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점집」공존하는 “이상한 서울”/농촌총각,연변처녀 「모집」온당한일 못돼/곱고 예쁜 말씨… 듣기만해도 가슴 설레/교수가 「색정소설」써 쇠고랑 “기현상”/성범죄 만연… 전철에 여성칸까지/향락·퇴폐·빈부차… 「도덕불감」큰병
한국사회는 지금 중병을 앓고있다. 색정문화가 범람하고,성폭력이 끊이지 않고 있는가 하면 마약복용이 늘고 향락퇴폐풍조가 사회전반을 도덕 불감증으로 몰고가고 있다. 지난해 말 정부초청으로 40일간 한국을 방문한 중국 길림성 조선족신문 연변일보 장정일 부총편집(부사장)은 최근 중앙일보에 기고한 「한국인상기」에서 한국사회의 병리 현상을 지적하며 『한국은 지금 인간성 회복,도덕성 회복이 절실한 때』라고 진단했다. 다음은 장부사장의 한국 인상기를 요약·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4층이 없는 건물
한쪽엔 빌딩숲에 팩시밀리·컴퓨터가 보급돼 있고 한쪽엔 교회 천지이며,미신풍조가 성행하는 현상은 한국의 특이한 풍경중 하나다.
번화한 밤거리에서 여기저기 서있는 교회의 첨탑이 눈길을 끈다.
서울인구의 15%가 종교신자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일본인들은 외국에 가면 기업을 세우고,한국인들은 교회를 세운다는 말이 있다.
지하철에서도 선교에 열심인 단체를 쉽게 볼 수 있고,지하철 계단에서 종교행사에 관한 유인물을 부지런히 나눠주는 부인들도 자주 눈에 띈다.
풍경이 수려한 깊은 산중에는 전화와 컴퓨터를 갖춘 사찰이 있다.
종교문제를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고,신도 역시 그 동기가 천차만별이겠고,종교의 역할도 다양한 것이다.
현대식으로 지은 화려한 빌딩들에 4층이 없다는 것도 서울의 특이현상이라 하겠다.
층계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3층 다음에 5층이 불쑥 나타나 어리둥적해질 때도 있다.
서양에서 13자를 꺼리는 것처럼 한국에서 4가 「죽을 사」와 발음이 같아 길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점집내부 “호화판”
호텔엔 분명히 4층 객실이 있지만 엘리베이터의 4층표시는 F로 돼있다. 4자를 꺼려 영어로 네번째라는 뜻인 Fourth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한국에서는 관상쟁이나 풍수지리·사주팔자를 보는 사람들이 점잖게 간판을 내걸고 영업하면서 상당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동해안의 어느 마을에 들렀다 우연히 관상쟁이집에 가본적이 있다. 그집은 울타리를 두른 멋진 2층 양옥으로 주거면적이 80평은 된다고 했다. 실내가 화려해 서울 부잣집을 연상케 했다.
현대식 가구며 세련된 수저,융단을 깐 응접실에 관상을 보는 방이 따로 있고 화장실도 화려했다. 나무뿌리를 가공해 만든 탁자를 서울의 한 고위인사의 집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이 집에도 있었다.
50세쯤 돼보이는 이 관상쟁이는 원래 가난한 처지였으나 관상을 보기 시작하면서 부자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점이라면 땀흘리며 일하는 농민이나 저임금 노동자,근면한 샐러리맨들에 비해 관상이나 사주팔자를 보는 이들이 너무 쉽게 돈을 벌어 호강하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었다.
이 마을에서 만난 한 노인이 『무슨 일을 하려 해도 젊은이들이 없어 어렵다』고 한 얘기가 인상깊다. 지금은 농촌에도 벽돌기와집이 들어앉아 초가집은 민속촌에서나 볼 수 있는 형편이지만 산업화와 더불어 도시와 농촌간의 소득격차가 커짐에 따라 젊은이들이 앞다투어 도시로 나가 출로를 찾는 판이어서 농사짓기가 문제시되고 있는 형편이며,서른살이 넘어도 장가를 못가는 현실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나는 서울에서 TV를 보다 한국의 나이 많은 농촌총각들이 연변의 농촌 조선족 처녀들과 합동결혼식을 치르는 장면을 보았다. 이는 결코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거웠다.
서울에는 시집못간 노처녀들이 적지 않았다. 서른에 가까운 미혼이라는 식당아가씨를 여러명 만났다. 제주도만 해도 여성이 남성보다 1만명이나 더 많다고 한다. 한쪽에서는 장가를 못들고 한쪽에서는 시집을 못가는 것은 사회문제이지 남녀비례가 맞지 않는 문제가 아니다.
