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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사람] ‘金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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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민족차별을 외치며 인질극을 벌였던 ‘김희로(본명:권희로)’를 기억하는가? 그렇다면 영화 <김의 전쟁>은? 일본열도를 뒤흔들었던 이 남자도 이제 80줄에 가까워졌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의 가운데 서 있는 그를 만났다.



■ 2년간 공주치료감호소에서 복역… 이후 언론 보도 사라져
■ 오랜 수형생활에도 건강 유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포효’
■ 일본 국민 아닌 일본 정부에 비판의 화살… 폭로전은 계속된다
■ 구명 도왔던 사람들과 아직 연락… 영구 추방으로 일본에는 못 가
■ 죽기 전에 전국 발로 돌고 싶어… 우리나라가 살기 좋다

남자가 건넨 명함에는 이름이 둘이다. ‘권희로(權嬉老)’와 ‘김희로(金嬉老)’. 권희로는 지금 남자가 쓰는 이름이고, 김희로는 이 남자의 굴곡 많은 인생만큼이나 오랫동안 써 왔던 그의 헌 이름이다.

독자들은 김희로라는 이름을 더 많이 기억하리라. 하지만 남자의 오랜 감옥생활과 함께 그 옛 이름도 이제는 점차 대중들로부터 잊히고 있다. 그 남자 권희로, 과연 누구인가?

1968년 2월20일, 일본 시즈오카(靜岡)현 시미즈(淸水)시에 소재한 술집 ‘클럽 밍크스(クラブ みんくす)’에 한 남자가 들이닥쳤다. 그 자리에서 야쿠자 2명을 라이플로 쏴 죽인 남자는 스마타쿄(寸又峽) 후지미야(ふじみ屋) 온천여관에 도착해 여관 주인 부부와 투숙객 등 13명을 인질로 삼아 일본 정부를 향해 싸움을 걸었다.

‘김의 전쟁’으로 알려져 있는 ‘김희로 대(對) 일본 정부’의 기나긴 전투가 시작된 것이었다. 남자는 전쟁의 이유로 일본 정부와 일본 사회의 재일조선인에 대한 민족차별을 들었다.

남자는 5일 만에 기자단에 섞여 급습한 경찰에 잡혔다. 무려 8년이라는 아주 긴 법정공방 끝에 남자는 무기징역의 삶을 살게 됐다. 그리고 1999년 9월, 삼중스님 등 그를 후원하던 한·일 양국 시민들의 노력 덕분에 남자는 도쿄(東京) 후추(府中)형무소를 끝으로 31년6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풀려나게 된다. 단 조건이 있었다. 일본 땅을 떠나 다시는 입국하지 못한다는 단서가 그림자처럼 달려 있었다. 일본 법에는 7년 이상 복역한 외국인 범죄자는 추방하기로 돼 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던 ‘오모니(オモニ·어머니의 일본식 발음)’가 나고 자란 고향 부산으로 왔다. 이 땅에서 권희로라는 본래 이름을 되찾은 남자는 한동안 뜻하지 않은 호강을 하며 살았다. 끊임없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취할 정도로 남자를 비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는 옥중결혼으로 잘 알려진 한 여인으로부터 또다시 배신당했다. 그는 아노미 상태에 빠졌다. 그런 가운데 또 다른 한 여인을 운명처럼 만났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파국의 예고편에 다름 아니었다.

‘傘壽’ 앞두고 연 무거운 입

치정사건으로 보도된 이른바 ‘동부경찰서 사건’으로 인해 남자는 고국에서도 쇠창살 속의 삶을 살게 된다. 공주치료감호소에서 2년(2000~02)을 복역한 남자. 산수(傘壽·내년이 80세)를 눈앞에 둔 그 남자의 삶이 궁금했다.

남자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그가 복역이라는 상황에 맞닥뜨리면서 끝났다. 오직 지난해 2월, 일본에서 ‘김의 전쟁’ 당시의 여관 주인인 모치즈키 에이코(望月英子·70)가 한국을 방문해 짧은 조우를 했다는 기사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한때는 ‘돌아온 영웅’으로 칭송받던 그 남자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실마리는 남자를 국내로 인도했던 삼중(75) 스님뿐. 먼저 삼중 스님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튿날, 경기도 안양에서 만난 삼중 스님은 그간의 권희로 씨 사정을 장시간에 걸쳐 전해 주었다. 그러고는 ‘동부경찰서 사건’ 이후 언론을 기피해 인터뷰는 몹시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취지를 잘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며칠 뒤, 삼중 스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번 인터뷰의 취지를 잘 전달했고, 인터뷰가 가능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권희로 씨의 연락처를 가르쳐줬다. 직접 전화해 보라는 말이었다.

