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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어본 『전환시대의 논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이성의 몸부림이 우상의 노여움을 면할 수 없었던 암울했던 유신시대, 바로 그 시대에 우리는 사실로서가 아니라 궤변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소망했던 한 권의 책을 만났다. 『전환시대의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유신의 서슬 푸른 억압이 긴급조치 9호라는 말기적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던 70년대 중반 암울한 시기에 나는 대학초년생이었다. 유신교육 아래서 이미 나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냉전적 의식 및 사고의 깊은 중독상태에서 벗어나는 지적해방의 단비를 나는 이 책에서 맛보았다. 유신말기 젊은 지성인들의 비판의식의 세례현장에 언제나 이 책이 있었다. 많은 젊은이들을 부모의 뜻과는 반대로 정치의 현장으로, 민중의 바다로 인도하는 길목에도 바로 이 책이 있었다. 저 높은 곳을 향해 가던 자신의 삶을 사회와 역사를 향하여 저 낮은 곳으로 선회하던 U턴 지점에도 바로 이 책이 있었다. 그만큼 이 책은 냉전시대의 기이한 신화·우상·권위에 메스를 가하고 그것들을 파괴함으로써 사회적 현실과 그 속에서의 자신의 삶을 근저에서부터 고민하게 하였던 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의 밀실, 동료들과 함께 하는 집단밀실이 자아내는 기묘한 긴장감 속에서 벅찬 감동으로 이 책을 읽고 토론하던 암울했던 시기가 지금도 생각난다. 당시 정치사회현실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으로 우리를 인도하였던 주제들은 베트남 전쟁·중국·한국언론현실·한일관계·한미관계 등이었다. 스페인전쟁과 함께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두 전쟁으로 일컬어졌던 베트남전쟁, 그러나 국내에서는 적화통일을 지향하는 베트콩과 공산주의를 물리치는 자유수호세력간의 싸움으로 획일화되어 보도되던 베트남전쟁. 죽의 장막 속에서 전사회를 집단 강제노동수용소로 만들고 인민 전체를 개조대상으로 삼아 거대한 실험을 하고 있다고 규정되던 빨갱이의 나라 중국. 이러한 소재들에 대하여 외신현장에서의 정보와 경험을 기초로 저자는 냉전적 사고가 만들어낸 의식의 우상들을 하나하나 깨나갔다.
동시에 권력과의 유착 속에서 아니 유신권력에의 자발적 적응 속에서, 권력의 시각으로 자신을 무장하여 그 우상들과 신화를 떠받들고 있던 당시의 언론현실에 대한 준엄한 비판도 우리는 이 책에서 감동 어리게 읽었다.
80년대라는 정치적·지적 홍역기를 거치면서 이제 외로운 선구자처럼 외치던 저자의 주장들은 상당부분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그 상식이 대중의 상식으로 권력의 상식으로 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 바로 그 현실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조희연<성공회 신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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