○도시엔 노처녀 많아
그러니 가난한 농촌 노총각들이 결혼하기 어려운 문제는 사회문제 차원에서 근본적 해결책을 찾아야지 외국처녀 「모집」으로 그 큰 구멍을 메운다는 것은 임시방편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한편으로 한국 농촌 혹은 도시 노총각들의 배필을 한정적이나마 외국에서 찾아주는 것을 인도주의적인 처사라고 자화자찬하는 일도 못된다. 이는 타국 동족의 남녀비를 헝클어 뜨리는 비인도주의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국제결혼 전반을 부정하는 우를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국제결혼도 그 전제는 사랑이지 「모집」은 아닐 것이다.
그날 합동결혼식중계에서 사회자는 신부들에게 말을 시켰는데 마치 치약을 짜듯 했다. 한 신부는 시종 함구무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저 사진이나 보고 만난 인연이 장차 어떻게 될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녀의 착잡한 표정을 읽으며 나 역시 착잡한 심정이었다.
이날 화면에 나타난 10쌍의 결혼을 주선한 이도 연길에서 만난 기억이 났다. 그때 나는 한국농촌총각과 결혼할 처녀모집광고를 신문에 내달라는 청탁을 단연히 사절했다. 앞으로도 이런 광고를 내줄 의향은 추호도 없다.
아무튼 산업화정책으로 농촌인구이동이 발생하고 이에따라 남녀비례와 가치관에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어찌보면 어차피 겪어야 할 진통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처녀모집을 다니는게 그렇게 자랑스러운 일인지,관상·사주팔자보는 이들의 불로소득을 합법화하는 것도 그어떤 당위성이나 필연성에 따른 것인지는 알길이 없다.
○간판,외국어투성이
서울같은 대도시 건물들엔 간판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어떤 건물엔 도대체 간판이 얼마나 되는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개중에는 『겨울나그네』『저녁노을』『고향산천냉면』『함흥국수』같은 낭만적이고 민족적 정서가 밴 간판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은 외국어라는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무엇이 호프이고 무엇이 슈퍼마킷인가,무엇이 카바레고 무엇이 마돈나인가. 같은 조선민족이지만 처음 보는 사람은 영문을 알길이 없다.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내가 만난 한 교수는 한국광고의 70∼80%가 외국상표이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품이 잘 팔리지 않기 때문이란다. 거리 건축물의 간판들,상점·식당·문화오락시설의 간판들은 왜 그 대부분이 외국어며 신문·방송·각종 정기출판물의 용어는 왜 외래어 천지인가.
사회가 발전하면서 선진국을 따르며 그들과 경쟁하고 필요한 외래어를 받아들이는 것은 나무랄 바가 못된다. 다만 외래어의 범람이 언어동화·문화동화를 초래하지 않도록 명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 교수가 말했듯이 『자기말로 자기일을 할 수 없는 민족』은 곤란하다.
○목소리는 일등미인
서울말씨가 곱다는 말은 옛날부터 들어 알고 있는 터였지만 직접 서울에서 지내보니 그 말씨와 억양이 그렇게 부드럽고 온화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말소리만 들어서는 서울여성은 모두 미인』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한 적도 있다.
연세대 강은숙교수의 특강에서 들은 말이 생각난다. 강교수는 『지금 한국에선 보통 「… 시오」를 쓰지 않고 「… 세요」를 쓴다』며 「… 시오」는 어딘가 명령식이어서 생경하게 느껴지지만 「… 세요」는 보다 민주적이고 부드러운 맛이 있다고 해석했다. 「… 까?」도 존대는 존대지만 「… 요?」로 바꿔 쓰면 부드러운 존대여서 느낌이 달라진다는 지적이었다.
길을 걷거나 차를 타고 가다보면 각종 공사현장을 지나치게 되는데 나는 매번 감명을 받았다. 「통행금지」넉자면 족할 공사장에 『공사로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철석같은 심장도 녹여줄 글귀다. 통행금지라고 써도 뜻은 통하고 큰 무리는 없다.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적 시각이지 상대방의 편의나 정감에 대한 배려는 전무한 것이다. 통행금지라고 쓰고 줄을 쳐놓아도 그 구역을 밟고지나갈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죄송하다」고 비는데 그곳을 마구 짓밟고 지나갈 사람은 단연 없을 것이다.
길을 물어도,전화를 걸어도,게시판을 보아도,한결같이 악음이요,가구뿐이어서 세종대왕께서 창제한 우리 글과 말의 묘미를 정수하는 기분은 좋았다.
한 신문사 상무와 함께 점심을 들다가 그분이 서울주변의 먼산을 가리키며 저 산은 서울의 쓰레기가 모아져 이뤄진 산이라고 알려주어 적이 놀란 적이 있다.
천여만명이 사는 대도시에 쓰레기가 매일 적지않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간다하지만 거리에서 쓰레기 상자를 볼 수 없는 것이 참으로 희한했다.