― 권 선생님, <월간중앙>입니다.
“스님한테 말 들었습니다. 일요일에 스님 오실 때 같이 오시면 되겠네요.”

그의 말은 짧고도 간결했다. 물론 이유도 있었다. 고국에 온 지 어언 8년이 지나 우리말이 꽤 늘었지만, 여전히 긴 호흡의 우리말 구사에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만난 자리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지난 7월1일 낮 10시, 부산광역시 연제구의 한 아파트 ○○○동 ○○○호. 현재 권희로 씨가 살고 있는 보금자리다. 반갑게 맞은 권씨와 삼중 스님. 어려운 질문이 오갈 것에 대비해 통역을 도와줄 사이토 미에코(齊藤美惠子) 부산여자대학 교수도 동석했다.

권씨는 아직도 일본말이 의사소통에 편한 것 같았다. 구사하는 우리말도 부산에 오래 산 때문인지 사투리 억양이 짙었다. 게다가 높임말과 낮춤말의 구분도 불완전했다. 일본어 역시 그가 나고 자란 시즈오카 지방 사투리가 묻어났다.

인터뷰 당시의 생생한 느낌을 전하고자 권희로 본인의 말투를 가급적 그대로 옮겨 봤다. 첫 질문은 건강체크였다.

― 내년이면 여든이십니다. 수형생활을 오래 하셨는데, 어디 아프신 데는 없습니까?
“건강은 괜찮습니다. (감옥생활을 오래 했지만) 그런 것(영향)은 없습니다.”

― 평소에 운동은 하시는지….
“운동은 매일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계단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그러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이러고 있습니다.”

― 음식 등 특별하게 불편하신 것은 없으신가요?
“(없습니다.) 우리나라 요리도 좋아합니다.”

머리카락을 바짝 자른 것인지, 빠졌는지 민머리에 진한 색안경을 쓴 권씨의 첫인상은 그의 말처럼 상당히 건강해 보였다. 타고난 장골이어서인지 그의 말에서는 힘이 느껴졌다. 단순히 목소리만 높은 것이 아니었다. 쌓인 분노를 ‘포효(咆哮)’하는 듯한 강단 있는 말투였다.

하지만 천하의 권희로 역시 세월의 힘은 막을 수 없는 듯 보였다. 그는 인터뷰하는 내내 혼자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허리에 문제가 있지 않나 싶었다. 오랜 수형생활이 가져다준 산물이리라.

권씨는 요즘 한창 바쁘다. 소리 없이 사라졌던 이 남자는 지금 여러 가지 일을 진행 중이거나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권씨는 그 동안 감춰 왔던 이야기 보따리를 하나 둘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 권희로 씨가 현재 일본의 <지츠와지호>라는 월간지에 쓰고 있는 수기(위). 오랫동안 권씨의 구명 활동을 펼쳤던 오사와 신이치로 교수가 지난 6월22일 보낸 편지(아래).

일본 정부 비판하는 수기, 日 월간지에 게재해…

― 요즘 하시는 일이 있다고 삼중 스님께 들었습니다만….
“매달 매달 (일본의 한 월간지에) 내고 있는 수기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14번 정도 냈는데…. 최근에는 (같은 잡지에) 만화도 연재하고 있어요. 둘 다 (조만간) 단행본으로 출간할 예정입니다.”

― 수기의 내용이 궁금한데요.
“내 사건(권씨가 재판받고 복역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일본 정부가 얼마나 크게 속였는가, 나의 입을 막고 아무 것도 못하게 (일본 정부가) 조직적으로 (나쁜 일을) 했는가, 이런 것이야. 조직적으로 입을 막아 버렸어. 형무소 안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았어. 제가 ‘참치회를 가져와라’ 하면 갔다 줄 정도였어. 그런 내용이야.”

