대선의 정답은 기업인 출신”이라고 말할 정도다.

현재 대통령 출마 선언을 한 10여 명의 범여권 후보 각축전을 ‘전(前) 삼국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 대선의 진짜 승부는 ‘후(後) 삼국지’에서 갈릴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범여권 내에서 벌어질 후 삼국지에서는 바로 기업인을 급부상시킬 것이라는 얘기다. 범여권은 오합지졸로 아직 번듯한 후보를 내놓지 못하고 있지만 한나라당을 확실히 이길 수 있는 승부수를 준비하고 있다고 귀띔한다.

한나라당에서 박근혜 전 대표가 대통령 후보로 나오면 범여권에서는 누가 상대하더라도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기업인 출신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후보가 되면 범여권은 상당히 고전할 것이란 판단이다. 따라서 이명박 전 시장을 이길 수 있는 ‘기업인 출신의 대항마’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이명박 전 시장 지지도가 높은 것은 국민이 CEO형 대통령을 그만큼 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범여권의 분석이다.

그렇다면 위 각본 속에 있는 기업인 출신 범여권 후보인 ‘XXX’는 누굴까?

범여권 킹 메이커로 나선 대통합추진모임의 정대철 대표가 물밑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것을 먼저 봐야 한다. 최근 정 대표에게서 대권출마를 권유받았다며 한 CEO가 털어놓았다. “기업인 출신이 대권을 잡아야 하는 시대가 왔다고 역설한 정 대표의 얘기를 듣고서는 대권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무능한 정치인에게 미래를 맡길 수 없어”

대선에서 ‘기업인 출신의 CEO형 대통령 후보’가 또다시 화두로 떠올랐다. 12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 후보군 중 현대건설 회장 출신인 이명박 전 시장은 여야를 막론하고 최선두다. 이 밖에 김혁규(뉴욕한인경제인협회장 · 수입업체 경영) 전 경남 지사,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 등 전 · 현직 기업인들도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그렇다면 자천타천으로 대통령 선거판에 뛰어드는 기업인의 생각은 뭘까.

“정치인이라는 게 원래 무식하다.”

정치인들을 가까이 접해본 기업인이라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기업인은 자수성가한 사람이 많다. 어떤 사안을 프로젝트화해서 성공시킨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다. 많게는 수만 명에 이르는 대기업 조직을 움직여 큰 돈을 번 사람들이다. 이렇다 보니 생산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정치인을 보면 답답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내가 하면 저들보다 더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수시로 치밀어 오른다. 이런 충동으로 대통령 선거판에 뛰어든 대표적인 사람이 현대그룹의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다.

정 명예회장은 자서전인 <이 땅에 태어나서>에서 자신이 선거에 나간 이유를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그는 기업을 하면서 수많은 정치 지도자를 만났지만 존경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전제했다.

“한국의 정치 수준은 현대자동차가 만든 포니차만치도 못하다. 한국의 권력층은 ‘7무(無)’다. 무분별, 무경우, 무소신, 무경험, 무지혜, 몰염치, 무능력이다. 국가가 산으로 가든 바다로 가든 자기네들끼리 세력 다툼에 여념이 없다. 걸핏하면 세무조사하고, 잡아넣고, 협박을 하니…….”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왼쪽), 김혁규 전 경남지사도 대권에 도전하고 있다.

정 명예회장은 시궁창인 정치판을 이대로 놔두면 영원히 시궁창이라고 했다. 대통령이 돼서 임기 5년 내에 자신이 깨끗이 청소할 수 있다고 피력했다. 현대경제연구원의 유병규 본부장은 “정 명예회장은 자신의 대권 도전을 ‘구국의 결단’이라고 했다”며 “대한민국의 미래를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의 손에 맡겨 둘 수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은 1992년 대선에서 실패했다. 그런 뒤 경쟁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핍박(금융제재 등)을 견뎌내며 굴욕을 참아야 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정의규 전 상무의 말이다.

“정 명예회장은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마음을 돌려 현대그룹을 구하기 위해 일부러 휠체어를 타고 청와대에 들어가기도 했죠. 선거판에서 싸웠던 경쟁자에게 동정심까지 사가며 기업인의 무모한 대권 도전이었다며 반성한 끝에 현대그룹은 금융제재에서 풀려났어요.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대권 도전을 후회하거나 뜻을 굽힌 것은 아니었어요.”

