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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빛 판타지를 드립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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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04면

1980년대와 90년대 십대 소녀들은 인터넷 소설 대신 ‘HR’이라고 불렸던 로맨스 소설을 읽곤 했다. 할리퀸 출판사가 냈던 이 로맨스 소설들은 돈 많고 냉정한 검은 머리의 남자 주인공과 가난하지만 어여쁜 금발 여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를 수없이 많은 버전으로 변주하면서 소녀들을 설레게 했다. 90년대 중·후반부터 출판되기 시작한 한국 로맨스 소설 또한 외국 로맨스가 확립한 그 장르의 법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낯익은 이름·지명과 일상이 등장하기에 훨씬 친근하다.

드라마 ‘경성스캔들’ ‘커피프린스 1호점’을 계기로 살펴보는 로맨스 소설의 세계

마니아 층이 존재하기는 해도 판매부수 1만 부를 넘기 힘들었던 로맨스 소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 계기는 TV 드라마. 지수현의 로맨스 소설 『내 이름은 김삼순』을 비롯해 『포도밭 그 사나이』『마녀유희』『열여덟 스물아홉』『백설공주』 등이 드라마로 각색됐다. ‘경성 스캔들’ ‘커피프린스 1호점’의 원작자 이선미는 “로맨스 소설은 심의나 편견을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드라마보다 다양한 소재를 사용할 수 있다”고 이 새로운 트렌드를 설명했다. 남자들이나 어른들은 유치하다고 비웃을지 몰라도, 로맨스 소설이 원작인 드라마의 상당수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사실은, 이 장르의 보편성을 설명해 주는 요소일 것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이 존재하는 환상의 땅, 로맨스 소설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로맨스 소설 편집자가 추천하는 완벽하고 사랑스러운 로맨스 10편>
사랑을 위해, 나는 읽노라
꿈을 꾼다. 그대는. 이루어질 수 없기에 아름답고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달콤한 꿈을. 누군가를 만나고 좋아하고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그런 꿈을. 그러나 희망은 단지 희망. 현실은 잔혹하다. 현실엔 잃어버린 신발을 들고 찾아올 멋진 왕자님도, 야근과 직장상사와 매달 날아드는 카드명세서로부터 그대를 구해줄 기사도, 그대만을 바라보고 그대를 기다려줄 어느 화창한 봄날 만나게 될 100%의 여자 아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루지 못한다는 걸 알기에 조금 더 욕심을 내고 조금 더 힘을 내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그때뿐. 그 순간이 지나면 당신은 더 이상 꿈꾸기를 멈추고 당신을 핍박하는 현실에 체념 어린 한숨을 내쉬게 된다. 점점 꿈꾸기를 잊게 된다. 꿈꾸는 게 지겨워진다. 그래도 만약 당신이 조금 더 꿈을 꾸고 싶다면, 이대로 그 꿈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면, 그 꿈을 꾸기 위해 뭔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대여, 내가 이야기해주는 완벽하고 사랑스러운 10편의 로맨스 소설을 읽으시길. 그 이야기들 속에는 잔혹한 현실이지만 그래도 언젠간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믿음과, 어떠한 고난도 결국에는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용기와, 남루하고 지겨운 일상을 참고 살아낼 수 있는 따듯한 손길이 담겨 있으니까.
그리고 만약 당신이 나의 충고를 받아들여 10편 중 단 1편이라도 읽는다면 그 순간 당신은 알게 된다. 그 책들 안에는 당신이 힘들 때 당신에게 위로가 되었던, 당신이 괴로워할 때 당신에게 따뜻한 힘이 되어주었던, 당신이 즐거울 때 같이 즐거워했던, 당신의 과거의, 현재의, 미래의 연인들이 모두 살아 숨쉬고 있다는 걸. 같이 울고 웃고 즐거워하고 행복해했던 행복해할 기억들이 거기 모두 녹아있다는 걸. 그러니 그대 부디, 이 10편의 로맨스 소설로 모든 걸 잊고 달콤한 한때를 보내시길. 다시 한번 꿈을 꾸시길. 글 박대일(파란미디어 편집장)

『가스라기』(전3권)

진산(민해연) 지음, 시공사 펴냄, 각권 9000원

민해연(무협작가 진산의 로맨스 소설 필명)의 글은 사람을 중독시킨다. 그 중독성은 너무 강해 때로 읽는 사람의 이성과 마음을 마비시킨다. 『반지의 제왕』의 J R R 톨킨이 북구 신화를 바탕으로 중간계를 만든 것처럼 민해연은 한·중·일 3국의 전설과 민담을 ‘삼라’라는 새로운 세계로 다시 그려냈다. 현실에 존재할 것만 같은 세계. 물론 정교한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만으로 『가스라기』를 최고의 판타지 로맨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선인 ‘천군’과 하늘과 땅 모두에서 버림받은 인간 ‘가스라기’ 그리고 천군의 배다른 동생 ‘지한’의 삼각관계를 축으로 한 이야기만으로도 『가스라기』는 꼭 읽어야 할 로맨스 첫 번째 목록에 위치한다. 거기에 동양적 판타지, 무협적 서사가 맞물려 있다. 그리고 완전한 사랑도. 어쩌면 지은이는 한국 로맨스가 가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먼저 발을 내디뎠는지도 모르겠다.