어떤 잡지를 말하는 것일까? 물어보려는 찰나 권씨가 스스로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그러고는 언급했던 잡지를 여러 권 꺼내와 보여주었다. <지츠와지호(話時報)>. 이 잡지를 내는 출판사는 일본에서도 꽤 유명한 ‘다케쇼보(竹書房)’라는 곳이었다.

권씨가 연재하는 수기의 제목은 ‘김희로가 말하는 38년 만의 진실 <포효>’였다. 그가 꺼내온 여러 권의 잡지 중 한 권을 펼쳐 그 내용을 살펴보았다.

2007년 4월호에 실린 ‘제10회-출국 전의 계약서’라는 꼭지는 이렇게 시작됐다.

“바이런의 ‘사실은 소설보다 더 기묘하다’는 명언은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머릿속에 기억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즉, 이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는 소설보다 더 이상한 일이 있다는 말이겠죠.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인과 완전히 똑같은 사회에서, 때로는 경찰서 유치장이나 형무소 안에서 살아온 제 경우는 글머리에 언급한 바이런의 말이 짐짓 무겁고 어둡게 다가옵니다….”

자조 섞인 문장을 읽어 내려가며 고생스러웠던 그의 과거가 이미지처럼 떠오르는 듯했다. 문득 권씨가 쓰고 있다는 수기에 대한 일본 독자들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 수기에 대한 반응은 어떤가요?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매일 아침 남포동·국제시장·자갈치시장 나가서 특히 일본 사람들과 만납니다. 때로는 우리집까지 데려옵니다. 밤새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죠. 단 한 번밖에 만나지 않은 사람인 데도 일본에 돌아가서 선물을 많이 보내옵니다. 일본 사람들과 인간적인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정부 차원에서 인간관계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내가 일본 사람들을 만나서, 그 사람들을 특별히 (집에) 데려와서 손수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든지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일본 사람들은 뭔가 반응을 보입니다. 그리고 (그) 일본 사람들이 일본에 돌아가서 부산에서 긴키로(김희로) 상을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사진도 찍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제도 일본에서 왔던 사람이 술을 보내왔습니다. 저는 술을 안 마시지만 술을 보내준 마음을 생각해서 간직하고 있습니다.”

권씨의 말 그대로 그의 뒤편 구석에는 포장도 뜯지 않은 일본 전통술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기를 ‘일본에 초대해서 일본 정부가 해 왔던 짓(재일교포 차별 등)을, 숨겨왔던 사실(법정과 형무소에서의 일 등)을 일본 국민 앞에서 말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초대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일본에 가면 일본 정부(경찰)가 날 잡으로 올 거다. 그래서 나는 일본에 가고 싶지만 못 가니 일본 여러분들이 이로한 사실들을 알 수 있도록 (잘 말해 달라)….”

그가 수기를 쓰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권씨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지금도 녹음 테이프를 보내는 등 간접적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전달하고 있다고 했다. 또 그렇게 방문한 일본 사람들에게 일본 재판정에서 싸웠던 기록 등을 건네주기도 한단다. 초대 이야기가 나온 끝에 일본에 가고 싶을(?)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아 물어봤다.

▶ 권희로 씨가 자신의 서재에서 상념에 젖은 듯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뒤편 벽에 걸린 태극기는 국민이 무궁화 조화를 한 송이씩 모아 만든 것이다.

― 일본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으신 거네요?
“네, 있어요. 당연하지요.”

― 혹시 고향 시미즈에 가보고 싶은 생각은 없으신지….
“결국 일본은요. 저는 일본인 여러분에게 한마디라도 이야기하면 마음이 통해서 굉장히 친해집니다. 그리고요. 결국….”

기자의 말 뜻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애써 말을 아끼고 싶었던 것일까? 옆자리의 삼중 스님이 조금 거든다.

“못 들어가죠. 추방당했으니까…. 출입 자체가 안 되지….”

이 대목에서 일본에 있는 그의 가족들 근황이 궁금했다.

― 일본에 있는 형제들과는 연락하시죠?
“왔다 갔다(합니다). 먼저도 동생, 여동생 다~ 와서 이틀 동안 같이 지내고 갔어.”

― 이제 조카들도 나이가 꽤 될 텐데요?
“전부 40대 이상이다. 조카 아들 딸들이 시즈오카에서 녹차도 보내주고…. (직접 보여주면서) 이게 전부 다 시즈오카에서 보내온 거다.”

