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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원주민의 해」특별 기획시리즈(5)|작업복 입으면 못나오는 "생지옥"|조선인징용 북해도 탄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20만에서 50만명으로 추정되는 홋카이도(북해도) 강제징용조선인들은 해방 후 귀국한사람들을 빼고는 대부분 일본 땅에 뼈를 묻었거나 「또 하나의 소수민족」재일한국인 또는 조선인으로 남아 외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나이는 이제 70세 이상의 고령이 대부분. 지난날의 기억도 희미해져 가고 있으나 「꼭 남기고 싶은 회한의 기록」이 너무나 많다. 생전에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전후 보상은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자라나는 후대에게 치욕의 역사를 올바로 전하고싶다는 절절한 바람에서다.
최근 작고한 한 강제연행자의 증언은 이곳 홋카이도에만 있었다는 잔혹 린치의 현장, 문어방의 실상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어 민중사발굴 시민단체관계자들 사이엔 교본처럼 전해지고 있다.

<툭하면 죽도로 린치>
홋카이도북부 후카가와 시에 본부를 둔 소라치 민중사 강좌팀이 발굴·정리해낸 채만진(90년 후카가와시에서 작고·경북 문경군 산양면 현리·1915년생)씨의 증언 중 중요부분을 발췌해 강제연행의 실상을 엿본다.
▲모집(강제연행) 및 일본큐슈이주=1939년12월께 큐슈 다카마쓰 탄광광부모집얘기를 전해듣고 문경고향에서 매일의 끼니를 때우기 힘든 소작인생활을 때려치울 결심을 했다.
만진은 점촌역 앞에서 문경군 각방면에서 모인 1백16명의 동포와 함께 3명의 모집인(일본인)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
부산에서 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넜다. 시모노세키(하관) 에 도착하자 국민 복에 전투 모를 쓴 남자 7, 8명이 나타나 인솔, 트럭5대에 분승했다.
목적지인 제2다카마쓰탄광에 도착하자마자 『황국신민으로서 산업보국을 위해 진력할 것을…』이라는 내용으로 신사 앞에서 선서를 하고 2층 목조건물 숙사로 들어갔다.
▲구타 및 감옥노동=40년8월 문경에서 온 고향사람 20명이 각기병에 걸려 다리가 퉁퉁 부었다. 4명의 일본인 노무감독이 와서 『일어나, 앉아』라고 호통을 치면서 갑자기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만진은 옆에서 보기 민망하여 『때리지 말고 말로 하쇼』하고 거들자 『이XX, 참견하지마』하면서 4명이 합세해 얼굴과 팔다리를 닥치는 대로 구타, 약10분간 린치가 계속되었다.
약1주 후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었다. 『그렇게 때리면 산업전사를 잃지 않느냐』고 항의하자 『전쟁터에서 명령을 받으면 목숨걸고라도 하는 거야』라며 이번에는 죽도(대나무 칼)로 후려쳤다.
어느 일요일 조선인 24∼25명이 모여 구타를 막기 위한 대책회의를 가졌다.
제각기 자신이 아는 피해상황을 보고했다.
『병으로 누운 친구를 각목으로 때려 갱내로 밀어 넣어 죽은채 실려 나왔다.』
『황국신민서사를 못 외운다고 하자 죽도로 구타했다.』
『조선인이 일하는 갱구는 낙반사고 위험성이 큰곳 뿐이다.』
『계약기간(1년)이 끝나 돌아가겠다고 하자 때리면서 계속 일하겠다는 도장을 강제로 찍게 했다.』
그 자리에서 폭력반대를 요구조건으로 스트라이크를 결의했다.
스트라이크가 시작된 날 오후 트럭 10여대에 분승한 경찰3백명 가량이 들이닥쳐 작업거부자를 모두 연행했다.