정 명예회장은 97년 대선을 앞두고 재도전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자신의 신조를 또다시 꺼낸 것이다. 그는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선거에서 진 것은 ‘자신의 실패’라기보다 ‘국민의 실패’라며 “나는 단지 뽑히지 못했을 뿐”이라고 했다.

정몽준 의원이 2002년 기자에게 한 회고담이다.

“아버지가 다시 대권 도전을 하겠다고 의지를 불태우시는데도 가족이나 측근 중 누구 하나 말리지 못했어요. 결국 제가 청운동(정 명예회장 집)을 찾아가서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어요.”

그토록 고집 센 정 명예회장이 여섯째 아들인 정 의원의 말을 듣고 포기한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최측근이었던 한 인사는 “정 의원은 아마도 그 자리에서 ‘아버지의 못 이룬 대권 꿈을 제가 이루겠다’고 다짐하면서 정 명예회장을 설득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 대목에서는 중국 진시황의 생부(生父)이면서 불세출의 장사꾼인 여불위가 떠오른다. 여불위는 애첩을 왕자에게 보내는 등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아들을 대권(황제)에 앉힌 인물로 알려졌다. 여불위는 기업가다. 그런데 기업가로서 성공해 놓고도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아들에게 대권을 거머쥐게 하는 야망까지 품었다.

▶넬슨 록펠러는 미국에서 기업인의 정치 참여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인물이다.

여불위는 마음 놓고 장사 한번 해 보고 싶어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고 털어놨다. 동서고금을 통해 기업인이 대권에 도전하는 이유는 이같이 마음 놓고 사업을 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기 때문이다. 아무튼 정 명예회장도 본인은 물론 아들인 정 의원을 대통령 감으로 키우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많다. 정 의원은 아버지가 작고한 1년 뒤인 2002년 대권 도전에 나섰다. 하지만 그도 막판에 노무현 대통령에게 쓴 잔을 마셨다.

글로벌 시각과 아이디어는 CEO가 한수 위

기업인은 비즈니스를 위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다. 정치인과 달리 글로벌 마인드가 더 클 수밖에 없다. 정치인은 국내의 역학 관계만을 보지만 기업인은 세계적인 시각까지 있어 한수 위인 셈이다. 경제인의 눈으로 보면 정치인은 한마디로 하수다. 그런데도 정치인들은 기업인을 이용할 대로 다 이용하면서도 국민 앞에서는 그들을 비난하고 희생양으로 삼기 일쑤다. 따라서 이에 분을 참지 못하는 기업인들이 대권까지 도전하게 마련이다.

잘 알려진 대로 삼성그룹의 고 이병철 회장도 한때 정치에 나서겠다고 별렀다. 기업인이 보기에는 정치권이 그만큼 답답하다는 방증이다. 이 회장은 당시 주변의 설득으로 뜻을 굽히고 삼성그룹에 우호적인 정치인을 양성하는 쪽으로 한발 물러선 것으로 알려졌다.

SK그룹의 한 오너는 사석에서 “대소사 때 가족이 모이면 집안 중 한 명쯤은 정치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고 말했다. 기업이 덩치가 커지면 커질수록 정치적 영향력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기업의 생존 차원에서도 정치적 유대가 절실할 때가 많다는 설명이다.

정몽준 의원의 바로 위 형인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생전에 한 말이다. “몽준이는 우리 집안에서 정치하기로 했다. 그래서 내가 동생이 대주주로 있는 현대중공업을 대신 경영해줄 생각이다.” (이 말은 2000년 현대그룹의 형제 간 경영권 분쟁 씨앗이 되기도 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무능한 정치인에게 맡길 수 없다며 대권에 도전했다.

정 의원은 이에 대해 “나는 집안에서 정치를 하라고 해서 한 게 아니다. 어느 날 신문을 보니 당시 민정당에서 젊은 정치인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있었다. 그래서 내 발로 당사를 찾아가 면접을 했다”고 말했다.)