― 그러면 가족들이 아직도 시즈오카에 다 모여 사시나 보네요?
“시즈오카에 다 모여 살고 있어요. 다른 친척들도….”

― 한 신문에 나온 것을 보니 일본에서 건설업을 한다고 들었는데….
“하는 일은 여러 가지다. 미용실 하는 사람이 많고, 토목 건설회사, 그리고 요리점·주점·이발소… 그런 일들을 하고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재일한국인·조선인은 국가공무원이 될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대개 자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영구 추방, 望鄕의 恨

그렇다. 그의 말처럼 재일교포들은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엄연히 국적이 다른 외국인이다. 그래서 일본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일본 국적으로 귀화하는 동포들도 많다고 한다.

한 추정 통계에 따르면 귀화한 동포를 대략 60만 명으로 잡고 있다. 현재 한국 국적이나 조선적(북한이 아닌 광복 이전의 상태인 조선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실상의 무국적)을 보유한 재일교포와 비슷한 숫자다. 얼마나 큰 차별이라는 아픔을 안고 살아야 했기에 그랬던 것일까? 또 이는 과거의 일에 한정된 것일까?

예전에 비해 사회적 차별이 많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권씨가 말했듯 법적 차별(일부 지방공무원을 제외한 국가공무원이 될 수 없는 것 등)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재일교포 차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현안에 대해 물어보기로 했다.

― 일본 정부에 의해 강제이주당했다가 쫓겨날 위험에 처한 교토(京都)부 우지(宇治)시 우토로(ウトロ)마을 주민들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어요. 나는 직접 보지 않고 사진집으로 봤는데, 그런 것은 교토만 아니고, 오사카(大阪)도 있고, 요코하마(橫濱)도 있고, 우리가 살던 시즈오카에도 있었어요. (우리 고향에는) 낙동강 같이 큰 강가에 오두막집 세우고 많은 사람이 살고… 조선부락이라고 살고 있는데, 비가 많이 내리면 산에서 물이 한꺼번에 내려오니까 집이고 뭐고 다~없어지는 거였다. 그런 것은 지금은 많이 없습니다.”

“재판 기록 일본 전국에 남기겠다”

― 우토로 문제 어떻게 보셨나요? 아니, 그와 관련해 전반적인 재일교포 차별에 대해 한 말씀 하시죠.
“그것은 (원래) 교토부의 토지다. (현재 이 땅의 소유자는 ‘서일본식산’이라는 회사) 역시 일본 사람들은 일본 국민으로서 여러 가지 보장을 받지만, 조선인·한국인에 대해서는 취업할 때도 (일본 회사에서) ‘우리 회사에서는 조선인·한국인은 쓰지 않습니다’… 내 동생도 메이지(明治)대학을 나왔지만, 일본인 친구와 함께 취직하러 회사에 갔는데 친구는 합격했지만 동생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거절당했습니다. 그래서 내 동생이 자포자기해서 술을 마시고(는) 자살하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산으로 데려가가꼬 ‘남자가 뭐냐? 남자답게 해라. 자포자기하면 안 된다. 강하게 살아가야 된다’ 그러니까 (그 후로) 덤프(트럭)를 사서 일을 시작해서… 지금은 (덤프 트럭을) 40대나 굴리는 회사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사실 권희로 씨가 ‘김의 전쟁’을 일으킨 가장 큰 원인도 이러한 민족차별 때문이었다. 5일천하로 끝날 것만 같았던 그러한 호소가 지금까지 이어져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그 혼자만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석방되기까지 그의 곁에는 수많은 사람이 함께했다.

― 한국과 일본에서 선생님을 구하기 위해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는데요.
“한국으로부터는 100만인 서명운동, 처음 하신 분은 권애라(당시 김희로 구출추진위원회 대표로 1973년 사망) 여사, 삼중 스님도 여로 가지로 활동하셨고… 일본에서도 가나가와(神奈川)대학의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 일본의 대표적 한국사학자로 1989년 사망) 교수, 교토 세이카(京都精華)대학의 오사와 신이치로(大

一郞·70, 김희로공판대책위원회 설립 주도) 교수, 교수님들은 굉장히 도와주신 분이 많아….”
말이 나온 김에 보여주겠다는 듯 권씨는 편지 한 통을 꺼내 보였다. 소인은 6월22일로 찍혀 있었다. 편지를 보낸 주인공은 바로 권씨가 말했던 오사와 신이치로 교수였다.

