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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 선언 20주년 만찬장에 나온 노태우 전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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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노태우 전 대통령이 29일 오후 서울 강남의 한 식당에서 열린 6.29 선언 20주년 기념 만찬에 참석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지팡이와 보좌진의 팔을 잡고 조심스럽게 걸었다.[사진=김경빈 기자]

승용차에서 내리는 노태우 전 대통령을 보좌진이 부축했다. 노 전 대통령의 손에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정해창 전 법무장관이 "어서 오십시오"라며 노 전 대통령을 맞았다. 몸은 불편해 보였지만 노 전 대통령의 표정은 밝았다.

29일 오후 서울 강남의 한 중식당. 20년 전인 1987년 이날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한다는 '6.29 선언'을 전격 발표했다. 그 6.29 선언 20주년을 맞아 노 전 대통령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날 행사는 6공화국(1988~93년)의 청와대 수석 비서관 모임인 '육청회'(6공화국 청와대 모임이라는 의미)가 마련했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정 전 장관이 모임의 회장이고, 손주환 전 정무수석(이후 공보처 장관).안교덕 전 민정수석.김유후 전 사정수석.이병기 전 의전수석 등 회원 수는 30여 명이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6월 미국에서 전립선 암 수술을 받은 뒤 5년째 투병 생활을 해오고 있다. 요즘 지팡이나 보행 보조대에 의지하지 않고는 걷기 힘든 상황이라고 측근들이 말했다. 차에서 내린 노 전 대통령을 뒤따라 엘리베이터에 함께 탄 기자가 "건강해 보이신다"고 하자 노 전 대통령이 뭐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알아듣기는 어려웠다.

육청회 회원들과 인사를 나눈 뒤 자리에 앉은 그에게 참석자들이 "기자가 왔다"고 하자 6.29 선언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알아듣기 어려웠다. 가까이 있던 노 전 대통령의 한 측근이 "6.10 항쟁은 기억하면서 6.29 선언은 왜 기억하지 못하느냐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노 전 대통령은 6.10 항쟁이 역사적 평가를 받는 반면 6.29 선언은 '항복 선언'으로 평가되는 요즘 분위기가 못내 섭섭한 눈치였다. 이날 만찬엔 정 전 장관과 손주환.안교덕.김유후.이병기 전 수석 외에 심대평 전 행정수석, 이진설 전 경제수석과 임인규 전 경제보좌관, 정구영 전 검찰총장, 이상연 전 안기부장 등 18명이 참석했다. 아들 재헌(42.미국 뉴욕주 변호사)씨도 자리를 함께했다. 미국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던 재헌씨는 아버지의 건강 때문에 국내에 정착하기로 하고 지난달 국내의 한 로펌에 취직했다.

재헌씨는 "6.29 선언은 대통령 직선제뿐 아니라 지방자치제 등 발전된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해 정착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6.29 선언 당시 노 전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서 보좌했던 이병기 전 수석은 "선언문을 발표하면 국민이 청와대로 쳐들어 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성숙하게 받아들여 줬다"고 회고했다.

노 전 대통령의 건강에 대해 한 측근은 "암 수술 경과는 좋지만 약 복용으로 몇 가지 부작용이 따랐다"고 말했다.

수술 과정에서 전립선의 괄약근을 잘라 내는 바람에 자율신경이 제 기능을 못하게 됐다. 이를 조절하기 위해 먹는 약이 혈압을 떨어뜨렸고, 혈압이 계속 떨어지다 보니 말이 어눌해졌다고 한다. 지팡이나 보행 보조대를 사용하는 건 현기증 때문이라고 한다.

지난달 일부 언론에 "노 전 대통령이 추징금은 내지 않고 연희동 자택을 호화스럽게 수리했다"는 보도가 났다. 이에 대해 노 전 대통령 측은 "이동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문턱을 없애는 공사를 하며 낡은 보일러 등을 고친 것"이라며 "호화 수리는 말도 안 된다"고 반박했다.

다리 근육 강화를 위해 노 전 대통령은 물속 걷기 훈련을 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 집 2층에 7.5m 길이의 욕조를 설치했다. 올 1, 2월 두 달간은 수영장이 딸린 강원도 용평의 리조트에서 요양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주로 연희동 자택에서 손님을 맞는다. 딸 소영씨와 아들 재헌씨 가족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찾는다. 인척인 박철언 전 장관도 한 달에 서너 차례 들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이 편하게 대하는 강영훈.정원식.현승종 전 국무총리도 자주 방문한다. 대선이 다가오면서 최근 '찾아 뵙고 싶다'는 전갈을 넣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그는 정중히 거절하고 있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매일 아침 오전 5시30분에 기상해 조간 신문을 읽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컴퓨터 앞에서 재임 시절 청와대 수석이나 장관들이 보낸 e-메일에 답장을 쓰는 게 일과 중 하나다. 노 전 대통령이 '잘나가던' 시절에 비해 고교(경북고)와 대학(육사) 동창 모임은 뜸해졌다고 노 전 대통령 측 관계자는 전했다.

이가영 기자<ideal@joongang.co.kr>

사진=김경빈 기자 <kgbo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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