○깨끗한 거리 “인상”
거리에도 지하철에도 종이조각이나 담배꽁초를 함부로 내던진 것은 더구나 볼 수 없는 일이다.
한국체류기간중 연세대 마광수교수가 뉴스인물이 돼 떠들썩했다. 시인이요,대학교수인 그가 변태적인 외설소설을 쓴 모양이다. 무지한 경쟁시대 고뇌의 일단을 보여주는 뉴스다. 색정소설·만화·색정비디오·유흥업소가 범람해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신문지상에는 지하철에서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여성전용칸」설치가 화제로 등장했다. 향략산업이 기형적으로 발달하고,성폭행이 그칠 새 없고 색정문화의 범람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현직 대학교수인 마씨를 구속한 것으로 미뤄볼때 풍기문란에 대한 정부의 방침은 분명한듯 했다. 다만 그 효과는 별로 신통치 않아 고민인듯 했다.
국제화시대의 도래와 함께 방송업계는 오는 95년에 이르러 각 가정에 40개 내지 50개 채널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색정문화 통제가 초미의 과제로 대두되고 있으나 현재의 추세로 보아 결국은 자율에 맡길 수 밖에 없다고 한 관계자는 전망했다.
한국경제는 급성장뒤의 배회단계에 처하고 무정한 경쟁이 낳은 사회적 변혁은 정돈을 기다리고 있다. 경쟁사회의 이런 고뇌에 가장 민감한 것은 바로 언론과 학계였다. 한국체류기간중 나는 서울 여러 대학 교수들의 정치·경제·문화등에 대한 특강을 여러차례 들었다. 한국사회를 거시적으로 파악하는 좋은 기회였다.
○유물론 잘못이해
교수와 학자들은 국제사회의 변화와 한국의 현상태를 꿰뚫고 있었으며,국내외 정보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이데올로기면에서의 격리와 체제상의 차이때문에 일부 견해는 피상적이고 진부하고 불철저한,그리고 일부 왜곡된 측면도 없지 않았다.
한국의 유명한 교수들이 유물론을 단순히 물질주의로 해석하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지적인 면에서 그 누구에도 뒤지지 않았던 유물론자로서 마르크스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 인류해방,인간의 전면발전을 주장한 그는 가난과 병으로 고생했을뿐이다. 어떤이는 가난세습의 유무를 계급유무의 기준으로 피력했는데 이 역시 수긍이 가지 않는 대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제시한 종합분석,사회비판적 안목,왜곡된 현실을 시정하려는 용기는 나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특히 한국이 직면하고 있는 고뇌와 문제점에 대한 그들의 분석은 설득력이 있었다. 인간이나 사회나 발전을 위해서는 자아에 대한 철저한 해부가 요청되게 마련이다.
그들은 『지금 도덕·양심의 문은 닫히고 물질의 문은 활짝 열려 있으므로 인간성의 회복이 요청된다』고 전제,『물질만능주의로 인해 인간성을 잃어버린 사회는 오래가지 못한다』고 역설했다.
○「행복 불균형」현상
그들이 열거한 사회병리현상은 빈부격차가 심해 절대빈곤자가 3백만명이 달하고,전인구의 40%가 무주택자라는 점이다.
또 부동산투기로 졸부가 나타나 일반서민들의 근로의욕을 퇴조시킨다. 건물주인에게 보증금 1천만원에 40만원의 월세를 지불하고 설렁탕집을 경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건물꼭대기 화려한 집에 머물면서 『오늘은 어떻게 놀까』를 궁리하는 주인이 있다. 「행복불균등」이다.
노사분규로 인해 파업이 빈발하다. 최근 몇해 사이 파업건수는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으나 파업으로 인한 노동손실이나 생산차질은 비슷한 수준이다. 88∼90년 임금상승률을 보면 일본이 연평균 6.2%,미국이 3.5%인데 비해 한국은 연평균 33.2%로 세계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향락사치풍조 만연·성도덕문란·마약복용이 늘고 인간관계가 소원해지며 이기주의로 빠져든다.
경제성장에 비해 정치수준은 낮아 지방색,돈에 의한 선거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
택시운전사들은 대우가 낮아 현상황에 일반적으로 불만이었다. 그들은 『좋은것만 보지 말라』며 외국손님에게 충고를 하곤 했다. 약 한달반에 걸친 한국방문은 지금까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나로서는 모국을 이해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생전 처음 가본 그곳에서 나와 생김새가 같고 같은 말을 쓰는 우리동포들을 만나고선 이곳이 바로 내조국이란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낳아준 우리 땅,우리 어머니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장정일씨 약력
▲43년 중국 길림성 용정출생 ▲67년 연변대학 어문학부졸 ▲석현제지공장 선전부 간사 ▲71년 연변일보입사 ▲현 연변일보 부총편집(부사장),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이사겸 문학평론가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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