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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글 사로잡은 진부한 ‘마법의 書’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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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04면

해리 포터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단순히 해리 포터라는 작품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해리 포터라는 현상에 대해, 해리 포터라는 현상이 가능한 이 세상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해리 포터 마니아가 아니라면, 해리 포터에 대한 논평을 요구받을 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어린이 문학 잡지로는 꽤 유명한 ‘혼북’의 편집자 로저 서튼도 그랬다. “나는 해리 포터에 대해 논평할 것이 없다. 어린이 도서는 온통 해리뿐이다. 나를 엿먹인 것은 『해리 포터』라는 책도 아니고, 스콜래스틱이라는 출판사도 아니다. 나를 엿먹인 것은 우주를 지배하는 힘들이다. 호감은 가지만 문학성은 낮은(likable but critically insignificant) 이 시리즈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뉴스거리가 되고 내가 이에 대해 논평을 해야 하는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낸 우주적 힘들 말이다.”

완간된『해리 포터』… 냉담과 열광 사이

돈 냄새를 뒤쫓는 하이에나 언론에 떠밀린 무수한 평자들은 해리 포터의 성공 비결을 작품 안에서 찾으라는 숙제를 떠안았고, 여기서 호의적인 결론이 나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권위 있는 문학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해리 포터가 진부함에 강하고 상상력에 약하다(long on cliches, short on imaginative vision)”고 비판했다. 문화평론가 김종엽 교수도 “해리 포터가 문학작품으로서 혁신적 성격을 전혀 갖추고 있지 않다”며, 이러한 “인습성”은 “심각한 약점”이라고 지적했다.

가혹한 평가가 열풍 부채질

동화를 성인문학의 관점에서 비판해선 안 된다는 반론이 무색하게도, 동화학자들의 평가는 더욱 가혹했다. 『옥스퍼드 동화입문』과 『옥스퍼드 동화백과사전』을 편집한 동화학의 권위자 잭 자이프스는 해리 포터가 ‘도식적’이고 ‘성차별적’이라고 혹평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롤링의 소설을 읽으며 안정감을 얻는다. 롤링의 소설의 세심한 기교로 인해서 우리는 주인공이 세상의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하는 것을 보며 기뻐하게 되고, 영국과 미국에서 대다수의 어린이가 직면하는 실제적인 문제들을 외면하게 된다.” 우리나라 동화학자 손향숙 서울대 교수도 “새로운 성장과 인식의 가능성을 탐색하기보다는 독자에게 익숙한 코드를 통해 현재적 감수성을 만족시키고 자극한다는 점에서, 또한 기술문명에 대한 불안감을 악의 세력이라는 추상적 대상에 대한 분노로 환치함으로써 이를 안전하게 흡수한다는 점에서 사회질서 유지에 필요한 가치의 (재)생산에 적극적으로 간여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해리 포터에 대한 수많은 혹평은 해리 포터 열풍을 잠재우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해리 포터가 아이들을 이교적 마법에 빠지게 한다고 비난했던 종교계가 해리 포터 마케팅의 일등공신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해리 포터 티저 광고에 참여한 것은 학계와 종교계뿐이 아니었다. 환경운동단체 ‘그린피스’와 ‘미국야생보호연합’이 미국 스콜래스틱판 『해리 포터』 대신 100% 재생용지를 사용하는 캐나다 레인코스트판 『해리 포터』를 사달라고 호소했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법원은 예정된 신간 배포일을 어기고 책을 사간 14명의 독자에게 정해진 날까지 책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 것은 물론 ‘책을 읽지 말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독자들은 독서권(right to read) 침해라며 반발했다.

실제로 티저는 해리 포터 마케팅의 원칙 중 하나다. 판매가 시작되기 전까지 책에 대한 논평과 인터뷰가 일절 금지되고, 판매 개시일 전날에는 중무장한 직원들이 책 더미를 서점으로 운반하는 모습이 TV로 중계된다. 지난해 여름 저자가 제7권에서 두 명이 죽는다고 언급한 후, 책장사들은 도박 사이트를 열어 누가 죽는가를 놓고 내기를 시켰다. 가위 환상적인 현실이다.

현실이 사라진 퇴행 판타지

리처드 번스타인은 “롤링의 판타지 세계는 현실과 너무 유리되어 있어 이야기의 흥미를 없애버린다”고 불평했지만, 『해리 포터』 환금성의 열쇠는 현실과 유리되어 있다는 바로 그 점에 있다. 고전이란 “문학사를 다시 쓰게 하는 작품”이라고 정의했던 T. S. 엘리엇의 말을 생각하면, 『해리 포터』는 현실과 판타지를 분할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근대 초에 리얼리즘 소설이 현실의 좌절을 보상해준 것은 현실 속의 재료를 가지고 성공의 드라마를 조합하는 것이 가능해서였다. 진지한 소설가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사실의 파편들을 가지고 현실 뒤에 감추어진 진리를 창조하는 철학자였다. 독자들은 픽션을 통해서 인생을 배웠고 인생을 견딜 힘을 얻었고 인생을 바꿀 꿈을 찾았다. 요컨대 정의와 용기를 간직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아이 같은 어른의 장르,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의 장르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리얼리즘 소설에 나오는 인생의 진리가 가짜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현실의 이런저런 측면들을 공들여 배열하는 해피엔딩 대신, 현실과 완전히 다른 세계, 판타지의 세계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현실 도피라고 해도 좋았고, 현실 거부라고 해도 좋았다. 적어도 판타지의 세계에는 현실이 살 만하다느니, 현실을 바꾸겠다느니 하는 위선은 없었다. 요컨대 판타지는 냉소적이 되어버린 어른의 장르, 다시 아이가 되고 싶은 어른의 장르였다.

리얼리즘이든 판타지든 현실과 허구는 뒤섞이게 마련이다. 리얼리즘의 주인공이 상상력의 산물인 것처럼, 판타지의 세계에도 현실의 좌절과 고통이 어렴풋이나마 각인되어 있으니 말이다. 현실에 신경 쓰기 싫은 판타지 독자에겐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다. 그런데 『해리 포터』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해리 포터』의 마법세계는 머글들의 현실과 공존하되 머글들의 현실보다 한 수 위에 있다. 머글나라 대통령이 마법나라 장관 앞에 서면, “만남 자체가 놀라운 일이어서 기분이 나쁠 뿐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일은 하나도 모르는 학생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나쁘다.”

현실이 소거된 판타지 세계의 선악 투쟁. 이것은 게임의 원리와도 통한다. 현실과 무관한 자립적 공간에서 주인공은 악당들을 물리치며 전투력을 쌓아간다. 물론 그 전투력은 현실적 권력과 호환될 수 없으며, 호환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가 현실에서 마법을 사용하면, 머글들은 깜짝 놀라 우왕좌왕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마법을 쓰지 않고 참아주는 이유는 머글들의 혼란이 걱정되기 때문이 아니라 (머글들의 처벌이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호그와트의 교칙이 그것을 금하기 때문이다.

현실에 호령하는 판타지, 나아가 현실을 무시하는 판타지. 퇴행적인 판타지인 것은 맞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퇴행의 판타지를 사고 싶다. 우리가 이미 샀고 또 앞으로 사게 될 무수한 퇴행의 아이템을 정당화 해주는 비현실의 서사를 사고 싶다. salon.com의 토머스 로저스는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모르지만, 롤링의 작품은 우리의 문화적 시대정신(zeitgeist)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좋은 일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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