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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안방극장 韓·美·日드라마 삼국지>미국드라마_ 할리우드 거물들까지 흡수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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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05면

‘스토리+스케일’ 질 좋은 미드 밀려온다

‘미드’와 ‘일드’의 공습 사이 ‘한드’의 활로는?

요즘 미국 드라마가 열풍이라고 한다. 하긴 공중파에서 방영하는 미국 드라마가 ‘CSI’ 시리즈, ‘프리즌 브레이크’ ‘그레이 아나토미’ ‘어글리 베티’ ‘로마’ 등 이전에 비해 몇 배나 늘어났다. 하지만 겨우 그것뿐 아닌가. ‘커피프린스 1호점’ ‘대조영’ 등 한국 드라마의 열광적인 인기에 비하면 겨우 주말 심야시간을 차지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소수의 시청자가 열광하는 비주류 드라마 몇 편을 열풍이라고 불러야 할까?

맞는 말이다. 열풍이라고 하지만, 아직 공중파에서 구체적인 시청률로 미국 드라마(이하 ‘미드’)의 약진을 확인할 수 없다. 이를테면 열광적인 폐인 집단을 만들었던 한국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와 ‘마왕’ 등의 시청률이 지지부진했던 것과도 비슷하다. 인터넷에서는 엄청나게 화제를 몰고 다니지만 시청률에서는 바닥인 드라마들. 하지만 이유가 있다. 시청률 조사라는 것은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요즘 10대와 20대는 공중파를 시청하기보다 인터넷으로 다운을 받아 자유롭게 즐기는 것을 선호한다. 그건 시청률에 전혀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들이 지지하는 드라마의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본방 사수’라는 말도 나오고, 시청률은 그저 중산층 이상의 주부가 선호하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비아냥도 나온다.

‘미드’ 선호하는 한국 20대

요즘 20대는 누가 만들어주는 유행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유행을 만들어 나가는 세대다. ‘미드’도 마찬가지다. ‘CSI’ ‘프리즌 브레이크’ 등이 케이블에서 방영되기도 전에 다운을 통해 열광적인 팬이 생겼고, 케이블에서 방영되며 더욱 확산됐다. 방영이 시작되기도 전에 팬이 생기고, 팬들의 힘으로 방영을 이끌어내는 공식이 성립되기도 했다. 공중파 방영이 시작되면서 이제 ‘미드’ 열풍은 그저 돌풍이 아니라 안정적인 훈풍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태풍은 아니지만, 꾸준히 불어주는 시원한 바람이다.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 ‘석호필’이 국내 CF모델로 발탁되는 것만 보아도, ‘미드’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자동차나 아파트는 아니어도, 온갖 소비재를 활발하게 구매하는 20대의 ‘미드’ 선호는 이미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의 20대가 ‘미드’를 선호하는 이유는, 한국 드라마의 구태의연함 때문이다. 점점 새로운 시도를 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로맨틱 코미디와 불륜극 이외의 장르에서는 대단히 열악하다. ‘다모’ ‘히트’ ‘마왕’ 등 장르적인 재미를 갖춘 드라마들은 이제 막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런데 ‘미드’는 웬만한 할리우드 영화 뺨치는 스펙터클을 보여주면서, 다음 에피소드를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매력적인 스토리로 시청자를 끌어들이고 있다.
드라마의 힘은 역시 스토리에 좌우된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감독 리들리 스콧은 수학의 원리를 이용한 수사물 ‘넘버스’로 드라마에 도전하면서 “장편영화의 경우 2시간 정도의 시간에 한정되지만, TV시리즈는 하나의 유기체로 캐릭터나 스토리의 발전과 변화를 충분히 기획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경계 좁아지는 영화와 드라마

‘미드’의 부활은 한순간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국내에도 막강한 팬클럽을 확보하고 있는 ‘X파일’(1994)은 아주 희미한 전조에 불과했다. ‘미드’의 혁명은 공중파가 아니라, 변방인 케이블 채널 HBO에서 시작되었다. HBO는 98년과 99년 각각 ‘섹스 앤 시티’와 ‘소프라노스’를 방영한다. ‘섹스 앤 시티’는 공중파에서 보여주기 힘든 ‘섹스’를 정면에서 다루는 것은 물론이고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 첨단 유행의 도시인 맨해튼의 패션과 트렌드를 광활하게 펼친다. ‘소프라노스’는 비정하고 야비한 갱스터 영화의 전통을 잇고 있으면서도,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갱의 일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섹스 앤 시티’와 ‘소프라노스’의 성공이 뜻하는 것은, 기존의 드라마가 갖는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TV는 영화보다 스케일이 작을 수밖에 없고, 섹스와 폭력 등 사회적 금기를 감추어야 한다는 생각으로는 시청자를 사로잡을 수 없다. 2001년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한 ‘밴드 오브 브러더스’는 드라마가 영화와 충분히 ‘맞짱’을 뜰 수 있음을 보여준 대작 드라마였다. ‘밴드 오브 브러더스’는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확장판인 동시에 영화를 뛰어넘는 완성도를 보여준 드라마로 평가받았다. 이미 미국에서는 스필버그를 비롯해 ‘글래디에이터’의 감독 리들리 스콧, ‘더 록’의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 등 할리우드의 거물들이 드라마 제작에 앞장서고 있다. 또한 마이크 니컬스의 경우처럼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연출을 하는 감독들도 늘어나고 있다. 단지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는 날로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 드라마의 가능성

‘미드’의 약진을 보면서, 오히려 떠오르는 것은 한국 드라마의 가능성이다. 몇 년간 지속되었던 한류 붐의 핵심도 결국은 드라마였다. 스타의 이미지나 감성적인 연출 등은 한국 드라마의 강점으로 유지돼야 하고, 동시에 영화처럼 더욱 다양해지고 파격적인 이야기를 다룰 수 있도록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한국영화의 부진은 드라마에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한국영화의 절정기에 다양한 경험을 한 영화 인력이 드라마로 유입되는 계기가 될 수 있고, 영화의 소재와 주제가 드라마에서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80년대 홍콩 방송국의 도산 덕분에 영화계에 우수한 인력이 몰려 활황을 이룬 것처럼, 영화계 인력이 드라마로 쏠리면서 ‘미드’의 수준이 한 단계 높아진 것처럼, 한국 드라마의 인력 풀도 더욱 다양해져야 한다. 결국 우수한 문화상품을 만들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창의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누가 만드는가에 따라, 어떤 문화상품이 나오는지 결정되는 것이다.
김봉석(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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