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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치른북한숙청>35.남로당파 제거 30.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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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金日成수상에게 朴憲永의 사형선고에 따른 대책을 보고하고 돌아온 내무상 方學世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간부회의를 진행했다.
『수상동지께서도 재판결과에 대해서는 만족하셨소.그러나 박헌영이 미제간첩이었음을 증명할 증거를 확보해야하는 문제는 여전히 내무성 책임으로 남아있소.국제동향을 보아가며 박헌영의 사형집행을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무성안이 받아들여졌으니 공은 다시내무성으로 넘어온 점을 명심해야하오.예심처장은 전 요원들을 다그쳐 빠른 시일내에 미제간첩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확보하는데 주력해야 하오.그리고 姜尙昊 副相도 수상동지와 당의 명령이하루속히 관철되도록 예심처를 철저히 감독해 주어야겠소.』 이날회의에서 方學世의 지시(곧 金日成수상의 지시)를 종합하면 朴憲永에 대한 사후처리문제가 보다 명확해졌다.
즉 미제간첩에 대한 증거가 확보되는대로 국제여론에 관계없이 곧바로 사형을 집행한다는 것이다.따라서 예심처에선 어느때보다도강도있게 「미제간첩」증거확보에 나섰다.
전 예심처 조사요원들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8개월여동안朴憲永과 남로당 간부들을 불러 원점에서부터 재심문하는등 증거확보에 나섰다.
특히 이번에는 내무성 특수요원들까지 동원해 朴憲永을 비롯한 남로당의 「미제간첩」흔적을 찾는데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결과는 당초 예측했던대로 전혀 진전이 없었다.
朱光武를 비롯한 예심처 요원들은 지칠대로 지쳐 거의 자포자기상태였다.
새로운 각도에서 증거수집을 진행하고 있던 56년2월 중순께였다. 모스크바의 소련공산당 지시로 소련 외무성에서는 평양주재 이와노프 소련대사를 통해 공화국에 朴憲永문제에 대한 압력을 내려보냈다.
이와노프대사는 金日成수상을 여러차례 방문,『우리는 박헌영에 대한 재판소식을 듣고 있다.박헌영을 죽이지 말고 소련으로 보내달라』는등 내용의 소련 외무성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때마다 金日成수상은『모스크바의 의견을 참고하겠다』고 약속했고 이와노프대사는 이를 모스크바에 보고했다.
그러나 수상의 약속은 어디까지나 모스크바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의례적인 것이었고 이와노프대사가 돌아가고나면 간부들 앞에서『모스크바에서 우리의 내정을 간섭하고 있다』며 노골적인 불만을 털어놓았다.
당과 내각의 주요 간부들은 수상의 이같은 태도로 미루어 朴憲永의 사형집행은 증거확보여부에 관계없이 실현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다만 그 시기가 언제일 것이냐만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공화국의 역사상 金日成정권이 가장 위기에 처했던 56년8월 하순이었다.金日成수상이 동유럽 형제국 순방을 나선 틈을 이용,연안파 핵심간부들을 중심으로 일부 소련파 간부들까지 합세한 이른바「8월종파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金日成수상이 급거 귀국했다. 金日成수상은「8월종파사건」이 스탈린사망후 거세게 불고 있는개인숭배와 1인독재배격운동과 朴憲永정치노선등에 근본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발견했다.전원회의에서 金日成수상은 方學世내무상에게 느닷없이『방동무,이론가 박헌영은 지금 어떻게 됐느 냐.문제의 증거는 완벽하게 확보했느냐』고 물었다.
수상의 질문이 끝나기가 바쁘게 方學世는『예심처에서 그동안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수상동지께서 만족하실만한 증거는 찾지 못했습니다』고 답변했다.
수상은 답변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그는중요한 발언을 할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한다)『증거고 뭐고 다필요없다.오늘밤에 목을 따버려』라고 엄명했다.
시기가 시기이고 분위기가 분위기인만큼 수상의 엄명에 감히 이론을 제기한 간부는 단 한명도 없었다.
方學世는 그 길로 내무성에 돌아가 예심처장 朱光武를 불러『오늘밤 박헌영의 사형집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이에따라 김영철내무성중앙부장이 이날밤 朴憲永을 지프에 싣고 평양시내 변방 야산기슭으로 가 方學世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형(총 살)을 집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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