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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에디터칼럼

디아길레프와 스트라빈스키, 그리고 신정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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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20세기 예술사를 얘기할 때 러시아발레단의 단장이었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1872~1929)를 빼놓을 수 없다. 1909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년에 걸쳐 러시아발레단을 이끌며 전 세계적 센세이션을 일으킨 디아길레프. 그는 독단에 가까울 만큼의 추진력을 갖고 일에 몰두해 ‘독재자’로 불렸다. 파격에 가까운 인선 방식이 그런 악명을 낳게 했다. 명성이 채 확립되지도 않은 신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일을 맡겼다. 모험에 가까운 인재 기용은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결국에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파격적인 인사는 작곡가 이고리 스트라빈스키(1882~1971)를 채용한 일일 것이다.

친구의 아버지인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문하생이었던 스트라빈스키는 정작 대학에서는 법학을 전공했던 무명의 젊은이였다. 디아길레프는 그의 관현악 작품 ‘꽃불’을 듣고 단번에 발레작품 ‘불새’의 작곡을 맡겼다. 원래 기성 작곡가인 리아도프에게 작곡이 의뢰돼 있던 터라 단원들의 반발은 극심했다. 하지만 디아길레프는 스트라빈스키의 재능에 대한 확신 때문에 계약을 철회하지 않았다.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이 남자는 곧 유명해질 테니까.” 디아길레프가 스트라빈스키를 두고 이렇게 말하자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비웃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불새’는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스트라빈스키는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어 디아길레프와의 재계약을 통해 완성된 ‘페트루슈카’(1911년)와 ‘봄의 제전’(1913년)으로 스트라빈스키는 31세에 일약 거장으로 떠올랐다.

바츨라프 니진스키를 발탁해 20세기 최고의 발레리노이자 안무가로 만든 것도 그였다. 디아길레프의 동성 연인이기도 했던 니진스키는 ‘봄의 제전’에서 스트라빈스키 음악에 못지않은 혁신적인 안무를 보여주었다. 자연히 디아길레프의 주위에는 재능 있는 예술가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이며 멀티예술가였던 장 콕토도 러시아발레단을 위해 대본을 썼다. 장 콕토의 권유로 그의 친구인 파블로 피카소가 후안 미로와 함께 의상과 무대장치를 맡았다. 라벨·드뷔시·프로코피예프도 발레곡 작곡에 참여했다. 이렇게 해서 러시아발레단은 몰락 위기의 서유럽 발레를 되살린 구세주가 됐다.

디아길레프는 1929년에 급사하고 러시아발레단도 해체됐지만, 스트라빈스키는 현대음악의 최고 거장으로 남아 노년까지 계속 창작을 했다. 71년 89세로 사망한 그는 베네치아에서 디아길레프 근처에 묻혔다. 러시아발레단의 멤버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영국과 미국의 발레를 키워낸 주역이 됐다.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신정아씨의 가짜 예일대 박사 소동에 이어 각계 인사들의 가짜 학력이 드러나면서 곳곳에서 파문이 일고 있다. 물론 최대의 피해자는 당사자인 신정아씨 자신이다. 학력 위조가 드러나면서 미술계에서 쏟아부었던 10년간의 노력과 성취도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기 때문이다. 신뢰라는 사회적 가치를 파괴한 그의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한국 미술계, 아니 한국 사회에도 가혹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말로는 실력을 중시한다면서도 간판과 연고를 따지는 풍조에 대한 왜곡된 대응으로 신씨의 학력위조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유럽 예술계를 좌지우지했던 디아길레프는 발레단을 위해 말 그대로 ‘올인’했다. 그는 작품의 주제를 직접 결정했다. 각 분야 담당자를 직접 선정하고 작품이 통일성을 갖도록 최선을 다했다. 높은 직위를 즐기면서 일은 적당히 하는 허위의식을 철저히 경계했다. 그가 베네치아에서 사망했을 때 은행 잔액에는 돈이 한 푼도 없었고, 가진 것이라고는 코트 두 벌뿐이었다. 한국 사회와 예술계에도 돈과 간판보다는 오직 실력 제일주의로 예술가의 자존심을 지켰던 디아길레프식의 열정이 살아나야 한다. 그래야 ‘신정아 쇼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천재를 발견하는 천재’로 불렸던 디아길레프의 선입견 없는 시각이 절실해지는 때이다.

이하경 문화·스포츠 부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