미국의 대표적 기업인 록펠러가(家)도 현대가와 비슷하다. 형제 중 둘째인 넬슨 록펠러는 정치에 입문해 미국의 41대 부통령까지 올랐다. 당시 미국에서도 기업인이 정치를 하는 것에 대한 논란이 거셌다.

찬성하는 쪽은 록펠러가 대통령이 되면 정치자금을 대고 이권을 보장해 달라는 사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국가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진정한 개혁정책을 펴려면 기업인 출신 대통령이 나와야 된다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반대 쪽에서는 ‘대선이 무슨 백만장자 게임인줄 아느냐’고 꼬집었다.

특히 기업인 출신들은 정책 아이디어가 풍부하고 뛰어나다. 정 명예회장이 정치에 뛰어들면서 내세운 ‘서민을 위한 아파트 반값 공급’과 ‘교통난 해결을 위한 2층 고속도로 건설’ 정책은 큰 인기였다. 정 명예회장 밑에서 일했던 이명박 전 시장도 마찬가지다. 그는 서울시장 때 청계천 복원을 성공적으로 마쳐 인기가 급상승한 데 이어 이번 대통령 후보 공약으로 내세운 대운하 건설 계획으로 국민적 관심을 끌고 있다.

일부에서는 기업인이 잇따라 대권을 넘보는 이유에 대해 강한 생존 본능과 관계가 깊다고 분석한다. 정치인의 괘씸죄에 걸려 기업이 부도가 나는 일만큼은 막아보자는 심산이라는 것이다.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측근으로서 현재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 캠프에 가 있는 백기승 씨의 말이다.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은 정 명예회장을 견제하고자 대권 진출을 고민했었다.

“기업인의 생존 본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김우중 회장도 한때 대권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한 때가 있었죠. 그래서 제가 왜 그러시냐고 물어봤어요. 김 회장은 뜻밖에도 정주영 때문이라고 했어요. 정 명예회장이 정권을 잡으면 김 회장을 손 봐주겠다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니 그로서도 대안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정 명예회장은 ‘손을 봐야 할 5김’이 있는데 그 첫 번째가 김우중 회장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자동차 · 조선 등 사업 측면에서 서로 부닥치며 경쟁한 사이라 앙금이 컸다.)

김우중 회장이 대권 도전을 베팅으로 생각했다는 지적도 있다. 재계 한 인사의 말이다.

“당시 김 회장은 정말 대권에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는 기업인으로서 ‘정치 맛’을 가장 많이 봤기 때문이다. 대우그룹이 수시로 정부의 특혜금융을 얻고, 다른 기업을 인수해 키운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보안사령관으로서 80년대에 실세로 떠오르자 가장 먼저 접근한 사람이 김 회장이었다. 그는 전두환 씨를 챙기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보안사에서 근무하던 장병들의 회식비까지 지원했다. 그는 ‘정치적인 기업가’였다.”

그런데 기업인이 대권에 도전할 때마다 번번이 실패하는 이유는 뭘까.

대통령 선거판을 ‘All or nothing (전부 아니면 전무)’이라고 한다. 이런 베팅은 진정한 정치인만이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기업인은 All or nothing이란 진정한 베팅을 할 수 없다는 얘기다. 기업인은 돈이라는 단맛을 먼저 봤기 때문일까. 정치인은 모든 것을 다 잃을 수 있다는 자세이지만 기업인은 그런 처지(부도 같은 상황)가 어떤 맛인지를 잘 알기 때문에 막판까지 ‘올인’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정치인은 국민과 여론의 눈치를 보면서 정치논리로 일을 해결한다. 하지만 기업인이 경제논리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포퓰리즘이다. 기업인 입장에서는 속이 터지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기업인들은 자신들이 정치를 하면 잘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정치인은 정의분배 등 국민적 명분을 앞세워 기업인을 몰아세우기 일쑤다. 이들은 종종 ‘지저분하게 돈만 밝힌다’는 동물적 이미지를 기업인에게 덧씌운다. 동 · 서양 선거판에서 기업인 출신이 정치인에게 거듭 실패하는 이유 중 하나다.

글 김시래 중앙SUNDAY 산업에디터 / 사진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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