― 최근에 온 편지인가 보네요?
“4~5일 전에 온 거야. 그 내용은 말이지. 일본의 유명한 대학의 교수님들이 모여서 ‘긴키로구원대책위원회’를 만들어서 10년간 재판을 같이 싸워준 사람들이지. 이 사람은 말이지, 대학은 이제 퇴직하시고… 편지 내용은 나와 관련한 재판 기록이 많이 있으니까, 트럭 한두 대 분량을 넘어설 정도로 많은데…. 대학 교수님들이 조금씩 나눠서 그것을 일본 각지의 도서관에 기증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내 의견을 묻는 편지야. 일본 사람들이 와서 아무나 볼 수 있도록 하자는 거지. 재판기록이 되~게 많아.”

사건 당시 일본 언론은 그를 ‘라이플 마(魔)’라고 불렀다. 한마디로 악마에 비유한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 각계에서는 권희로를 구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이는 그들이 권희로라는 인물의 부정적 면이 아닌, 그가 제기한 ‘민족차별’이라는 문제에 더 큰 가치를 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권씨에게는 자신을 돕는 그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어머니 박득숙 씨다. 권씨는 일찍 친아버지(권명술, 1931년 사망)를 여의고 의붓아버지(김종석, 1967년 자살) 밑에서 자랐다. 사실상 가계를 책임진 사람은 억척스러웠던 그의 어머니.

일본과의 전쟁은 生 다하는 그날까지…

박씨는 사건 당시에도 “일본 경찰에 잡힐 바에는 깨끗하게 자결하라”고 아들에게 주문할 정도로 의지가 대단한 사람이었다. 권씨가 옥중에 있을 때도 그의 뒷바라지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는 권희로 씨가 출소하기 10개월 전(1998년 11월) 작고했다. 전언에 따르면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아들을 걱정했다고 한다. 누가 뭐라 해도 어머니는 권씨가 긴 시간 일본 정부와 싸우는 데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인물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의 애끓는 사모곡 한 소절-.

― 한국에 들어오실 때 어머니 유골을 가지고 들어오셨죠?
“조금만 가지고 들어왔는데… 3년 전에 일본 절로 다시 돌려보냈습니다. 일본에 있는 가족들이 (자꾸) 나쁜 일이 생긴다고…. 일본에 두든가 한국으로 가지고 오든가 유골을 한 군데 놔둬야 한다고 그래서 동생들이 유골을 일본에 있는 절에 가져갔습니다.”

― 일본의 절에 있다고요?
“시즈오카에 있는 조후쿠지(長福寺). 우리집(옛날에 권씨가 살던 곳) 근처에 있었다. 결국, 나는요… 한국에서 죽으면 형제들이 일본에서 와서 어머니와 함께 있게 해줄 겁니다. 어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인터뷰는 벌써 2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권씨가 피곤함을 호소했다.

“이제 됐습니까? 나 피곤해져서 오래 못해요.”

― 몇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자식이 없으신데….
“그것은 할 수 없지요. 그런 것은 아~무 생각이 없어요. 하지만… 나한테는 일본 정부가 뭐라고 해도 일본의 국어사전, 연감에도 전부 그대로 (내 사건의) 기록이 남아 있으니까… 도서관에도 여로 가지 기록이 남으니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속담이 있는데… 그런 것에 만족합니다.”

― 이제 연세도 있으시니, 돌아가시기 전에 한국에서 하고 싶으신 일이 있으실 텐데요.
“나는요… (젊었을 때) 일본 전국은 제 발로 돌아다녀봤지만, 내 눈으로 여로 가지를 보고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기 나라(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안 가보고 모르는 것도 (아직) 많습니다.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을 세네 번 방문하고, 경주에 있는 나자렛(한국인과 결혼했던 일본인 할머니들이 요양하는 곳)에도 몇 번인가 방문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다른 여러 곳을 내 눈으로 내 발로 돌아다니고 싶어요. 생각하고는 있지만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 움직이는 데 불편하지는 않으신지요?
“최근에는 팔·다리나 허리가 좀 약해지기는 했다.”

― 일본 정부를 향한 작업(전쟁)은 계속하실 것인가요?
“응. 마지막까지 할 일이야!”