<인원배정 "인간사냥">
▲홋카이도탄광 문어방=부산항으로 추방된 며칠 후 이번에는 북해도 탄광기선주식회사이름으로 광부모집공고가 났다. 12월 강추위 속에 먹고 살 일이 막연해 다시 호조건이라는데 귀가 솔깃했다.
신청서류에 이름·나이·본적을 쓰고 제출, 소집 일에 나갔다. 이때 이미 농촌에서는 「토끼사냥」이라는 강제연행소문이 났다. 지역별로 도지사가 할당인원을 배정 받았고 기업모집담당자가 경찰의 협력아래 밭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길 가던 사람을 불문하고 트럭에 실어간다는 것이었다.
63명이 영문도 모른 채 홋카이도 탄광인 아카히라시 모시리역에 도착한 게 40년12월25일. 험상궂은 사람들이 나무봉을 들고 이름대신 번호를 부르는 가운데 군대 막사 같은 곳으로 기어 들어갔다. 이불은 빨래한지가 오래된 듯 때로 반질반질해졌고 퀴퀴한 냄새 때문에 세수 수건을 머리에 감싸고야 잠자리에 들 수 있을 정도였다.
막사한쪽에 간부방과 관리인실이 있었고 양편으로 60명씩 잘 수 있게 침상이 있었다. 방 한쪽 맨땅 위에 책상테이블 몇개가 나란히 있어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돼있었다. 식사라고 나온 밥공기엔 쌀밥이라곤 없고 꽁보리밥에 국수 몇가닥이 놓여있을 뿐이었다.

<"사상 나쁘다" 무일푼>
▲탈출=어느 날 굴진현장에서 감독과 말다툼이 생겼다.
파들어 가면서 나무기둥을 세우는 일이었는데 노무감독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만진이 하는 일에 일일이 간섭하는 것이었다.
『쓸데없이 일을 방해하지 말라』고 만진이 화를 내자 『뭐라고. 간부에게 대드는거냐』 라면서 나무통으로 후려갈기는 거였다. 그가 박치기를 하면서 반격자세를 취하자 『어디 두고보자』고 외치면서 자리를 피했다.
얼마 후 2명의 감독과 함께 나타난 일본인 노무감독들은 합세해 죽도로 사정없이 만진을 구타했다. 월급날 그는 사상이 나쁘다는 이유로 한푼도 못받았다. 하루 10시간 중노동의 대가치곤 너무했다.
만진은 한 간부로부터 이 막사가 한번 들어오면 못 나가는 「문어방」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홋카이도는 섬이다. 어딜 가도 바다니 절대로 도망갈 수 없을 것』이라는 충고를 들었다.
언제나 콩깻묵에 국수 몇가닥의 식사내용은 변함이 없었고 대우개선의 기미가 안보이자 만진은 다시 스트라이크를 계획했으나 일본말을 잘하는 조선인 감독에게 들켜 늘씬 두둘겨 맞았다.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 다이너마이트를 등에 지고 굴속에 뛰어들어가 자살을 기도했지만 그것도 실패했다.
홋카이도 개척사는 이처럼 아이누마을에 대한 철저한 탄압과 함께 강제징용자의 피눈물을 필요로 했다.
탄광촌으로 이름난 홋카이도중부 유바리 석탄박물관에 남아있는 『훗카이도탄광 50년사』를 들추면 유바리광에서만 일찍이 1918년 정달수·정호선·황금용·원기률·김연식·김익향 등 6명이 탄광사고로 사망한 것을 비롯, 1916년 35명이었던 조선인 갱부가 급증, 28년에는 1천5백명으로 늘어났다고 기록돼있다.
홋카이도는 일찍이 노동인력이 부족해지자 죄수들을 보내 강제노동 시킨 역사가 오래고 이 같은 노예노동의 전통이 「문어방」이라는 노동감옥을 만든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보고있다.
홋카이도 도립노동과학연구소가 펴낸 「탄광하청연구」를 보면 문어방의 유래를 설명,『타코는 스스로를 잡아먹는 바다생물로 문어노동자, 문어인부는 스스로의 몸이 도저히 수렁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열악한 상태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정의했다. 【삿포로=방인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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