『각의 유희』(전2권)

가선 지음, 영언문화사 펴냄, 각권 7500원

그런 소설들이 있다. 읽는 내내 가슴을 졸여가며 주인공들의 심리를 좇다 보면 어느새 내가 주인공이 되어 주인공이 웃으면 웃고 울면 같이 울게 되는 소설이. 그런 작가들이 있다. 그 강렬함에 취하고 서글픔에 시름겨워하고 독한 담배 연기 혹은 진한 커피향에 취한 것처럼 읽는 내내 몽롱해지는 글을 쓰는 작가들이. 『각의 유희』가 그런 소설이고 가선이 바로 그런 작가다. 가선은 가장 강렬한 로맨스를 쓰는 작가답게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엉킨 애증과 복수를 『각의 유희』에서 펼친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선에게 열광하는 그 지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건 바로 사랑에는 대체물이 없다는 것. 단지 그 하나만 보고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 오래 만나지 않아도 단지 눈빛 몇 번만 스쳤어도 서로에게 증오한다고 말해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비늘』(전2권)

이선미 지음, 파란미디어 펴냄, 각권 9000원

‘커피프린스 1호점’과 ‘경성스캔들’ 원작자로 이미 시청자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선미는 두말할 나위 없는 대한민국 로맨스 장르의 대표 작가다. 대표 작가답게 이선미의 모든 글은 재미있다. 그리고 그 재미는 어떠한 상황과 조건이더라도 사랑을 아름답게 그려내는 작가의 필력에 기인한다. 하지만 『비늘』의 재미는 우리가 로맨스에서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재미와는 다르다. 로맨스란 당연히 달콤하고 달달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비늘』은 충격을 준다. 『비늘』은 독하다. 너무나 독하고 독해 다크 초콜릿 99%를 먹다가 목이 막히는 느낌이다. 『비늘』이 이야기하는 사랑은 아름답거나 행복하지 않다. 인간의 광기와 욕망이 어우러져 지옥도를 그려낸다. 하지만 그 지옥도에서 『비늘』의 재미가 나온다. 왜냐하면 때론 그런 독함이 사랑의 상처나 아픔을 치유해주기도 하니까. 사랑의 모습은 하나가 아니니까.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이도우 지음, 북박스 펴냄, 9000원』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은 정갈하다. 하지만 프렌치 레스토랑이나 상견례를 목적으로 하는 고급 한정식집의 정갈함과는 다르다. 이 정갈함은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차려주는 소담한 밥상 같은 느낌이다. 화려하진 않지만 먹으면 분명 맛있을 음식. 또한 곱게 부친 전 하나마다 스며 있을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밥상.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을 읽는다는 건 어머니가 정성스레 차려주신 밥상을 한 상 받는 것과 같다. 그 힘은 로맨스 작가 중 세 손가락에 꼽히는 작가의 문장력에서도 나오지만 무엇보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지은이의 따듯한 시선에서 온다. 한번쯤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래도 다시 한번 사랑을 해보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소소한 일상의 사랑이 더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언제고 꼭 한번은 읽어야 할 책이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전2권)

정은궐 지음, 파란미디어 펴냄, 각권 9000원

유교와 당쟁과 성균관 유생들을 소재로 한 무겁고 딱딱해질 수 있는 역사 이야기에 연애담이 어울릴 수 있을까? 정은궐은 그게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다. 그녀는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에서 시대에 대한 깊은 고민, 사서를 바탕으로 한 철저한 고증, 그 시대의 사상으로 살아서 움직이는 등장인물들을 더한 다음, 그 모든 이야기를 설렁설렁 잘 읽히지만 깔끔하고 흠잡을 데 없는 문장으로 씨줄과 날줄을 짰다. 그리고 연애담을 은근슬쩍 집어넣는다. 그것도 조선시대판 ‘엄마 친구 아들’인 남자 주인공과 병약한 남동생 대신 남장하고 과거를 보게 된 여자 주인공의 연애담을. 그 솜씨는 임방울이 ‘쑥대머리’를 부르거나 이매방이 살풀이를 추는 것엔 못 미칠지 모르지만 그것에 버금간다. 우린 때로 살아가면서 읽는 내내 행복해지고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그런 글을 만날 때가 있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 바로 그런 소설이다.

