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8월6일 국방부는 박종식 대변인을 통해 충격적인 발표문을 내놓았다. 「군수 사기 관에서는 전 주 미 군수근무 단 근무 이규환(당시 대령)이 개인사업을 위해 박세직 전 수경 사령관을 통한 고위층 청탁행위를 자행한 혐의로 지난 7월31일 수사에 착수, 8월5일 종결하였다. 박세직 장군은 청탁행위 배격운동에 솔선수범 해야 함에도 월권과 본분이탈을 자행, 새시대의 군인상과 군의 위신을 실추케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일벌백계의 추상같은 군 율을 수호하기 위해 비록 청탁행위로 성사된 것은 없었음이 조사결과 밝혀졌으나 박세직 사령관의 보직을 해임, 예편토록 조치하였다.」
국방부가 발표한 박세직 소장의「혐의」는 재미사업가로 신 군부가 득세한 뒤인 81년 한국을 드나들기 시작한 육사(12기)동기생 이규환씨를 위해 장관·청장·국영기업체장 등에게 사업협조를 청탁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씨는 78년 군수근무 단 재직 시 외국의 전자회사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귀국명령을 받고도 이에 불응했다가 국방부 징계위에서 파면, 보충역 이등병으로 강등 예편된 상태라고 발표문은 덧붙였다.
박세직씨(60·현 민자당의원)는 최근 기자에게『동기생인 이씨가 국내사정을 잘 모른다며「몇 군데 소개해 달라」길 래 알려주었을 뿐이다. 그 일로 돈이 오간 적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월권·본분이탈 "명분>
육사 12기의 막강한「스리 박」중 한 명인 박세직 소장이 이 정도의 일로 하루 아침에 옷을 벗었다는 데서 세간의 충격은 컸다. 전대통령의 바로 아래기수인 12기「3박」은 당시의 박수경 사령관과 박준병 보안사령관(현 민자당 의원)·박희도 특전사령관(전 육군참모총장·88년 예편)을 지칭한다·이들은 모두「하나회」의 회원이었다
박희도 장군은 12·12당시 공수여단장으로 휘하병력을 이끌고 서울에 들어와 육군본부를 점령한 장본인. 박준병 장군(12·12당시 20사단장)역시 이른바「경복궁멤버」였다. 따라서 이들은 신 군부 측 시각으로 볼 때 5공 성립 과정에서 전두환 장군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대주주에 속한다. 장성진급은 박준병·박세직 누 사람이 동기생 중 선두였고 박희도씨는 이들보다 1년 늦게 별을 달았다. 그러나 박세직 장군은 12·12당시 최전방 사단장(3사단)으로 대북 경계의 책임이나 서울과의 먼 거리로 불 때 .거사에 합류할 처지가 아니었다. 목숨을 건 적이 없기에 신 군부의 핵심그룹에 속할 수도 없었다. 다만 평소 박세직 소장의 능력을 인정하던 전두환 장군은 5·17을 거쳐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있던 80년 8월15일 그를 요직인 수경사령관으로 발탁했다. 『제2의 윤필용 사건이 터졌다!」박 장군이 전격 해임된 것을 보고 세간에서 8년 전(73년 4월)의 윤필용 사건을 대뜸 상기했다. 그리고 사건의 진짜 배경이 무엇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박수경 사령관이 윤필용 장군처럼 술자리에서「각하 다음은 나」라고 호언장담하다가 당했다더라』는 그럴듯한 풍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불과 8년의 시차를 두고 똑같은 수경사령관이자 육사 선두주자(윤 장군은 8기생 중 선두)인 소장 급 장성 두 명이 독직을 이유로 예편됐기 때문이었다.
<박희도씨와 대조적>
대통령의 지시로 박세직 장군을 수사했던 보안사의 책임자가 다른 사람도 아닌 동기생 (박준병 사령관)이었기에 풍문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또 윤필용 사건 당시 전대통령(준장시절)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알고 있던 극소수 인사들은 새삼「돌고 도는 역사」에 감회를 느껴야 했다.