인터뷰 내내 창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많이 오면 곤란을 겪었다는 시즈오카의 조선인 마을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쪽마루(베란다)에는 여러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모두 권희로 씨가 가꾸는 것들이었다. 권씨의 지인 중 한 사람이 이런 일화를 들려주었다.

“저기 있는 고무나무는 공주에 있을 때 줄기 하나만 있었던 것을 저만큼 키우신 거예요.”

공주치료감호소에 있는 동안 키웠다는 고무나무는 키가 사람 허리만큼 자라 있었다. 지인들의 권씨에 대한 한결같은 평가는 ‘너무 인간적인’이라는 수식어로 시작한다. 생김새와 달리 ‘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묻지도 않았는데 권씨가 한 말이 있었다.

“이렇다 저렇다 문제가 있어도, 요사이는 웬일인지 우리나라가 살기가 좋아…. 어려운 일이야 많지마는, 내 우리나라가 살기가 좋아….”

아주 많은 말이 오갔다. 하지만 기사에 담을 수 없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의 험난했던 인생만큼이나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설령 그가 죽더라도 말이다. 그가 싸운 기록이 존재하고, 우리가 그를 잊지 않는 한….

일본 ‘김희로 사건’ 스페셜 드라마 제작 준비 중

“‘김의 전쟁’ 40주년 맞아 방영 계획… 일본에서는 여전히 관심의 소재”

▶ '김희로 사건' 당시 후지미야 온천 여관에서 권희로 씨가 인질들과 과자를 먹으며 담소하고 있다.

'2008년 2월20일은 김희로 사건, 이른바 ‘김의 전쟁’이 시작된 지 꼭 40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 방영을 목표로 일본의 니혼TV(NTV)는 ‘전후사 <결정적 체험>-일본을 뒤흔든 김희로 사건의 5일간-’이라는 가제의 스페셜 드라마를 준비 중이다. 프로듀서는 오야마 가쓰미(大山勝美)로 일본에서는 대가 반열에 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희로 씨로부터 건네받은 이 드라마의 기획안에서 밝힌 기획 의도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전후사(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이후의 역사)를 장식한 수많은 사건 중에서 ‘김희로 사건’만큼 독특한 사건도 드물다….”

권씨를 국내에 데려온 삼중 스님은 “전후 일본에서 가장 충격적 사건이었던 ‘김의 전쟁’을 아직도 많은 일본인이 기억하고 있다”면서 “그러한 관심이 이번 드라마에서 재조명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권희로 씨와 ‘김의 전쟁’에 대한 관심도가 낮아진 것과 비교하면 사뭇 대조적인 모습이다.

한 문화평론가는 이런 현상에 대해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는 또 다른 사례”라고 평했다. 이 평론가는 또 “일본에서는 그 사건이 사회에 미친 파장을 중요시하는 데 반해 한국에서는 개인의 신상에 집중해 사건 자체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권씨 본인은 이 드라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내가 민족차별 문제를 외치면서 5일 동안 인질극을 벌였다. 그런데 일반인들이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인질들을 인격적으로 대했다. 그런 부분을 다루는 드라마라고 본다.”

- 당시의 인질들이 그 부분 때문에 재판 과정에서도 큰 도움을 줬다고 들었는데….
“사실이다. 인질들이 증인으로 재판에 나와서 ‘김희로 씨는 저희들을 협박하거나 심하게 대하지 않았다’라고 진술해 주었다. 또 경찰이 민족 문제는 없었던 일로 하자고 이 사람들을 압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내가 민족문제를 호소하고 자결을 할 각오로 사건을 일으켰다고 증언했다. 그런 증언 덕분에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형을 받은 것이다.”

이 드라마가 제작되면 1991년 비토 다케시(ビ-トたけし,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의 별칭)가 주연했던 후지 텔레비전의 <김의 전쟁> 이후 가장 큰 규모의 대형 드라마가 다시 만들어지는 셈이 된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제작이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삼중 스님에 따르면 방송국의 최종 결정권자가 인사이동을 해서 아직 결재가 나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기획안대로라면 이 드라마는 오는 가을께 촬영에 들어가는 것으로 예정돼 있다.

글·김상진_월간중앙 기자
사진·김현동_월간중앙 사진기자

kine3@joongang.co.kr / lucid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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