『실연 세탁소』

문지효 지음, 이가서 펴냄, 9500원

리쌍의 노래처럼 죽을 때까지 사랑만 하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때로 사랑은 아픔을 낳는다. 사랑이 사람을 배반하거나 사람이 사랑을 배반한다. 그럴 때, 누군가는 술을 마시고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지난 사랑을 되새긴다. 가장 슬픈 일은 지나간 실연 때문에 또 다른 인연을 만나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실연 세탁소』는 그런 아픔을 치유하고 차분하게 세탁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평상에 누워 별을 보면서 맥주를 마시거나 지나간 댄스곡을 흥얼거리며 실연의 상처를 조금씩 이겨나가는 소근과 그런 소근의 우울한 옆모습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어 슬픈 모습을 자신이 가져갔으니 앞으로는 그녀가 웃기만을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은우를 통해 지나간 사랑의 상처가 아직도 당신을 울릴 때, 이제는 희미해진 옛사랑이 발목을 자꾸만 잡을 때 읽어야 할 책.

『연록흔』(전5권)

한수영 지음, 마야 펴냄, 각권 9800원

황제의 보물을 훔친 죄로 참수될 위기에 처한 아버지의 목숨을 평생의 자유와 맞바꾼 남장 소녀 연록흔과 그녀가 호위해야만 하는 황룡국의 천자 가륜이 겪는 기이하고 기묘한 이야기들. 김용이 『신조협려』를 통해 “정이란 무엇이기에 생사를 가늠하느뇨”라고 무협에 로맨스를 끌어왔다면, 한수영은 고대 중국과 한국을 연상시키는 가상 왕국 황룡국과 가장 완벽한 남자 주인공 가륜을 주인공으로, 국내 최초로 로맨스에 무협을 접목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사랑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과 드러낼 수 없는 괴로움이 흘러간다. 누군가를 멍하니 바라만 봐야 하는 감정이 얼마나 쓰린지 안다면, 그러나 그 사랑을 이루었을 때 가질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알고 싶다면 꼭 읽어야 할 책.

『연우』

서누 지음, 파란미디어 펴냄, 1만2000원

‘연우(煙雨)’란, 안개같이 보이면서 이슬비보다 가늘게 내리는 비를 일컫는 말이다. 작가는 제목 그대로 시계 제로, 앞이 보이지 않는 그러나 어쩌면 가늠할 수 있는 질문을 로맨스라는 장르를 통해 진지하게 던진다. 사랑이 사상보다 중요한가? 사랑이 혁명보다 중요한가?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위해 작가는 울산의 치술령 자락, 어느 일본인이 식민시대에 남긴 저택 안에 한 여자와 한 남자를 고립시킨다. 여자는 친일 자본가의 딸, 동경 사교계에서 ‘하나(花)’라 칭송받던 남쪽 여인이고 남자는 북에서 남파되었다가 낙오한 열일곱 살 인민군 소년 장교다. 로맨스의 공식대로 고립된 둘은 사랑에 빠지지만 그 둘 사이엔 사상과 혁명, 신이라는 장애물이 있다. 거기에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민족의 비극이 다가온다. 작가는 던진 질문에 스스로 답하지 않는다. 물론 정답도 없다. 하지만 이 책을 끝까지 읽는다면 어쩌면 사랑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답할지도 모르겠다.

『연의 바다』(전3권)

이리리 지음, 신영 펴냄, 각권 9000원

『연의 바다』가 그려내는 로맨스의 세계는 장엄하고 광대하다. 이리리는 사람들이 로맨스를 읽음으로써 얻고 싶어 하는 욕구를 『연의 바다』를 통해 모두 충족시켜준다. 우리가 어렸을 때 열광했던 김동화의 『아카시아』나 이케다 리요코의 『올훼스의 창』을 보고 느꼈던 그 감동들을. 그 감동은 장대한 스케일에서도 나오지만 정밀한 시계태엽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구성과, 그 구성을 탄탄하게 받쳐주는,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는 고대 이집트에 대한 세밀한 묘사의 힘에서 나온다. 여주인공 연하가 새로이 눈을 떴을 때 고대 이집트 파라오 토드모세라는 운명적인 상대를 만났듯이, 분명 어딘가에 있다. 운명적인 내 사랑이. 비록 지금 이곳은 아닐지라도.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하고 어딘가 정말 내 운명의 사랑이 있다고 믿는 당신이라면 절대로 이 책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인생미학』

정이원 지음, 신영미디어 펴냄, 9000원

서른 살 생일 또 하나의 단순한 ‘연애’를 끝내고 “사랑이란 뭘까? 어떤 감정일까?”를 궁금해하는 한 남자와, 장애복지원에서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쫓겨나고 갈 곳이 없는 열아홉 살 눈먼 소녀가 만나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남자는 누구나 인정하는 엘리트지만 사랑이라는 걸 절대로 믿지 않고 여자는 언제 죽을지 모를 병을 가지고 있는데도? 현실에선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이지만 정이원의 손끝에선 둘의 사랑이 정말 마술같이 이루어진다. 그것도 해피엔딩으로. 지친 스스로를 치유해줄 수 있는 동화 같은 로맨스를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는 걸 보여주는 책.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한국식 로맨스로 아름답게 변주한 이야기다.

*김지혜의 『공녀』, 진소라의 『이라샤』 등 좋은 로맨스 소설들이 더 있으나 아쉽게도 이미 절판되었기에 소개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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