전대통령은 왜 박세직 소장의 옷을 벗기기로 결심했을까. 왜 불과 반년만에 재 등용(한전 부사장 직)했을까. 당시 대통령의 결심과정을 지켜 본 비서관출신 Z씨의 말.『전대통령은 대단히 화가나 있었습니다. 최종 보고석상에서 첫마디에「상 차린 놈은 따로 있는데 감히 어디다 대고 이놈저놈이 젓가락질이야!」라고 일갈하더군요.
Z씨는 나아가 사건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통령의 정보채널은 풍부하고 정확합니다. 박 장군 예편사건은 그즈음 일부 지도층 인사들의「동향」에 쐐기를 박겠다는 의지가 작용한 것으로 봐야지요. 단순하게 사건 자체만 보다가는 내막을 오해하기 쉬워요. 박세직 사령관의 출근시간이 늦는다 든 가, 민간인접촉이 잦다 든 가 하는 정보보고가 대통령에게 올라가면서 저간의 인식이 폭발한 겁니다. 더구나 전대통령 입장에서는 박 사령관과 박희도 특전사령관(당시)이 여러모로 비교가 됐겠지요. 나는 전대통령이 박희도 장군을 장래의 참모총장 감으로 찍어 두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작 정권출범의 1등 공신인 박희도 장군은거에서 충직하게 일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은 박 사령관이 잡음을 내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니까 분노가 더욱 커진 거예요, 전대통령이 직접 보안사에 사건수사를 지시했습니다.
당시 박준병 사령관은 수사지시를 받기는 했지만 박세직 장군과 동기인데다 육사 때부터 단짝이라 아주 곤란했겠지요. 보안사령관이 박 장군을 싸고도는 기색이 보이니까 전대통령은 사건을 마무리할 때 박준병 사령관을 제치고 다른 보안사 간부를 청와대로 불러 최종보고를 들었습니다.
박 사령관의 난처한 입장을 배려했거나, 아니면 박 사령관의 보고는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거나 둘 중 하나 때문이었겠지요.박희도씨와>
<부인끼리도 친구간>
박준병·박세직 두 장군을 잘 아는 한 육사출신 인사는 이들이 얼마나 친한 사이였는가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육사시절 이들 두 사람과 다른 동기생 정 모씨는「트리오」로 통했어요. 꿈 많던 시기에 셋이서 의기가 투합해 몰려 다녔지요. 두 박씨는 군에서 줄곧 선두주자로 컸지만 정 모씨는 73년 강창성 보안사령관의 부하로 재직할 때 윤필용 사건의 판결문을 기초했던 전력 때문에 끝내 장군진급을 못하고 대령으로 예편하고 말았습니다.「하나회」가 박살났던 그 사건에 일조 한 것이 전두환 장군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지요. 이들이 육군대위이던 시절, 정 모씨의 누이동생이 이화여대에 합격했어요. 그 누이가 이대 기숙사에 들어가게 돼 오빠에게 이삿짐을 날라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마침 정씨는 부대 일로 서울에 나올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박세직 대위가 동기생 대신 이삿짐 나르는 일을 맡았는데, 박 대위는 그 덕에 이대 3학년이던 지금의 부인을 만나게 된 것으로 압니다. 또 박 대위는 얼마 후 자기 여자친구가 된 그 이대생 애인의 같은 과 친구를 단짝인 박준병 대위에게 소개하도록 주선했지요. 두 커플이 다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한편 박준병 당시보안사령관은 사건수사의 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당시 항간에는 나와 박세직 장군간의 파워게임이라느니, 허씨들이 작용했느니 하는 말들이 돈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둘 다 터무니없는 얘기였어요. 군내 파워게임이라면 참모총장을 염두에 둔 것일 텐데, 당시 인사관행으로 총장은 10년쯤 후의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네가 총장을 해라」고 농반진반으로 권할 정도였어요. 또 5년이나 후배인 허씨들이 우리 기수를 어쩐다는 건 군이나 육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오해일 뿐입니다. 대통령으로부터「박수경 사령관을 연행해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으니 정말 난감하더군요. 부하들에게「예우」를 당부하면서 수사를 시켰는데, 혐의라는 게 별 내용이 없었습니다. <26면에 계속>부인끼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